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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금 달라하니 실수한거 다 청구한다고 협박한 '못난'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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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퇴직금 달라하니 실수한거 다 청구한다고 협박한 '못난' 사장 [전수경의 MZ 여성 그리고 빈곤] 폭력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디
성화고 3학년 2학기, 디는 선생님이 가라고 정해준 작은 무역회사에 사무직으로 들어가 실습을 시작했다. 사무 보조라고 해도 외국어도 잘 모르고 무역에 대한 기초 지식도 배운 적이 없는데, '저희 학생 면접 봐서 괜찮으면 일하게 해 달라'고 선생님이 먼저 회사에 전화한 것을 알고 있었다. 디는 선생님께 못할 것 같다고 말하지 못했다. 첫 출근하던 날부터 눈물이 났다. 이를 악물었지만 실수를 많이 했다. 일처리가 서툴 때면 혼잣말인지 사장 입에서 '씨발' 소리가 들려왔다. '일을 못 하니 혼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사장과 팀장, 디까지 겨우 세 명이 있는 사무실은 모욕과 모독의 말이 난무했다. '너 인생 어떻게 살려고 그래?' '너 나중에 길바닥에 앉아서 살래?' 말은 때로는 상처로 때로는 남성 어른들의 위협으로 디의 가슴에 박혔다. 자신의 존재가 형편없고 보잘 것 없다고 손가락질하는 그 공간에 그러나, 디는 특성화고를 졸업하고도 1년 이상을 다녔다. 디는 아픈 어머니와 둘이 살았기에 중학생 때부터 스스로 용돈을 벌었다. 고3 실습 이전에 빵 가게에서 4년을 일해 봤다. 중학교 때 시작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한 알바가 4년을 채우니, 나름의 인생철학이 생겼다. 사는 건 '버틸 때까지 버텨야' 하는 일이다. 사무실 출근 1년 반이 지날 때 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끝에 와 있었다. 회사 앞 출입문에 서서,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어야 하는데 움직여지지 않았다. 더는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손도 몸도 그대로 굳어 한 발을 딛을 수가 없었다. 디가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사장은 처음에는 놀라서 만류했다. 자신의 인건비가 싸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장은 디가 마음을 굳힌 것을 알고는 한마디를 던졌다.

'잘해줘 봤자 소용없다니까'

몸이 덜덜 떨릴 만큼 그날, 사무실에서 견디는 시간이 무서웠다고 디가 말했다. 그래도 디는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이 있었다.

'4대 보험이랑 퇴직금은 어떻게 되나요?'

'너 4대 보험 받고 싶어? 퇴직금 받고 싶어?'

사장이 소리 질렀다.

'줄게, 주는데 니가 실수한 거 하나 하나 계산해서 청구할 거야'

놀란 디가 울었다.

'죄송합니다.' '안 받겠습니다.'

'그렇게 끝났어요.' 팀장과 사장은 자신들이 좋은 대학을 나왔고, 잘 나가던 때가 있었다고 자랑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디의 표현처럼 '어린 애한테 퇴직금 안 주려고 협박을 한' 못난 사람들일 뿐이었다.
ⓒ연합뉴스
출퇴근하던 서울 강남 방향 지하철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힘들었다. 닫힌 공간에서 사람과 함께 하는 일도 못할 것 같았다. 인터넷 구인 사이트를 보면서 일을 찾았다. 의류시장으로 갔다. 새벽에 출근해 아침까지 소매 의류상들에게 옷을 파는 도매매장이었다. 사장은 매장 두 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럭저럭 유지하는 괜찮은 곳이었다. 코로나19가 오면서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야 너 여기 매장 없어지는 거 알아?'

매장의 옷을 온라인 쇼핑몰로, 시내 매장으로 뿌려주는 '삼촌'이라 불리는 직원이 디를 보며 말했다. 일 한지 2년이 되어가는 디에게 사장은 매장을 닫을 계획이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사장에게 물어보니 매장을 닫기로 한 결정은 디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로 매장이 없어지는 날까지 일을 하도록 둘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매장을 닫을 예정이라는 답을 들었을 때, 지금 돌아보면 돈을 더 챙겨달라고 하고 일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싶다. 그 때 디는 온통 '왜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된 행동을 하는지', 그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만두는 것 외에는 길이 안 보였다. 그러나 디는 도매시장을 떠나지는 않았다. 일을 더 배우고 싶었다. 다시 인터넷 구인사이트를 찾았다. 옷을 만드는 원단 가운데 고급 니트 원단을 취급하는 매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면접을 하던 날 '열심히 하겠습니다!' 또박또박 말해서인지 뽑혔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만만하지 않았다. 원단을 옮기고 적재하고 판매하고 배달하는 일이었다. 의류는 전문용어도 많고, 원단의 패턴, 종류, 부자재, 무게 단위까지 배울 것이 많았다. 수출 때문인지 국제 품질기준이 있어서인지 영어로 된 용어들도 자주 들려왔다. 디에게 업무지시를 하는 차장은 디가 전문용어를 바로 못 알아들으면 답답해했다.

