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의 주인공은 재즈 색소폰 연주자 강태환이다. 초대 수상자 이정선을 시작으로 그동안 공로상 수상자가 김민기, 들국화, 산울림, 신중현, 정태춘, 조동진, 조용필, 한 대수 등이었던 걸 생각하면 낯선 이름일 수 있다. 그럼에도 강태환은 공로상을 받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다. 강태환이란 이름을 생각하면 경외감이 먼저 든다. 재즈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의 이름은 한국 프리 재즈와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며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위상이 높다. 무엇보다 수십 년이란 시간 동안 타협하지 않고 가부좌를 튼 채 프리 재즈란 낯선 영역에 천착해 온 강태환이란 이름 앞에선 경이로움과 경외감이 교차한다. 이처럼 강태환의 위대함을 알고 있지만, 나는 시상식 회의에서 다른 이의 이름을 공로상으로 추천하고 그에 관한 지지 발언을 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연주자이자 작·편곡가였던 이호준이다. 어쩌면 강태환과 이호준은 '상업'의 기준에서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일 것이다. 강태환은 가장 비상업적이고 비대중적인 프리 재즈 한길만을 걸어온 음악인이고, 이호준은 철저하게 '히트'를 위한 음악을 해왔다. 이호준에게 많은 걸 배운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증언에 따르면 그 역시 허비 핸콕 등의 재즈를 기막히게 구사할 줄 알았지만, 팔리는 음악을 위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둘을 이야기하는 건 비교를 위함이 아니라, 이제 이호준 같은 음악인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공로상을 한 번은 수상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생각에서다. '이호준 같은 음악인'이란 곧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다듬고 새롭게 옷을 입히고 그에 어울리는 연주를 한 음악인들을 뜻한다. 공로상이란 건 그동안의 업적을 기리는 평생공로상이기 때문에 강태환을 비롯한 수많은 명인은 올해가 아니더라도 결국 순차적으로 받을 것이고, 이쯤에서 그동안 우리가 외면해 온 '이호준 같은 음악인'에게도 공로상을 주자는 의미였다. 앞서 그동안 공로상을 받은 대표적인 음악인의 이름을 나열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직접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음악에서 '창작'을 이기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천의무봉의 기교도 잘 만든 곡 하나 앞에선 약해질 수밖에 없다. 누구보다도 창작을 높이 치는 내가 이호준에게 공로상을 추천했던 건 그럼에도 음악이란 것이 결국 창작만으로 완성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무 해가 넘는 동안 창작자 중심으로 상을 주어왔다면 그다음 한 번쯤은 편곡가나 연주자 같은 음악인에게 상을 줘도 되지 않느냐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이호준은 김명곤과 함께 1980년대를 양분해 온 편곡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그는 좋은 작곡가이기도 했다. 조용필의 '친구여',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를 비롯해 김종찬의 '토요일은 밤이 좋아', 나미의 '인디언 인형처럼', 박미경의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등을 만들었다. 당연히 이 노래들을 편곡했고 연주했다. 이런 ‘작곡’이 있음에도 이호준에겐 편곡가, 건반 연주자라는 이미지가 더 잘 어울린다. 조용필의 '친구여'를 만든 작곡가보다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밴드 마스터라는 이미지가 그에겐 더 짙다. 불후의 명곡 '인디언 인형처럼'은 곡조보다 굉장한 그루브와 사운드가 먼저 귀에 들어온다. 당연히 이는 이호준의 몫이었다. 이 모든 작업은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잘 나가던 연주자들은 거의 반년 치 일정이 미리 짜여 있었다고 한다. 이호준이나 김명곤, 송홍섭 등 대표적인 편곡가들은 마음이 맞는 연주자들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창작된 곡들을 꾸몄다. 