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나치 독일의 히틀러에 대항해 소련의 스탈린과 손을 잡았다. 그러면 공산주의자인 스탈린과 손을 잡은 처칠과 루스벨트가 '공산주의자'인가? 그들은 각각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독립을 지키기 위해 스탈린의 공산당과 손을 잡은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단지 남아공 백인정권의 폭압과 국가폭력으로부터 우리 핍박받는 흑인들의 생명과 독립을 지키기 위해, 우리 남아공 흑인들의 독립을 지원하는 공산당에 가입했을 뿐이다."
1964년 6월, 결국 남아공 백인판사는 국제사회의 압력과 만델라의 탁월한 변론 때문인지, 그에게 사형선고를 못 내리고 종신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만델라는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압력과 인종적 내전을 두려워한 남아공 백인 대통령 디 클라크는 수감 27년 만인 지난 1990년, 마지못해 만델라를 석방시킨다. 석방된 만델라는 디 클라크 대통령과 함께 남아공 인종차별정책을 없애기 위해 협상하며 결국 1994년 남아공 흑인들의 참정권을 이끌어내고 남아공 최초 흑인 대통령에 당선된다. 평화적으로 백인들로부터 정권을 잡은 만델라는 보복이나 복수보다는 흑백 인종 간의 화해를 강조하며 과거 백인정권 중 흑인들을 상대로 발생한 인권침해를 조사하는 진실화해위원회를 설립한다. 필자가 노무현 정부시절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는 바로 이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를 벤치마킹 한 것이다. 만델라는 사회주의자였지만 백인정권과의 협상을 통해 기존의 자본주의체제를 남아공에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토지개혁과 빈곤타파, 의료혜택을 확산하며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는 정책을 취한다. 그는 1998년 그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갈 즈음 그의 측근들은 다른 아프리카의 정치인들처럼 만델라에게 대통령 재선에 도전할 것을 권유한다. 그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을 듯 높았기에 그가 재선에 도전한다면 당선은 무난해 보였다. 하지만 만델라는 그런 측근들의 재선출마 권유를 단칼에 거절한다. 그리고 결국 선거를 거쳐 또 다른 흑인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인간 만델라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인물이었다. 백인 우익들은 그를 '공산주의자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했다. 반면 그의 측근 중 과격한 흑인들은 만델라가 과거 흑인들을 탄압하고 차별한 백인들과 기꺼이 협상하고 '화해'하는 그의 진정성에 대해 회의하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만델라에 대한 남아공내의 비난과 회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 세계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며 큰 찬사와 더불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사후 10년이 된 지금도 만델라는 남아공 국민들로부터 "민족의 아버지"라는 칭호로 찬사를 받고 있다. 불의한 시대를 살면서도 자아실현도 하고 물질적 풍부함도 함께 누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1964년부터 1990년까지 약 27년간 백인정권에 의해 수감생활을 하면서 남아공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의 희망이 되어왔던 만델라는 모든 인간은 인생에 있어서 두 가지 의무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가족이나 부모에 대한 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국이나 인류공동체에 대한 의무다. 안정된 사회나 정의가 자리 잡은 사회에서는, 개인이 각자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이러한 두 가지 의무를 적절히 수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권이 묵살당하고 독재와 거짓이 판을 치는 나라나 사회에서는, 인간은 이러한 두 가지 의무를 제대로 정직하게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부정부패와 불의가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정직하게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는 개인은 권력에 의해 소외되어가거나 처벌받기 일쑤다. 독재자나 사기꾼이 언론조작이나 술수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사회에서, 조국이나 인류공동체에 대해 올바른 의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개인은 불가피하게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소중한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고 자기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빼앗긴 삶을 강요받게 된다. 만델라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홍범도(1868-1943)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넬슨 만델라와 같이 처음에 홍범도는 가족의 안녕을 등지고 민족의 안녕을 위해 일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혹독한 일제강점기를 몸소 겪고 그는 자신이나 가족의 안녕보다는 민족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전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불의가 넘치는 일제강점기 민족을 위해 올바른 길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곧 그에게 한 부모의 자식으로서, 한 여성의 남편으로서,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수행할 귀중한 기회를 가차 없이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1907년 홍범도의 아내는 남편을 전향시키라는 회유와 협박을 거절한 대가로 일본경찰들이 발가락 사이에 불붙인 심지를 끼워 놓는 등 무지막지한 고문을 받던 중 혀를 끊어 벙어리가 되었다. 그후 감옥에서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불과 30대 후반의 나이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홍양순은 이듬해인 1908년 홍범도와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에 참전하던 중 전사했다. 홍범도는 그후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대회에 국제공산당이 지휘한 원동(遠東)의 식민지·반식민지 혁명가로 참석한다. 그리고 5년 후인 1927년 그는 소련의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후인 1937년 스탈린은 홍범도 등 고려인들을 외모가 일본인들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래서 잠재적 일본 간첩을 근원적으로 차단한다는 차원에서 강제로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황량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다. 그곳에서 홍범도는 한 때 집단농장을 운영했고, 말년에는 고려극장의 관리인으로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러다가 1943년 해방을 불과 두 해 앞두고 독립운동가 홍범도는 향년 76세의 나이로 쓸쓸한 타향에서 한 많은 삶을 마쳤고 그가 살던 지역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지난 1993년 북한은 홍범도가 평양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봉환 시도를 했다. 하지만 고려인 사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지난 2021년 8월 15일, 그의 유해가 마침내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어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80년이 지난 지금 윤석열 정권은 느닷없이 홍범도가 '공산주의자'라며 육사에 설치된 그의 흉상을 철거하고 있다. 이어서 지난 7일 대정부질문에서 한덕수 총리는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과 관련해 야당 의원이 '1943년(일제강점기) 당시 우리의 주적은 일본이 맞냐'는 질의에 즉답을 계속 피했다. 한 총리는 위성곤 민주당 의원이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시던 1943년 우리의 주적은 일본이 맞냐"고 묻자 "더 말씀 드릴 필요가 없다. 이제 그만하시라. 그만 정치화하고 그만 이념화하라. 다 알고 있지 않냐"며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위성곤 의원의 지적처럼 사후 80년이 지난 오늘 홍범도 장군에 대한 "정치화와 이념화"는 바로 한덕수 총리와 윤석열 정권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아공의 민주화와 흑인들의 참정권을 위해 싸운 만델라는 지금도 남아공 국민들로부터 "민족의 아버지"라는 칭호로 찬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가족까지 희생당하며 평생 독립운동으로 온 삶을 바친 홍범도 장군은 지금 하루가 멀다 하고 '자유'를 떠드는 윤석열 정권에서 '공산주의자'로 '찬밥' 대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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