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내는 곳으로부터 걸어서 10분 거리에 여의도 더현대서울 백화점이 있다. 주말 아침 공원 산책을 하다 들러보곤 한다. 쇼핑 목적이 아니라 매주 다양한 브랜드가 전개하는 팝업스토어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연 매출 1조 원을 달성한 더현대서울은 개점 후 적극적인 팝업스토어 유치를 통해 1년 6개월 동안 3508개 브랜드로부터 10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이른 아침부터 더현대서울과 연결되는 여의도역 지하보도는 제한된 기간 내 판매하는 한정 상품과 고유의 서비스를 체험하기 위한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지난 2월 더현대서울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팝업스토어의 주인은 케이팝 아이돌 그룹이었다. 쿠션, 포토카드, 의류, 엽서 등 다양한 머천다이즈 상품과 스페셜 티켓, 그룹 멤버들과 함께 사진을 남길 수 있는 스튜디오 등 다양한 체험 공간이 만들어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행사의 주인공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활동하는 버추얼 아이돌 그룹이었다는 점이다. 2월 16일부터 2월 29일까지 2월의 절반 동안 지하 1층 행사장을 붐비게 했던 그룹은 '이세돌팝업봤?'을 개최한 6인조 걸그룹 이세계아이돌이었다. 사전 예약으로만 입장할 수 있었던 전시는 2월 8일 1차 예매 오픈과 동시에 매진을 시작으로 큰 화제를 이어갔다. 곧바로 바통을 넘겨받은 팀은 5인조 보이그룹 플레이브다. 플레이브는 3월 1일부터 3월 17일까지 5층 220평 규모의 신규 전시 공간 '에픽 서울'에서 데뷔 1주년 기념 팝업스토어 웨이 포 러브(Way 4 Love)를 열고 있다. 동시에 2월 21일 첫 싱글 '밀키 웨이(Milky Way)'를 발표한 신생 버추얼 그룹 스텔라이브 역시 데뷔 다음날인 22일부터 3월 6일까지 팝업스토어를 운영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더현대서울은 백화점 최초로 버추얼 아이돌 콘서트를 송출하고 있다. 2월 23일부터 3월 8일까지 총 6회에 거쳐 대형 전광판을 통해 이세계아이돌, 스텔라이브, 플레이브의 공연을 진행한다. 이세계아이돌은 2월 25일 콘서트를 공식 현장 생중계했다.
버추얼 아이돌 시장에 관심이 없다면 이런 일련의 행사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북적이는 백화점을 거닐다 보면 행사를 바라보는 대중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들을 아이돌 그룹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애니메이션 혹은 게임 캐릭터로 바라보는 목소리가 많이 들린다. 그러나 오늘날 버추얼 아이돌의 위상을 생각하면 서울 최대 백화점에서 열리는 행사조차 인기의 편린처럼 느껴진다. 2021년 인기 스트리머 우왁굳이 자신의 팬카페 왁물원에서의 공개 오디션을 통해 결성한 이세계아이돌은 한국 최초의 버추얼 걸그룹이다. 지난해 발표한 노래 '키딩'이 스트리밍 플랫폼 멜론 핫 100 차트 1위, 유튜브 뮤직 한국 인기곡 차트 3위에 오르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여섯 멤버들이 개별적으로 운영하는 버추얼 유튜브 채널은 각 10만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하며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버추얼 유튜버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인기에 힘입어 이세계아이돌은 지난해 9월 23일 인천 송도달빛축제공원에서 국내 최초의 메타버스 연계 오프라인 뮤직 페스티벌 '이세계페스티벌'을 성공리에 마쳤다. 걸그룹 시장에 이세계아이돌이 있다면 플레이브는 버추얼 보이그룹의 본격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 그룹이다. 2023년 3월 12일 데뷔한 5인조 보이그룹인 이들은 지난 2월 26일 발표한 두 번째 미니 앨범 <아스테룸 : 134-1>로 50만 장 이상 판매고와 멜론 누적 앨범 스트리밍 100만 회 기록을 올렸다. 플레이브는 오는 4월 13일과 14일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의 첫 단독 팬 콘서트를 앞두고 있다. 세기말 세계적으로 등장했던 사이버 가수의 존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이와 같은 버추얼 아이돌의 존재가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이버 가수 아담의 경우 실제 가수 박성철의 목소리에 3D 캐릭터를 활용한 사례로 오늘날 버추얼 유튜버의 개념과 동일하며, 대형 기획사가 아닌 중소 기획사에 의해 운영된다는 점도 같다. 이세계아이돌은 우왁굳의 왁 엔터테인먼트와 패러블엔터테인먼트가, 플레이브는 버추얼 전문 엔터테인먼트 기업 블라스트가 운영하고 있다. 2000년대 유행이 끝나고 사이버 가수의 개념은 일본에서 목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음성 합성 엔진 보컬로이드와 이를 개발하여 캐릭터 산업으로 확장한 크립톤 퓨처 미디어, 그리고 기계를 이용한 창작곡을 직접 노래하여 온라인 공간에 업로드하는 아마추어 가수 우타이테(歌い手)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런 문화의 흐름이 2010년대 가상의 캐릭터를 주인으로 삼아 유튜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버추얼 유튜버의 등장과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의 증폭과 연결되어 버추얼 유튜브 가수의 등장을 낳았다. 솔로 가수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타이테 출신 일본 가수들과 달리 한국은 케이팝의 유행으로 아이돌 그룹 문화에 익숙하기에 이세계아이돌, 플레이브 등 단체 활동이 나타난다. 2010년대 말부터 팬데믹 시기까지 쏟아진 긍정적 전망과 달리 1인 크리에이터 버추얼 유튜버의 성공 가능성은 크지 않다. 