이를 찾아 듣는 재미가 있다. 가령 1980년대 후반 송홍섭이 편곡을 맡은 작품에는 어김없이 박청귀(아라이), 이병우 등이 기타 연주를 했다. 키보드는 주로 황수권이, 드럼은 김희현이나 배수연이 연주했다. 1988년 발표한 김현식 4집 수록곡 '여름밤의 꿈'은 윤상의 데뷔곡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송홍섭 사단의 연주 덕분에 곡은 '여름밤의 꿈'이란 제목이 품고 있는 낭만적이면서 아련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호준은 일종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만들어진 곡을 두고 스튜디오에서 함께 의견을 나누며 연주하던 이들의 상징적인 인물로 이호준을 공로상 후보로 추천한 것이다. 개인적인 취향을 말하자면 난 이호준보단 김명곤의 작품을 더 좋아한다. 김명곤이 작업한, 나미의 '빙글빙글'부터 이문세의 명작들로 이어지는 80/90 시대 일련의 작품은 감탄스럽다. 김명곤 대신 이호준을 추천한 건 김명곤이 속해있던 밴드 사랑과 평화가 이미 공로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명곤, 이호준이 아니라 변성룡이나 송홍섭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저 위대한 창작자들의 옆에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었다는 걸, 또 그들의 존재감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걸 환기하고 싶은 바람이었다. 1990년대에는 조동익이 우뚝 서 있다. 그의 곁에는 함춘호(기타), 손진태(기타), 박용준(건반), 김현철(건반), 김영석(드럼) 등의 연주자가 있었다. 조동익에게 편곡과 프로듀서 역할을 맡겼던 안치환은 조동익의 작업을 두고 '스피리추얼'이란 표현을 썼다. 온전히 자신의 노래는 직접 다 만들었던 안치환이지만 조동익의 '영적'인 편곡 작업이 없었다면 앨범의 완성도는 덜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런 작사·작곡 이외의 작업을 너무나 등한시해 왔다. 앞서 했던 말을 다시 가져오자면 그 어떤 천의무봉의 기교도 잘 만든 곡 하나 앞에선 약해질 수밖에 없다. 대신 그 기교가 잘 만든 곡을 더 빛나게 해줄 수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스스로 발광체는 될 수 없지만 빛을 더 밝게 내주는 보조의 역할을 지금보다는 더 조명해 주자는 것이다. 시대가 변했고 음악을 만드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훌륭한 연주자와 편곡가는 많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에 대한 조명이 밝았던 적은 없다. 과거엔 앨범 크레디트에 이름 한 줄 올리기가 어려웠고, 그마저도 틀리게 표기되는 일이 잦았다. 그런 시대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역할보다는 더 뒤에 있고 가려져 있다. 나는 조용필의 최고 명곡으로 '자존심'을 꼽는다. 이른바 한국적인 록 음악의 절정이라 생각한다. 이 노래에 김택환의 베이스를 비롯한 위대한 탄생의 연주가 없었다면 그 맛은 훨씬 반감됐을 것이다.
이 원고지 18매 정도 분량의 글은 3분 30초짜리 노래 '자존심' 하나로 증명할 수 있다. 이런 연주가 없이 한국 대중음악이 발전할 수 있었을까. 조용필에게는 김택환과 송홍섭이 있었고, 이문세에게는 김명곤이 있었다. 김광석에게는 조동익이 있었고, 이승철에게는 박창곤이 있다. 37년 만에 가요계에 돌아온 정미조에게는 손성제가 있었다. 이들의 이름과 역할이 한 번씩 더 이야기될 때 한국 대중음악은 훨씬 더 풍성해질 것이다. 나는 내년 한국대중음악상 회의에서 한 번 더 이호준 혹은 다른 '이호준 같은 음악인'을 추천하고 지지 발언을 할 것이다.
2000년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 기자로 음악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네이버 <온스테이지> 기획위원, 한겨레신문 대중음악 전문 객원기자로 일했고,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위원과 멜론 <트랙제로> 전문위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여러 온라인·오프라인 매체에서 정기·비정기적으로 글 쓰고 말하고 있습니다. <케이팝 세계를 홀리다>를 썼고, <한국 팝의 고고학 1990>, <멜로우 시티 멜로우 팝>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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