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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에 한번, 비주류 음악 중계 의무화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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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에 한번, 비주류 음악 중계 의무화는 어떨까

[음악의 쓸모] 한국 비주류 음악이 겪는 부당함

새 앨범을 듣는다. 홀리 마운틴(Holy Mountain)의 첫 앨범 [Holy Mountain]이다. '성스러운 산'이란 밴드 이름은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의 스토너/둠 메탈 밴드 슬립(Sleep)의 두 번째 앨범 [Holy Mountain]에서 가져왔다. 이는 곧 홀리 마운틴도 스토너 메탈이나 둠 메탈에 큰 영향을 받은 밴드란 의미가 된다. 밴드 스스로도 스토너/슬러지 메탈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제 막 첫 앨범을 발표했지만 록 트리오를 구성하고 있는 세 명의 멤버 모두 오랜 경력을 가진 베테랑이다.

장르 이름은 낱말 뜻 그대로 해석하는 게 가장 직관적이며 잘 와 닿는다. '스토너(stoner)'는 '약쟁이'를 뜻하는 말로, 스토너 메탈은 말 그대로 마치 약을 빤 듯한 몽환적이고 환각적인 음악을 뜻한다. '슬러지(sludge)'는 '진흙'을 뜻하는 낱말로, 슬러지 메탈은 마치 뻘밭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그런 상태를 묘사한다. 스토너와 슬러지, 둠은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다. '록' 대신 '메탈'을 붙인 건 그만큼 강렬한 사운드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저 먼 옛날, 영국 버밍엄에서 탄생한 밴드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를 조상으로 한다. 이들이 펼쳐 보인 어둠의 세계는 전 세계 수많은 헤비메탈 밴드에 영향을 끼쳤다. 스토너, 둠, 슬러지 등 극단적인 헤비메탈이 영역을 더 넓혀나갔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이 음악들은 메탈의 하위 장르로 새로운 밴드를 배출하고 새로운 음악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 한국도 비록 초라한 숫자지만 홀리 마운틴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Holy Mountain]의 첫 곡 '...at the Mountains of Madness'는 홀리 마운틴이 어떤 음악을 지향하는지를, 또 스토너/슬러지 메탈이란 장르가 어떤 음악인지를 잘 설명해 준다. 곡이 시작되고 3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보컬은 나오지 않고, 기타와 베이스가 만들어 내는 불길하면서 주술적인 리프가 반복된다. 이어서 들리는 거칠고 신경질적인 보컬과 기타 솔로, 다시 이어지는 리프는 8분의 시간을 진창에서 허우적대게 만든다. [Holy Mountain]은 확실히 좋은 앨범이다. 장르에 충실한 잘 만든 앨범이다.

9년 전에도 한국에선 좋은 스토너/슬러지 메탈 앨범이 나왔었다. 블랙 메디신(Black Medicine)의 [Black Medicine](2015)이었다. 사두(Sadhu) 출신의 기타리스트 이명희, 시드(Seed) 출신의 보컬리스트 김창유가 중심이 돼 결성한 블랙 메디신의 소리는 훌륭했다. '세계 수준의'란 표현을 써도 될 정도로 이들의 느릿느릿한 스토너/슬러지 사운드는 동시대의 해외 밴드 못지않게 낮고 무겁고 어둡고 환각적이었다. 블랙 메디신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홀리 마운틴이 낮고 무겁고 어둡고 환각적인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나는 한국 헤비메탈을 스포츠 비인기 종목에 비교하곤 했다. 지금은 예전처럼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하지만, '우생순'으로 대표되는 여자 핸드볼이나 하키 같은 종목을 말하는 것이다. 평상시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종목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때나 한 번 정도 국민의 관심을 받는 이 종목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척박한 환경에서 지속되는 걸 안다.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메달을 따는 모습은 놀라운 일이다. 기적 같은 일인 걸 잘 안다.

홀리 마운틴과 블랙 메디신의 존재가 비인기 종목의 모습과 비슷하다. 핸드볼이나 하키만큼이나 척박한 환경이다. 대부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헤비메탈, 그마저도 그 안에서 더 비주류에 가까운 스토너/슬러지 메탈은 척박함에 있어서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다. 황무지와도 같은 밭에서도 이 밴드들은 훌륭한 앨범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다른 게 있다면 이 밴드들에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기회마저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애써 맺은 열매를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장이 없고, 기회가 없다.

