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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스테이지와 향음악사의 마지막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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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스테이지와 향음악사의 마지막을 보면서 [음악의 쓸모] 나이 든 평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온스테이지>가 끝났다. 2023년 11월 16일, 페퍼톤스의 영상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온스테이지는 네이버 문화재단에서 운영해 온 사회공헌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음악인들의 영상을 찍어 대중에게 공개하는 플랫폼이었다. '숨은 음악, 세상과 만나다'라는 슬로건처럼 대중에게는 덜 알려진 음악인들을 알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2010년 11월 8일에 시작했으니 꼬박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주 한 팀의 음악인을 선택해 정성껏 영상을 촬영하고 이를 공개해 왔다. 페퍼톤스가 667회째였으니 일부 중복으로 출연한 음악인이 있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음악인이 매주 대중과 만나 온 건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온스테이지는 한 달에 한 번, 기획위원들이 모여 영상을 찍을 음악인을 선정하는 회의를 했다. 회의 때마다 요즘 어떤 음악인이 뜨고 있는지, 누가 라이브를 잘하는지, 이번에 발표된 어떤 앨범이 괜찮은지를 논의했다. 내가 그 과정을 잘 아는 건 나도 온스테이지의 기획위원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온스테이지의 13년 역사에서 절반에 가까운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달 안국역 근처에 있는 네이버 문화재단의 회의실에 가서 논의의 시간을 거쳤다. 그 시간은 즐거웠다. 온스테이지가 음악인들의 명함 역할을 했다면, 나에게는 훈장 같은 역할을 했다. '씬'에 속한 한 사람으로, 음악에 대해 말하고 글을 쓰는 일을 하는 나에게 네이버 <온스테이지>와 EBS <스페이스 공감>의 기획위원이란 자리는 가장 자랑스러운 훈장이었고 자랑하고 싶은 경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온스테이지는 없다. 온스테이지의 종료를 알리는 글을 보며 한동안 마음이 헛헛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 아쉬움만은 아니었다. 온스테이지 측은 마지막을 알리며 "누구나 쉽게 콘텐츠를 제작하고 더 많은 팬을 만날 수 있는 변화 속에서 숨은 음악과 뮤지션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던 그 소임을 다"했다고 종료의 이유를 말했다. 길지 않은 문장의 행간에서 시대의 변화가 그대로 전달됐다. 그래서 더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처음 온스테이지가 등장했을 때와 지금은 그 위상이 꽤 달라졌다. 관심도 덜해졌다. 맡은 임무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온스테이지 측에서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온스테이지의 종료와 함께 또 다른 헛헛함을 던져준 사건이 있었다. 음반점 향음악사가 홈페이지 폐쇄를 알린 것이다. 향뮤직, 혹은 향음악사는 상징적인 음반 매장이었다. 음악을 좀 듣는다 싶은 사람들은 신촌의 향음악사 또는 홍대 앞의 퍼플레코드를 찾았다. 그곳에는 일반적인 음반점에선 구할 수 없는 해외 인디 레코드나 한국 인디 음악인의 시디가 있었다. 그 음악들이 이른바 '홍대 씬'을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 건 분명하다. 가령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이름이 된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데뷔 EP <앵콜 요청 금지>를 살 수 있는 곳은 향음악사뿐이었다. 그곳에서 미리듣기 기능을 통해 약 1분 정도 '앵콜 요청 금지'를 들은 난 그들의 음반을 사고, 당시 운영하던 블로그에 음악을 알렸다. 이런 과정이 향음악사라는 플랫폼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 역할을 해온 향음악사 역시 세월의 흐름과 함께 찾아온 세상의 변화를 막을 수 없었다. 오프라인 매장을 접고 온라인으로만 명맥을 잇던 향음악사는 이제 온라인 홈페이지마저 닫고 포털 사이트의 스토어 매장에서 영업을 이어간다고 한다. 향음악사란 이름은 계속 남지만 받아들이는 느낌은 확실히 다를 수밖에 없다. 홈페이지 폐쇄를 앞두고 음반 할인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 그 음반들을 좋다고 장바구니에 담으면서도 기분은 씁쓸했다. 향음악사 오프라인 매장에서 산 몇몇 CD는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한다. 그랜대디(Grandaddy)와 토터스(Tortoise)의 CD를 사던 어린 시절의 내가 아직도 신촌 매장에 남아있는 것만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온스테이지>와 향음악사의 종료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들은 나에게 한 시대의 종언처럼 다가왔다. 그 저물어가는 시대에는 분명 나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니까 향음악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CD를 사고, 그렇게 들은 음악을 자양분으로 삼아 글을 쓰고 <온스테이지> 기획위원을 했던 나의 역할도 이제는 방향 전환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향음악사와 퍼플레코드에서 샀던 새로운 시대의 음악은 이제 구식이 됐고, 굳이 CD를 사지 않아도 전 세계의 '힙'한 음악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난 여전히 시대의 호흡과 함께할 수 있는가?'