우선 2D 혹은 3D 캐릭터 제작 과정에서 작화를 담당하는 일러스트레이터와 캐릭터가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리깅 작업에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달로 입문 비용이 많이 낮아졌다지만, 기존 시장에 존재하는 캐릭터와 겹치지 않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이버 캐릭터, 버추얼 유튜버가 서브컬처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만큼 한국에서는 대중의 시선도 호의적이지 않다. 방송인 활동을 위해 노래, 춤, 토크, 게임 등 1인 방송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재능도 필수적이다. 이세계아이돌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당시 우왁굳이 예측한 콘텐츠 성공 확률은 0.2%였다. 이세계아이돌이 버추얼 유튜버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오늘날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버추얼 유튜버와 가상 아이돌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이유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등장한다. 여러 사건 사고와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확실성, 기술의 발달로 정교해진 완성도가 자주 활용되는 근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핵심을 놓치고 있다. 팬들은 영속하는 캐릭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 너머의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 일본 가수 아도(ado)의 지난 2월 24일 내한 공연을 다녀왔을 정도로 열렬한 팬이지만 그의 얼굴이나 나이, 본명에는 관심이 없다. 아도의 음악과 음악을 대하는 태도를 지지할 뿐이다. 가상 가수들이 소셜 미디어 채널을 통해 활발히 소통하는 과정에서 이야기하는 진심과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 다양한 콘텐츠로 실력을 증명해 보이는 과정에서의 뿌듯함이 팬덤을 형성한다. 이세계아이돌의 경우 오디션 합격 통보를 받는 여섯 멤버들이 감격하는 모습, 이후 왁물원 커뮤니티를 통해 수많은 실력자들이 이세계아이돌의 콘텐츠를 자체 제작하고 이를 공유하며 함께 성공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감동을 자아낸다. 플레이브는 버추얼 아이돌의 한계로 좋은 곡과 음악을 받지 못하자 직접 작사, 작곡, 프로듀싱에 참여하고 안무를 제작하며 반강제적으로 '자체 제작' 아이돌이 된다. 어느 순간 캐릭터와 현실 세계 인간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콘텐츠에 오롯이 집중하는 순간이 온다. 그 경험을 가수와 팬이 함께 나누는 행복이 버추얼 아이돌을 응원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버추얼 아이돌의 성공은 오늘날 대형 기획사가 주도하는 케이팝이 상실한 가치를 일깨운다. 엘리트 연습생 육성 제도를 거쳐 데뷔하는 아이돌 그룹은 데뷔와 동시에 상당한 자본 투자를 받으며 팬덤을 형성한다. 기획사 수장의 야심 혹은 기업 단위 콘텐츠 다변화를 위한 세계관과 콘셉트를 갖춘 이들은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며 한국을 넘어 세계를 호령하는 팝스타의 꿈을 향해 전진한다. 그 과정에서 행동 하나하나가 상품으로 개발되어 팬덤의 소비를 촉진하고, 팬덤은 이를 다시 자체 제작 콘텐츠로 쪼개 브랜드를 전파한다. 전 세계에서 엄선한 프로듀서와 작곡가들이 제작한 데모곡 가운데 기획에 맞는 곡을 골라 현지화 과정을 거쳐 앨범을 제작하고, 무작위의 머천다이즈와 사인회 등 행사를 미끼로 달아 중복 구매를 강제한다. 팬덤의 위상이 커지는 가운데 올해는 다양한 형태로 아티스트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슈퍼팬' 개념이 등장했다. 소소한 범위에서는 앨범 다량 구매부터 기획사 주주까지 팬덤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아이돌 산업을 지탱한다. 공고한 산업 구조에 인간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런 공고한 산업 구조 탓에 우리는 케이팝에서 음악의 즐거움 대신 재무지표와 주가, 해외에서의 성과 등 숫자만을 바라보게 된다.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 퇴진 후 '광야'로 대표되는 SM 컬처 유니버스를 상실하고 표류하며 케이팝 세계관 유행에 의문을 품게 만든 에스파, 그리고 멤버 카리나가 배우 이재욱과의 열애로 팬덤의 질타를 받고 내용 없는 사과문을 작성하여 공개하는 풍경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케이팝의 현실을 투영하는 예시다. 케이팝은 모순으로부터 함께 가능성을 만들어 나가고자 한 이들의 노력으로 성장했다. 많은 이들이 진정성이라 부르는 가치다. 팬덤 형성에 있어 진정성이 가장 중요한 의무라면, 현재 이세계아이돌과 플레이브만큼 성실한 아이돌 그룹은 많지 않다. 기술 발전을 활용한 가상의 세계는 고정관념과 루머 대신 반짝이는 창의력으로 가득하고, 일상을 함께 나누며 더 큰 무대를 함께 꿈꾸는 가수와 팬들이 삭막한 일상에서 벗어나 행복한 공동의 꿈을 꾸는 자유지대다. 가상 세계 카엘룸과 중간 세계 아스테룸을 오가며 활동 중인 플레이브는 신곡 '버추얼 아이돌'에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주 뵙고 싶습니다. 예쁘게 봐주세요'라고 노래한다. 가상의 신세계로부터 현실의 진리를 발견한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email protected])는 2013년 음악 웹진 IZM 에디터로 활동을 시작했고 2019년부터 2021년까지 편집장을 역임했다. 음악 플랫폼 제너레이트(ZENERATE)를 운영 중이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FIGK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국방일보, 위버스 매거진, 롤링 스톤 코리아, 빌보드 코리아 등 매체에 칼럼을 기고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