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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추종자들은 왜 김구 깎아내리기에 몰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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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추종자들은 왜 김구 깎아내리기에 몰두하나

[독점과 쏠림이냐, 포용과 분권이냐] '김구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이승만 추종자들

친일파의 시대에도 역사전쟁은 벌어졌고, 친일파의 자식 세대가 사회에서 힘을 쓸 때도 역사전쟁은 계속되었다. 친일파의 손주 세대에서도 여전히 역사전쟁은 계속되지만, 점입가경이라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 관련 주요기관장 추천을 혹시 일본으로부터 받고 있는 것 아니냐, 용산에 일본 밀정이 잠입해있는 것 아니냐 등이 단지 농담이나 비아냥이 아니라 합리적 의심의 수준에서 제기되는 것이 우리의 참담한 현실이다.

친일파 손자·손녀들의 '이승만 영웅 만들기'

세대의 변화에 따라 역사전쟁의 결도 달라졌다. 친일파들이 득세했던 시기에는 친일파들도 친일반민족행위가 나쁜 짓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다만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잡아다 두들겨 패고 빨갱이로 만드는 등 친일행적 '감추기'에 골몰했을 뿐이다. 친일파의 자식들은 "먹고사느라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친일 안 한 사람이 얼마나 되냐", "지금의 잣대로 어려운 시절을 재단하지 말라"는 등 온 힘을 다해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친일파의 손자·손녀 세대는 내놓고 친일한 것을 '자랑질'하고 있다. 친일파를 청산한 북한은 쫄딱 망했는데, 친일파들이 '건국'의 주역이 된 대한민국은 이렇게 잘 먹고 잘 살지 않느냐, 이게 다 자기 할배들이 친일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친일파들을 보듬어 준 이승만을 최고의 역사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올해만 해도 우파들이 <건국전쟁>이라는 다큐를 만들어 이승만 띄우기에 나섰고, 100만 관객을 끌어모아 이승만 다시보기 붐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런데 <건국전쟁>은 문제가 심각하다. 있는 사실을 뻥튀기해서 미화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없는 사실을 있다고 우기거나, 이승만의 생애에서 도저히 빼놓을 수 없는 일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는 것은 현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더구나 이승만을 예찬하는 <조선일보>에서조차 꼭 저렇게 해야 했나 지적할 정도로 김구 깎아내리기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든다. <건국전쟁>에서 백범을 음해한 자는 광복절에 맞춰 <테러리스트 김구>라는 책까지 펴낸다고 한다. 왜 이승만 추종자들은 김구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일까? 그것은 아무리 이승만에게 형광등 300개를 비춰도 김구의 짙은 그림자가 이승만의 얼굴을 가리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놓고 평가가 갈리지만, 이승만은 분명 주요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헌법을 준수하지 않고, 대통령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고, 임시정부로 귀속되어야 할 국고 수입(독립운동 후원금)을 개인 용도로 쓰고, 절대 독립을 추구하는 임시정부의 기본 입장과 달리 국제연맹이나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를 주장하다가 탄핵 당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은 단순히 외교를 중시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입장에 기초한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신채호는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없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승만이 더 나쁜 놈이라고 극언하기까지 했다. 이승만은 안창호를 공산주의자라고 모함하여 미국에서 안창호가 체포되도록 했고, 박용만이 일제의 밀정이란 소문을 퍼뜨렸다. 무장독립운동 주창자의 한 사람이었던 박용만은 일제의 밀정이란 오인을 받아 동료 독립운동가들에게 살해당했다.

이승만은 1941년 미국에서 간행한 <일본내막기>에서 일본의 미국에 대한 공격을 예언하여 주목을 끌었다. 여기에 일부 선교사들의 이승만을 조선의 '쑨원(孫文)'이라는 과장 선전까지 더해져 OSS(CIA의 전신)는 이승만을 통해 한인들을 대일전쟁에 불러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었고, 국내에서 일부 인사들이 이 방송을 들었다가 일제 당국에 의해 체포되기까지 했다. 이런 점이 '이승만 신화'의 일부를 구성했지만, OSS 당국은 이승만의 실제 영향력이 보잘 것 없고 독립운동 진영에서 분란만 많이 일으켰다는 점에 실망하여 이승만과의 공식적인 관계를 끊고, 임시정부와 합작하여 광복군의 국내 침투 작전을 추진했다.

이승만 정부의 김구 암살과 40만 양민 학살

이승만의 귀국 제일성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의 의미를 가장 절실히 새긴 자들은 바로 친일파였다. 그들은 이승만 밑에 똘똘 뭉쳐 '해방'이라는 위기를 돌파해냈다. 논란은 많았지만 분명 주요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던 이승만은 경찰, 군대, 검찰 등 권력기관에 포진한 친일세력의 수호자가 되었고, 미국과 이들 친일세력에 의존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이승만은 미국과 함께 일찍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나섰고, 국회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습격, 백범 김구 암살 등 1949년 6월 공세를 통해 자주와 통일을 지향하는 세력을 거세했다. 이승만 정권은 남북협상의 주역 김구를 암살함으로써 남북 간의 무력대립 가능성을 극대화시켰지만, 북한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기는커녕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하는 식의 허언만 일삼았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권은 극우 세력 내부에서조차 국방장관 신성모나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이 북한의 간첩이 아니냐 소리가 나올 정도로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건국전쟁>은 '런승만'의 오명을 좌익이 씌운 것이라 강변하지만, 1950년대 문건이나 주요 반공 인사들의 회고록을 찾아본 사람이라면 큰 소리만 치다가 다리 끊고 도망가고, 돌아와서는 '잔류파'들을 부역자로 처벌한 자들에 대한 비판이 극우 반공 인사들로부터 가장 거세게 나왔다는 사실을 부인하진 못 할 것이다.