가 나의 고민이었다. 내가 구식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수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내일모레 쉰이 되는 내가 언제까지 젊은 음악을 쫓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생각한다. 틱톡은 깔아본 적이 없고, 2분짜리 노래의 범람에 눈살을 찌푸리고, 고작 50년 정도밖에 안 된 ‘앨범’이라는 포맷에 여전히 매달리는 내가 언제까지 젊은 음악과 호흡할 수 있을까. 설령 보조를 맞출 수 있다 해도 겨우 쫓아가는 수준일 것이다. 사고와 경험과 감각 자체가 다르다. 그런 역할은 최소한 나보다 스무 살은 젊은 평자들에게 맡겨야 합당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고, 또 잘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최근에 출간한 책 <비욘드 레코드: 1985-1995 인천 록·메탈 연대기>는 이런 내 고민의 실마리가 되어준 작업이었다. 책의 부제처럼 <비욘드 레코드>는 1985년부터 1995년까지 발흥해 독자적인 씬을 이루었던 인천 헤비메탈 씬을 조명한 책이다. 기획자 고경표가 처음 전시를 통해 시작했던 작업이 책으로 완결됐다. 나도 책에 힘을 조금 보탰다. 당시 활약했던 음악인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이를 바탕으로 글을 썼다. 인천의 헤비메탈을 연구하면서 티삼스나 사하라 같은 익숙한 이름들 말고도 제3세대의 꿈이나 아웃사이더스 같이 외부적으론 덜 알려졌지만 사료적으론 중요한 이름들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의 음악 씬에 관심이 크다. 그래서 지금 부산 인디 씬의 약진에 관심이 많고, 여전히 대구 인디 밴드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는다. 한때 서울만큼이나 기세가 좋았던 청주 하드코어 씬에 대한 이야기도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중반까지 인천과 부산의 헤비메탈은 '씬'이란 말을 써도 될 정도로 번성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서울이 아닌 한 지역의 음악 씬을 깊게 다룬 책을 완성했다는 것으로 약간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사례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할 수 있고, 더 잘할 수 있는 건 이런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 작업이 <비욘드 레코드>였다. 내가 젊은 세대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과거의 것들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우연히 최근 내가 해온 일련의 큼직한 작업은 모두 이런 기록과 관련한 일이었다. 현저히 '아카이브'가 부족한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중견 평론가로서 할 일은 이런 기록이 아닐까. 당연히 지금의 음악을 따라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에 무게중심을 두는 게 현실적이기도 하다. 명분도 있는 데다 가치도 있는 일이다. 계획하고 있는 일이 몇 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과거를 정리·기록하는 일이다. 가령 나는 한국의 헤비메탈 역사를 정리하는 책을 내고 싶다는 오랜 바람을 갖고 있는데 <비욘드 레코드>의 인천에서부터 범위를 더 확장해 나가면 될 것이다. 역시 오래 계획했던 인터뷰 전문 웹진을 올해 창간할 것이다. 기존 매체에선 아무도 다루지 않는, 하지만 대중음악계에선 너무나 중요한 인물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가령 민상용이란 이름은 어떨까. 대부분 사람에겐 낯선 이름이겠지만, 그는 지금 인디 씬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듀서다. 그가 만든 결과물들이 이를 증명한다. 당장 지난해만 해도 남재섭 <당신이 본 세계는 당신의 영화>, 이형주 <우리는 서로를 간직하려고>, 황푸하 <두 얼굴> 등의 앨범을 프로듀싱했다. 이 앨범들은 모두 포크로 분류되지만 사운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린다. 프로듀서의 공이다. 이런 중요한 프로듀서를 조명한 적이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평단이든 매체든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건 나의 새해 계획이지만 한국 대중음악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향음악사에서 수입 CD를 사서 듣고, 월말이면 종이 잡지를 기다리던 과거의 나와, 그 경험을 거쳐 이제는 나이가 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온스테이지>의 마지막 회. ⓒ네이버 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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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2000년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 기자로 음악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네이버 <온스테이지> 기획위원, 한겨레신문 대중음악 전문 객원기자로 일했고,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위원과 멜론 <트랙제로> 전문위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여러 온라인·오프라인 매체에서 정기·비정기적으로 글 쓰고 말하고 있습니다. <케이팝 세계를 홀리다>를 썼고, <한국 팝의 고고학 1990>, <멜로우 시티 멜로우 팝>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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