오랜 시간 음악을 들어왔다. 음반을 사고, 음악 잡지를 읽고, 불법 복제 비디오를 보며 어떻게든 음악을 탐했다. 그 가운데 음악 잡지를 읽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음악을 그리 좋아하면서도 내가 음악을 직접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음악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그 음악 잡지들 덕이었다. 포토뮤직, 뮤직라이프, 핫뮤직, 서브, 비트, MDM 등을 차례로 읽으며 음악 잡지의 전성기를 함께했다. 가장 좋아한 음악 필자는 성문영이었다. <핫뮤직> 기자 출신으로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 잡지라 생각하는) <서브>의 편집장을 맡았던 그는 늘 따라 하고 싶은 글을 썼다. 지금 나의 문체와 그때 내가 흠모하며 읽은 문체는 아주 다르지만, 행간에 담겨 있던 유머와 사려를 닮고 싶었다. 그는 좋은 음악을 골라낼 수 있는 안목이 있었고, 이를 듣고 싶게 만드는 유려한 문체를 갖고 있었다. 한국에서 스미스, 제프 버클리, 벨 앤 세바스찬 등의 음악이 알려지는 데 성문영은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저 그렇게 좋은 글을 읽고 흉내 내며 글을 끼적여 온 나에게도 어느 날부터 '음악평론가'란 직함이 붙기 시작했다. 글을 청탁해오고, 말을 요청하는 곳도 많아졌다. 그렇게 대중음악평론가가 되어 글을 쓰면서도 일종의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었다. 마음 한편의 작은 사대주의였다. 영미권의 평론가들은 얼마나 멋진 글을 쓸까, 하는 것들이었다. 현장을 경험하고 쓴 글을 이길 수는 없다. 그들은 현장에서 씬(scene)과 함께 호흡하며 글을 썼다. 부럽기도 하고 주눅도 들었다. 흔하게 들을 수 있는 한국 평론가들의 수준이 낮다는 말엔 영미권 평론가들 수준은 높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도 경력이 쌓이고 더 많은 정보와 글을 접하면서 해외 매체와 크리틱의 수준이 모두 높은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한국 누군가의 글이 인상비평으로 쓰인 수준 낮은 글이라면, 외국에도 인상비평으로만 가득한 글이 있었다. '황색 언론'이라 부를 만한 저질의 글은 외국이 더 많고 강렬했다. 외국에 좋은 글을 쓰는 음악평론가들이 존재한다면 한국에도 성문영뿐 아니라 김현준, 신현준, 최민우, 황덕호 등 내가 많이 배우고 자극받은 훌륭한 선배·동료 평론가들이 있었다.
그런 생각은 요즘 들어 더 강해졌다. 어린 시절 절대적인 존재로 받들던 해외 매체가 자신들의 유불리에 따라 언제든 논조와 철학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절감하는 요즘이다. 그저 클릭 수를 더 유도하기 위해, 한 부라도 더 팔기 위해 케이팝에 알랑방귀를 뀌는 모습은 딱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그 매체들이 케이팝이란 음악 자체를 높이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매우 빈약하다. 글의 내용마저도 충실하지 못하다. 가령 <피치포크>에서 뒤늦게 8.3점을 준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리뷰는 리뷰가 아니라 서태지와 아이들의 바이오그래피를 정리한 것에 가깝다. 이런 애매한 글을 쓰기 위해서 '유'씨 성을 가진 한국계 미국인이 필요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매체 <롤링스톤>의 극적인 변신은 그래서 더 우스꽝스럽다. 올해 1월 1일 공개한 '역대 위대한 가수 200' 순위는 많은 논란을 낳았다. 한국 가수 아이유와 정국이 순위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대신에 셀린 디옹, 냇 킹 콜, 토니 베넷 등이 빠진 명단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음악애호가는 드물었다. '미국의 중년 백인 남성이 듣는 록 음악'을 가장 선호하던 <롤링스톤>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비백인·여성·청년 음악가를 앞에 세우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시대정신이라기보다는 야합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 부정적인 느낌은 <롤링스톤>이 최근에 발표한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곡' 순위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7월 20일 공개된 순위는 발표와 함께 많은 논란을 낳았다.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는 순위였다. 전문성도 없었고, 보편성도 없었고, '어그로'만 가득했다. 그저 '케이팝'으로 대상을 한정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테지만, 어떤 전문성도 없는 얼치기 케이팝 애호가들이 모여 <롤링스톤>이라는 간판을 등에 업고 '한국 대중음악' 순위를 정하려 했단 것에서부터 단단히 잘못됐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어떤 기준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성인가, 영향력인가, 음악성인가, 인기인가, 무엇 하나 갖다 맞추기가 어렵다. 이 모두를 두루 고려했다 말하고 싶겠지만 바로 반박할 예가 너무나 많다. 100곡의 노래 가운데 상당수를 케이팝이 차지하는 건 이 순위가 마치 인기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빠져 있어선 안 된다.