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고통과 현장의 경험이 강력하게 새로운 보건의료 체제를 요구할 때, 단언컨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이 '전가의 보도'로 동원될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그 복잡한 정책 개선과 체계 개혁, 엄청난 재정 소요, 예상하기조차 어려운 사회적 갈등 해결 등을 모두 흡수할 수 있는 만능의 대안으로 소비될 터.(☞ 관련 기사 : '서리풀 논평' 2020년 7월 27일 자 '의대 정원 확대, 사회에 제대로 이득이 돌아가려면')
우리는 의대 정원 확대가 불러올 '착시 효과'를 경계해야 한다. 의사 인력의 충원만으로 지역·필수의료의 위기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정부 역시 의사 수 증가는 '필요' 조건일 뿐이라고 밝혔다. 지역과 진료 과목별로 의사 인력의 분포를 편중·왜곡시키는 구조가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정부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서 구조 개선으로 제시한 대안들은 대부분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것들이다. 수가 인상과 같은 경제적 인센티브 강화가 그 예이다. 하지만 얼마를 더 보상해줘야 비도시 지역과, 신체적·정신적 부담이 큰 필수의료 업무를 떠나지 않도록 만들 수 있을까? 이러한 시장적 메커니즘에 의존하는 인력 수급 전략에 대해 많은 회의론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시장'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논의는 드문 듯 하다. 우리는 지역·필수의료 위기의 근본 원인은 보건의료체계가 지나치게 시장화·영리화돼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과도한 시장화에서 기인한 문제를 시장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정부 계획에 동의하기 어렵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체계 차원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체계적(총체적) 관점을 토대로 '지역'과 '필수'라는 부분에서 보건의료 '체계(체제)' 전체의 위기로 문제 인식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시장형' 보건의료체계 너머를 상상하고 모색하는 가운데 체계의 시장성·영리성 약화, 즉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를 추구해야 한다. 의사 인력의 공급 확대 정책 역시 공공성 강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 기조는 공공성 약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적극 추진 중에 있는 보건의료산업 육성 정책은 체계의 시장성·영리성을 심화시킬 위험이 크다. 대통령의 신년 대담 발언에서도 드러나듯 의대 증원조차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우리나라 의료 인력 수준이 세계 최고이기 때문에 의료 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이나 바이오헬스케어 분야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의대 정원 확대는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KBS 특별 대담 '대통령실을 가다'에서)
증원된 의사 인력을 보건의료 산업화를 위해 활용한다면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될 것이다. 구체적 후속 조치가 나올지 지켜볼 필요가 있겠지만, 대통령의 이 발언만 놓고 보더라도 경제성장을 위해 보건의료를 산업화하려는 통치의 비전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니 보건의료 위기도 시장과 산업을 키우는 방식으로만 해결하려고 한다. 필수의료 분야의 의료분쟁 위험이 높다며 책임보험‧공제 가입을 의무화하고 필수진료과에 보험료를 지원하겠다는 계획은 민간보험시장의 확대 정책이기도 하다. 가장 시장화된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은 가장 많은 의료 소송이 발생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런 경향들은 불필요한 검사와 치료 증가, 특정 환자·집단에 대한 진료 회피 등 방어진료 관행을 증가시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이 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계획처럼 최소한의 장치인 의무 복무 기간 규정마저 없다면 도대체 뭘 근거로 문제 해결을 낙관할 수 있겠는가. 거듭 강조하지만 의사를 얼마나 늘리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공공성 강화에 복무할 수 있는 의사 인력을 어떻게 양성, 배치, 활용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시장화된 의료체계가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면 반시장적 방식으로, 즉 강력한 공적 통제 기전을 전제로 의사 증원이 이뤄져야 한다. 공공의대, 지역의사면허제, 그리고 공공보건의료기관의 확충과 기능 강화 등 여러 대안이 이미 제시되어 있다. 체계의 공공성 강화 관점에서 이러한 대안들을 조합하는 과제가 남았다. 우리는 보건의료체계의 위기 극복은 체계의 시장화를 억제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시장의 논리와 방식을 벗어나는 의사 증원과 보건의료개혁만이 우리 모두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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