<건국전쟁>이 4.3사건만 살짝 언급하고 지나갔지만, 이승만의 행적 중 가장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수십만의 대한민국 국민이 이승만 정권의 군대(헌병, CIC, 일반 전투부대, 청년방위병)와 경찰, 그리고 권력의 비호를 받는 우익단체들에 의해 학살 당했다는 점이다. 보도연맹 학살, 형무소 등 재소자 학살, 공지화 작전과정에서의 학살, 부역자 처벌과정에서의 학살, 후방 토벌과정에서의 학살, 그리고 예비병력으로 동원되었다가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건까지 포함하면, 민간인 학살의 희생자는 최소 40만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승만의 독선적이고 고집 센 성격에 넌더리를 낸 미국은 이승만을 교체할 대안을 찾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드는 상황을 묵과할 수 없었던 미국은 '상비계획(Ever Ready Plan)'을 세워두고 이승만을 몰아내려 했지만,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대신 미국은 이승만 주변의 이범석, 임영신, 윤치영, 임병직 등을 몰아내고 이기붕 등 온건파를 포진시켰다.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을 마구 유린했다.

1952년 계엄령 하에서 국회의원들이 탄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고가는 만행을 저지르며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고, 1954년에는 사사오입이라는 희한한 방법으로 부결 처리된 개헌안을 되살려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1958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을 날치기 통과시키며 국회를 피로 물들였고, 이어 1959년에는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전쟁>은 이승만이 민주주의를 토착화시켰고, 의회를 중시했으며, 언론자유를 신장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부인 프란체스카의 국정 농단

이승만은 나이가 너무 많았다.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수명이 50대 후반에 머물던 시절, 그보다 30년이나 더 오래 산 86세의 이승만이 1960년 또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가 꽃다운 청춘 2백 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기의 운동권 스타였다. 고종의 폐위를 주장하여 대역죄로 구속된 이승만은 46세(!)의 고종이 나이가 너무 많으니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승만은 이미 두터운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의 국정개입과 농단은 김건희의 국정개입과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심각했다. 경무대의 사실상의 제일 공용어는 영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비서정치의 주역 박찬일이나 이기붕 부인 박마리아의 권력도 사실은 다 프란체스카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고령의 이승만에게 가벼운 치매기가 있다는 것은 미국 정보 문서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승만은 더 이상 통치해서는 안 되고, 통치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에 또다시 나선다는 것은 이승만의 잘못일까, 이승만 부하들의 잘못일까? 개념적으로는 이승만의 잘못, 이승만 정권의 잘못, 이승만 부하들의 잘못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조차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The buck stops here!"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이승만을 지워버린 건 박정희다

<건국전쟁>은 좌파들이 이승만을 지워버렸다고 억지를 부리지만, 이승만을 지워버린 것은 박정희이고, 박정희마저 지워버린 것은 전두환이었다. <건국전쟁>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승만이 깔아놓은 레일 위로 박정희의 기관차가 씽하고 달렸다는 그림이다. 이런 주장에 펄쩍 뛸 사람은 바로 박정희가 아니겠는가. 부산정치파동 전후 육군본부 작전국 차장으로 있던 박정희는 일본육사 선배인 작전국장 이용문과 함께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쿠데타를 모의했었다. 이용문이 비행기 사고로 죽고 난 후에도 박정희는 호시탐탐 이승만을 축출할 기회를 노렸었다. 이승만이 4월혁명으로 쫓겨나고 난 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고 9개월만에 박정희는 군사반란에 성공한 것이다.

5.16 후 박정희는 '구악(舊惡) 일소'란 구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 겨우 9개월간 집권한 장면 정권은 박정희에게 '구악'이란 소리를 들을 처지가 아니었다. 박정희에게 구악이란 바로 이승만 정권 시기의 온갖 적폐를 의미했다. 5.16 전 박정희의 술동무였던 이병주는 평소 박정희가 이승만에 대해 "미국에서 교포들 모아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승만 세력에 의해 김구 선생이 암살되고 난 뒤, 백범기념사업회는 남산에 백범의 동상을 세우려고 했다.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들은 이승만 개인숭배를 강화하면서 서울시를 이승만의 호를 따 우남시로 바꾸려고 했고, 백범 동상을 세우려는 자리에 기단만 23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그 동상은 몇 년 못 가 시민들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박정희의 주도로 백범의 동상이 세워졌다.

김구가 테러리스트라면 민간인 학살한 이승만은?

백범 암살을 이승만이 직접 지령을 내린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신성모를 필두로 하는 이승만의 추종자들이 백범을 암살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승만은 백범의 암살자들을 비호하고 암살의 진상을 은폐했다. <건국전쟁>은 고령의 이승만이 1960년 대통령선거에 불가피하게 나선 것은 일본이 추진한 재일동포 북송사업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폈다. 이승만 세력으로서는 그만큼 재일동포 북송문제를 중요시했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일본에 파견한 공작책임자는 바로 백범 암살범 안두희였다. 일본에서 안두희를 지원한 현지 책임자 위혜림은 1935년 일본 상해영사관이 백범 암살을 음모했을 때 그 공작에 호응하고 나선 암살모의의 주역이었다. 1935년 백범 암살을 모의했던 자와 1949년 실제 백범 암살을 실행한 자가 1959년 함께 손을 잡고 이승만의 비밀공작을 추진했다는 사실은 소름끼치지 않은가. 이승만을 띄우려는 자들이 어쩔 수 없이 김구 콤플렉스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지 않을까.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매도하는 자들은 이승만의 엄청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어라 말할지 궁금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 ⓒ연합뉴스

이 글을 쓴 한홍구 교수는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 책임편집인을 맡고 있습니다.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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