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가 제시한 분량만큼 읽었는지 확인하지 않았지만 살면서 제법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산 사람의 글은 되도록 읽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독서지도를 하면서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꾸준히 읽은 지 10년가량 되었습니다. 인류 정신문명의 최고 정수라고 할 만한 심오한 성찰과 촌철살인의 지혜를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었습니다. 책 속에 보석으로 박힌 많은 문장 가운데 하나씩을 캐내어 독자와 나누려고 합니다. 노벨문학상의 문장이 환기하는 삶의 각성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필자 주)
"흥미진진한 삶의 현상들은 언제나 이처럼 과거와 미래의 이중 시각을 갖고 있어서,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동시에 과거를 불러내는 경향이 있지."-<파우스트 박사>(토마스 만, 박병덕 옮김, 민음사)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에 출간된 <파우스트 박사>는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에서 짐작하듯 음악을 매개로 가장 예민하고 불행한 시기의 독일 정신을 조명한다. 주인공은, '한 친구'라는 소설의 화자가 말하는 음악가 아드리안이다. 소설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와 그 이전의 파우스트 전승을 현대적으로 계승했다. 매독에 걸려 인생 후반부에 미쳐버린 것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니체가 소설 주인공 아드리안의 모델이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쇤베르크의 음악이론이 아드리안의 생각으로 차용돼 펼쳐지고 여기에 작가의 깊은 인문적 성찰이 버무려져 있어서, 그의 다른 소설 <마의 산>만큼이나 읽기에 어려운 책이다. 인용문은, 아드리안이 '친구'와 대화 중에 한 말로 삶의 현상을 시제와 관련하여 흥미롭게 꿰뚫었다. 삶의 현상은 언제나 현재 시제이다. 이때 현상이란 말을 엄격하게 정의하려고 들면 논의를 더 끌고 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다. 철학사의 중요한 개념인 '현상'은 주요 철학자들이 각자 다르게 의미를 부여하며 사용하였기에 그 모든 의미를 동시에 담아낼 수 없다. 삶에서 개인이 포착하게 되는, 또는 휘말리게 되는 사건의 장면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장면 혹은 현상이 뜻이나 어원상, 보는 것과 관련하기에 그것의 시제가 현재라는 진술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시각은 현재이기 마련이다. 문제는 현재라는 시제가 신기루 같다는 점이다. 현재는 현재라고 선언하는 순간, 또는 인식하는 순간 과거로 달아나 있다. 따라서 현재는 자체로 존립하기 힘들고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진동하는 접면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영원한 현재라고 할 죽음 외에는 어떤 실체적 현재도 없으며 인간이 살아가며 현재라고 믿는 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틈 같은 것에 불과하다. 현재의 고통은 그 틈에 끼어 압착되며 발생한다. 인간(人間)이란 말을 받아들일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 말고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졌다는 사실을 동시에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우리 우주에서 빅뱅 이후의 138억 년이 대체로 그저 직진했을 터이다. 예외적으로 어떤 시간은 비선형이며, 모천회귀하는 연어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방향을 거스를 수 있다. 우선 과거에서 다시 과거로 가는 흐름. 현재라는 접면을 돌파하지 못하고 무한회귀하는 그런 시간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미래에서 과거로 역행은, 꼭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종류의 시간 흐름이 아니다. 역사에서 확인되듯 현실에서 가끔 목격되곤 했다. 과거와 미래의 틈새가 너무 넓어서 그사이를 뛰어넘지 못하고 틈새의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사태도 떠올릴 수 있다. 바닥이 너무 깊어 못 올라오면 그는 영원한 죽음 대신 현재의 죽음을 사는 셈이다. 사실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특성이 없다면 흥미진진한 삶의 현상이란 게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과 역사가 때로 굴곡을 겪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쨌든 발전한다는 관점에서 "흥미진진"을 말해야겠다. 이 전진은 느리더라도 확고한 자각 아래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거리감과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뚜렷한 비약이 일어났을 때 성취된다. 미래에 관한 확신 혹은 전진의 자각 없이 습관적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한 걸음씩 옮아가는 '현재의 인간'에게 인용문과 같은 두 시제의 이중적인 시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현재의 죽음을 사는 건 아니지 않냐고 '현재의 인간'이 반박한다면 그런 삶은 유예된 죽음을 반추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위에 남은 짓이겨진 풀을 되새김질하는 꼴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미래로 한 걸음 내디디면 과거로부터 한 걸음 떠나오게 되는 일상의 삶은 언제나 진행형이어서 특별히 미래와 과거에 관한 지각없이, 또 시제의 균탁(龜坼) 없이 분주한 현재에 통합되기 마련이다. 한데 현재는 살펴보았듯 본질상 부재하기에 그 삶은 부재에 통합된다. 미래로 느닷없이 비약하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때에야 삶의 뒤편으로 확 달라진 풍경을 인식하곤 떠나온 과거를 환기한다. 그러한 특별한 비약과 갑작스러운 환기야말로 흥미진진한 삶의 현상의 이면이다. 미래를 향한 전진은 문맥상 긍정적이다. 그렇다면 불러낸 과거는 어두운 내용일 것이다. 때로 미래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어쩌다 운 좋게 또는 갖은 노력을 기울여 빛나는 미래를 거머쥐는 순간, 우리가 종종 망쳐버린 현재가 과거로 축적돼 숨겨져 있다가 빚쟁이처럼 불쑥 등장하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 빚쟁이가 나타나는 게 정상이긴 하다만, 그래도 빚쟁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성공 여부과 무관하게 미래는 대비할 수 있지만, 과거를 대비하지 못한다는 게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1929년 노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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