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일 년'과 SG 워너비의 'Timeless'도 마찬가지다. 이 노래들을 다 뺀 채 영턱스 클럽의 '정'이 58위에 오는 것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지적할 게 너무나 많지만, 소녀시대의 'Gee'를 1위로 선정한 건 그 자체로 기괴한 코미디다. 한때 한국 대중음악은 '유행가'란 멸칭으로 불리었다. 그저 잠깐 유행하다 사라지는 인스턴트 음악이라는 폄하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멸칭을 극복하고 대중음악이라는 칭호를 획득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나는 지금 우리가 다시 유행가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행의 주기는 더 짧아졌고, 그렇게 흘러간 케이팝 '히트곡'을 다시 찾아 듣진 않는다. 'Gee'를 지금까지도 듣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가장 위대한'이라는 수식을 붙이며 이처럼 생명력이 짧은 노래를 1위로 올리는 사례는 또 얼마나 될까. 백번 양보해 케이팝 노래를 1위로 꼽을 순 있다 해도 'Gee'는 어떤 기준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인기로 따지자면 넘지 못할 노래들이 있고, 역사성 혹은 영향력으로 따지자면 명백하게 원더걸스의 'Tell Me'가 'Gee'보다 앞에 서야 한다. <롤링스톤>이 '미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곡'을 꼽는다면 절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Baby One More Time'이나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Step By Step'을 1위로 올리진 않을 것이다. 아니 100곡에조차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음악에는 그래도 된다는 모습을 보면 이 순위가 케이팝의 올려치기인 건지, 한국 대중음악 전체의 내려치기인 건지 실소와 쓴웃음이 함께 난다. 무엇보다 가장 기분이 나쁜 건 이런 엉터리 순위를 위해 한국 대중음악 역사의 위대한 곡들이 이용당했다는 것이다. 한국 스탠더드 팝의 시대를 연 손석우 작곡의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한국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들국화 1집의 '그것만이 내 세상' 같은 노래들이 이 순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알리바이 혹은 수단으로만 자리한다.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위로는 (외국 곡의 리메이크인) 에스파의 'Next Level'이, '그것만이 내 세상' 위에는 티아라의 'Bo Peep Bo Peep'이 올라가 있다. 할 말을 잃은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곡'은 케이팝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다른 음악도 많이 알고 있고 그만큼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있다 자처하는 중학생이 만든 듯한 순위표다. 그 중학생에게 <롤링스톤>이라는 너무나 과분한 배경이 자리한 게 이번 논란의 핵심이다. 이번 순위 선정과 리뷰에 참여한 10명의 컨트리뷰터 가운데 4명이 김씨 성을 갖고 있었다. 그 김씨들을 보며 '전문성'이란 낱말을 떠올렸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케이팝을 사랑하고 케이팝을 자랑스러워했을 그들은 분명 케이팝에 전문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 범위를 'K-Pop'이 아닌 'Korean Pop Music'으로 넓힌 순간 문제가 시작됐다. 만약 이 선정에 한국의 음악평론가가 참여했다면 윤심덕의 '사의 찬미'를 넣는 괴상한 선택은 막았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현장을 경험하고 쓴 글을 이길 수는 없다'는 문장과 궤를 같이한다. 케이팝이 돈이 된다는 사실 앞에서 <롤링스톤>이나 <NME> 등 유력 매체가 보이는 행태를 보면서 과거 나의 열등감을 완전히 버릴 수 있었다. 자연스레 생각은 이렇게 바뀌었다. 어디나 사람 사는 세상이고, 그곳에도 좋은 시각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고, 글을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돈과 명성 앞에서 자신의 기준이나 신념을 파는 이도 있다. <롤링스톤>의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곡' 순위는 이 모든 것의 총체적 증거다.
2000년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 기자로 음악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네이버 <온스테이지> 기획위원, 한겨레신문 대중음악 전문 객원기자로 일했고,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위원과 멜론 <트랙제로> 전문위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여러 온라인·오프라인 매체에서 정기·비정기적으로 글 쓰고 말하고 있습니다. <케이팝 세계를 홀리다>를 썼고, <한국 팝의 고고학 1990>, <멜로우 시티 멜로우 팝>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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