얼마 전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이 끝났다. 첫날 수백 명의 관객을 무대로 올려 세운 턴스타일(Turnstile), 이어서 축구 경기의 송가가 된 듯한 'Seven Nation Army'를 연주한 잭 화이트(Jack White), 수만 명의 관객 앞에서 압도적인 헤비 사운드를 들려준 브라질 밴드 세풀투라(Sepultura) 등 많은 이들의 무대가 화제에 올랐다. 출연진 명단에 이름을 올린 뒤부터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낸 QWER과 데이식스(Day6)의 무대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4일 열린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무대에서 공연하는 다크 미러 오브 트레지디. ⓒ인천시 제공

하지만 나에게 3일간의 무대 가운데 펜타포트 2024의 최고 무대는 다크 미러 오브 트레지디(Dark Mirror Ov Tragedy, 이하 DMOT)였다. 당연히 펜타포트의 모든 공연을 다 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DMOT의 공연만큼이나 감동을 줄 수는 없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DMOT가 들려주는 블랙 메탈은 보는 시각에 따라 유치해 보일 수 있는 음악이다. '시체 화장'이라 불리는 콥스 페인트(corpse paint)를 하고 중세 기사 같은 복장을 한 채 무대에 오른 DMOT는 자신들의 콘셉트를 극한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날 모인 수많은 관객을 음악으로 설득했다.

더 놀라운 건 그 자리에 있던 관객 가운데 블랙 메탈을 듣는 사람은 극소수였을 거란 사실이다. 블랙 메탈이란 게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블랙 메탈을 들어본 적도 없는 이들이지만 마치 하나의 극처럼 짜놓은 무대에 모두가 감동하고 환호했다. 기괴하게 보일 수 있는 화장과 의상은 음악을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됐다. 난 결국 이게 음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국내에서의 인지도나 인기는 부당할 정도로 낮지만 꾸준히 해외 레이블에서 앨범을 발표하고 해외 음악인들과 교류하는 DMOT가 가진 음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어 좋은 음악이 갖는 힘이다. 그래서 이 문단의 핵심 낱말은 '부당'이다.

'부당'의 뜻은 '이치에 맞지 아니함'이다. 이 이치를 어느 기준으로 두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언급한 세 밴드의 음악적 역량과 비교해 이들 밴드의 한국에서의 인지도나 위상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DMOT의 공연을 보면서, 홀리 마운틴의 앨범을 들으면서, 또 올림픽을 보면서 망상했다. '비인기 종목들은 4년에 한 번씩이라도 국민적 관심을 가질 기회가 있구나, 비주류 음악도 4년에 한 번씩은 모든 미디어에서 보름간 의무적으로 방송하고 기사를 써주면 어떨까.' 하는 망상이다.

망상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망상이다. 여론을 선도하기보단 그저 인기와 화제에만 매달리고 끌려가는 지금 미디어 현실에서 비주류 음악을 향한 관심은 조금의 기대조차 할 수 없다. 평단 역시 마찬가지다. '음악' 평론가라 자처하지만 'K팝'과 몇몇 장르에만 매몰돼 있는 이들에게도 아쉬움은 많다. 앞서 썼듯 난 좋은 음악은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 난 홀리 마운틴의 음악이 그런 음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발표된 지 한 달이 돼가는 홀리 마운틴의 앨범을 소개하고 언급하는 매체와 음악관계자 수는 얼마나 되나. 비주류 음악의 올림픽 같은 망상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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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2000년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 기자로 음악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네이버 <온스테이지> 기획위원, 한겨레신문 대중음악 전문 객원기자로 일했고,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위원과 멜론 <트랙제로> 전문위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여러 온라인·오프라인 매체에서 정기·비정기적으로 글 쓰고 말하고 있습니다. <케이팝 세계를 홀리다>를 썼고, <한국 팝의 고고학 1990>, <멜로우 시티 멜로우 팝>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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