'멍청한 거 아니야?' '아오 씨 어떻게 하면 좋아'

차장이 주먹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던 날, 스무 살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신호등 앞에서 가방이 터져 원단이 와르르 쏟아진 날이 있었다. 디의 정신도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넌 거기까지야, 넌 그것 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이 말을 차장에게 또 들었다. 힘들었고 우울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먹고 살자고 일하는 건데 병이 생기니까' 먹고, 살아야 하니 일을 그만 둘 순 없다. 상담할 곳을 찾아보니 상담료가 비쌌다. 1회에 적어도 6~7만 원이었다. '나라에서 하는 상담'을 찾아냈다. 심리상담을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 해 봤다. 잘 하고 싶었다. 부족한 걸 채우고 싶었다. 영어 과외도 받았다. 퇴근 시간을 늦췄다. 언제나 남아서 정리를 했다. 지저분하다는 말을 듣기 전에 치우고 싶어서 늘 먼저 움직였다. 매장에 진열하기 어려울 만큼 물건 양이 많기 때문에 수시로 창고로 원단을 옮겨야 한다. 둥글게 말려있는 원단 하나가 8Kg, '야 그거 안 힘들어' 이렇게 말하는 차장 앞에서 디는 한 번에 너덧 개씩 원단을 들었다. 어깨와 팔의 혈관이 터지고 부어오르는 느낌이 났다. 20Kg짜리 상자를 옮기려고 몸을 숙인 어느 날. 허리가 툭, 통증이 왔다. 아파서 눈물이 났다. 원래 디는 무적이었다. '보험, 안 들었어요. 응급실, 가본 적 없습니다. 링겔, 맞아본 적 없습니다. 아파도 한 숨 자고 나면 괜찮았어요.' 허리가 나가고 나서야 병원에 갔다. 일하면서 아파서 병원에 간 건 처음이었다. 노동의 강도를 높이니 착실하다, 일 잘한다는 칭찬도 돌아왔다. 회사를 그만두게 된 건 날마다 옮겨야 하는 20Kg 상자를 둘러싼 소동이 있고 나서였다. 상자들이 들어올 때마다 사장은 이 쪽으로 저 쪽으로 지시가 달라졌는데 확인에 확인을 해도 사장은 말이 바뀌고 늘 디가 욕을 먹었다. 디 자신도 모르게 한계의 날이 왔다. '사장님이 하라는 대로 한 거예요!' 늘 디를 비난하던 사장에게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사장의 답은 허무했다.

'오케이, 미안.'

"누가 노동자를 책임져요? 계약서부터 갑과 을로 나뉘는데." 다친 허리는 치료비를 받았는지 묻는데 디의 목소리가 커졌다. '대기업이나 책임져 주지...‘ 다시 작게 중얼거리던 디가 덧붙였다. 자신이 찾아낸 '나라에서 하는 심리 상담'도 사장이 '언제까지 다닐 거냐?' '다 나은 것 같다', 눈치를 주는 바람에 끝까지 받지 못했다고 한다. 상담 선생님이 10번을 다 채우는 게 중요하다고 했는데 못 채웠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사람이 싫어진다고 말한 디에게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해준 이가 있다고 한다. 공감받고 이해받는다고 느꼈다고 한다. '내가 힘들어도 되는구나' 마음이 놓였다고 하니, 도무지 따뜻한 기억이라고는 없는 것 같던 디가 한 말 가운데 내가 들은, 유일한 따뜻한 말이었다. 그 따뜻한 이가 상담 선생님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디는 그동안 자신을 잡아당겼던 어두운 손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인생 그렇게 살래?' 모욕을 받을 때마다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 느낌, '아 인생 헛살았구나' 스스로가 무가치한 사람처럼 여겨지던 감정을 갖게 된 것, 그것이 '가스라이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디가 깨달은 듯 덧붙였다.

'내 인생 신경 써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자살할 것도 아닌데 내가 열심히 해야죠' '일을 못하면 혼나는 게 당연하다'

아마도 디가 제일 많이 사용한 문장이다. 디는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을까. 도무지 직업 교육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실습을 보낸 교사, 4대보험이라는 말에 흥분해 실수한 거 다 까자고 윽박지른 사장. 디의 말대로 '사회를 몰랐다'는 것이 디의 잘못이었을 수도 있다. 디가 말한 '사회'는 약한 존재 앞에서만 강해지는 폭력의 사회다. 의류도매시장에서 밤에 일할 때 디는 피부미용자격증 공부도 해 두었다. '돈이라는 걸 벌고 있으니까 마음가짐이 부족했는지 몇 번 떨어졌어요.' 일을 그만두고 한 번에 붙었다.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의 지원금 100만 원이 들어왔을 때 디는 화실을 알아봤다고 한다. 섬세한 걸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강습비가 한 달 15만 원이라며 걱정했는데, 디는 화실에 다닐 수 있었을까. 어떤 이는 이 지독한 고생담을 아주 예외적인 이야기라고 밀어낼지도 모른다. 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폭력의 풍경을 다룬 한국 영화들이 왜 그렇게 많은가를 생각했다. 폭력 그 자체가 주인공인 양, 밑도 끝도 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영화, 그 속에서 인물들은 무기력하다. 영화 속 인물과 디가 다른 점은 디가 폭력에 맞서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도모했다는 점이다. 그 무서운 사장 앞에서도 디는 ‘4대보험과 퇴직금’을 요구했고, 모욕을 넘어서 그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자 영어 공부를 하고 더 많은 무게의 원단을 날랐다. 디에게 없었던 것은 그가 얼마나 용기있는 사람이고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인지 알아봐 주는 누군가였다.

* 이 연재는 2023년 '노동건강연대'와 '아름다운재단'이 함께 한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에서 만난 여성들, 노동건강연대가 활동하면서 만난 여성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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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간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노고에 언제나 감탄하고 감사하고 존경한다. 할 수 있는 건 말, 쓸 수 있는 건 글, 고마운 마음을 글로 전하고 싶다. 달리기는 못 해도 걷는 건 조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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