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기후 위기와 전염병의 대유행, 4차 산업혁명과 같은 문명사적 도전과 미중경쟁, 지정학적 갈등, 글로벌 공급망의 교란과 자원무기화, 경제블록화 등 국제질서의 대혼란기에 직면해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시기에 수면 아래 있던 지정학적 위험도 갈등 축적기를 거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표출됐다. 마치 탈냉전과 세계화에서 나와 새로운 시대의 도입부에 들어선 듯 혼란스럽다. 이러한 변화 속에 미국을 중심으로 '경제안보'가 국가 안보와 동일시되며 새로운 국가 정책 기조를 형성하면서, 기존에 추구했던 개방성과 상호의존성은 오히려 안보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경제안보'의 범위도 에너지, 식량, 희귀 자원뿐만 아니라 반도체, 첨단기술, 공급망 등 국가의 유지·발전에 필요한 모든 범위로 확대되었다. 미중 경쟁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프레임과 '경제안보'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 기조는 미국의 대중국 견제 전략과 맞물리면서 진영 경쟁, 첨단기술 경쟁, 믿을 수 있는 파트너들로 구성된 공급망 재편, 자국 내 제조업 생산력 강화 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반도체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과 같은 미국의 새로운 법 제정 및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와 CHIP4 형성, 나토의 전략 범위 확장, 한미일 협력 강화 등 다층적이고 전방위적으로 한국의 국내외 정치·경제·안보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동북아 평화와 경제발전을 추구했던 한국의 대외 전략도 점차 전략적 명확성으로 선회했다. IPEF·CHIP4와 같이 미국이 구성한 새로운 공급망에 한국이 참여하고, 군사훈련을 포함한 한미일 공조를 강화함에 따라 중국은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북한은 도발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한국이 처한 전략 환경은 비우호적으로 변하고 동북아 국제질서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한일 관계를 회복하고 미국과 적극적인 경제적· 안보적 협력을 이어가는 한편 외교적으로 글로벌 중추국가로서의 역량을 강화해가고 있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지정학적으로 미중일러 사이의 균형점 역할을 하는 한국의 좌표가 미국과 일본 쪽으로 이동하고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는 소원해졌으며, 그 틈을 이용하여 북한은 북러 관계를 강화했다. 최근 북한의 위성 발사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이 9.19 군사합의에 대한 일부 효력을 정지하면서 사실상 남북관계가 악화일로에 있다. 미중 경쟁이 심화하면서 강대국들의 부정적인 압력이 한반도에 투사될 수 있고, 지금과 같이 북한의 도발 억제를 위한 국제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한국이 처한 직접적인 안보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다. 수출주도형 국가이면서 분단 상태로 휴전중인 중간국, 한국의 경제·안보·외교 전략의 방향은 명확하다. 첫째, 한국이 미국이나 일본과 다른 지정학적 상황에 있음을 인식하고 지정학적 특수성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 강대국의 부정적인 압력이 상승하지 않는 방향으로, 비우호적인 전략 환경에서도 중국· 러시아의 핵심 이익은 침해하지 않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과 한미일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한국의 안보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것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 한국은 안보를 위해 한미일 협력을 강화했지만, 반대급부적으로 북한과의 관계 악화, 북한의 핵고도화 억제력 부재 등 다른 측면에서 안보적 위험은 계속 커지는 상황임을 직시하고 북한이라는 실제적인 안보 위협을 헤징하기 위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강대국의 지정학적 각축 사이에서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안보를 위해 무리하게 나토 가입을 추진한 것이 오히려 우크라이나를 극단적 안보 불안 상태에 처하게 했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셋째, 미국과 동맹 관계이면서 경제적·안보적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한국은 룰 메이커(rule maker)인 미국이 룰(rule)을 변경하는 상황에서, 재편되는 글로벌 공급망의 주요 국가로서 그 안에서 자율성을 확보하고, 능동적으로 한중 경제협력 구조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 전쟁은 장기간 쌓여온 양 진영 간 갈등의 폭발이자 생존과 안보를 지키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이다. 러-우 전쟁이나 이-팔 전쟁을 단순히 선과 악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이유다.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나 하마스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갈등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전쟁을 예방하고 이미 시작된 전쟁을 종결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은 갈등 축적기를 거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두 전쟁도 마찬가지이며, 지정학적 위험이 고조되는 대만 해협과 한반도도 그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보는 새로운 관점과 유연한 사고로 지정학적 갈등과 그 압력을 낮추려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은 지정학적 갈등이 첨예한 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굳건한 전통 안보 위에 경제안보를 추구해야 하며 미중경쟁 상황에서도 한국의 경제·외교·안보의 지향점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최재덕교수는 성균관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박사학위(한중관계)를 받았고 모스크바국립대학 국제관계 박사후과정을 거쳤습니다. 이후 연세대 통일연구원 전문연구원을 거쳐 대통령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고 현재 국가균형발전위원회 기능분과위원장,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 현대중국학회 대외협력위원장, 슬라브유라시아학회 이사 등을 맡고 있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