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정세가 불안합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남모르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나눔은 힘이 셉니다. 작은 결심, 조그만 행동이지만 태풍이 되어 사회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푸르메재단이 한국 최초로 어린이 전문 재활병원을 세운 것도, 단단한 의지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나눔을 실천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가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이해인 수녀는 가톨릭 환경 속에서 자랐다. "성당을 열심히 다니셨던 어머니에 이끌려 저는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 숙명여대에 다니던 13살 위 언니가 갑자기 <갈멜봉쇄수녀원>에 입회했습니다.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수녀원에 들어간 언니와 신앙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저도 수도자로의 길로 조금씩 들어서게 됐습니다."
그녀의 집안에는 글 쓰는 사람들이 많다. 할아버지는 제물포고 교사로 틈틈이 글을 썼고 아버지는 1930년대 <돌산령>이란 단편소설로 주요 일간지를 통해 등단했다. 오빠는 '친구는 옛 친구, 맥주는 OB', 성당 미사주인 '마주앙' 등의 카피로 유명한 우리나라 1세대 카피라이터 이인구 씨. 시조 시인 이태극 씨가 이모부, 문학평론가 이숭원 씨가 이종사촌 동생이다. 이해인 수녀의 원래 이름은 명숙이다. 밝을 명(明), 맑을 숙(淑). 그녀의 성격과 닮았다.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하면서 클라우디아라는 본명을 받았다. 매일 바라볼 수 있는 광안리 바다(海)가 있고 사람들에게 친절(仁)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해인(海仁)을 필명으로 정했다. 해인이란 이름으로 천주교 잡지 <소년>에 원고를 보내고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인으로 불리게 됐다.얼마 전 중학교 단짝이었던 가수 박인희 씨(본명 박춘호, 朴春湖)와의 35년 만의 만남이 큰 화제가 됐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갑자기 정색했다. "너무 속상해요. '수녀 이해인' 하면 모두 백발의 할머니로 기억하는데 '가수 박인희' 하면 검은 생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날씬한 30대 통기타 가수를 연상합니다. 우리가 해방둥이 79살이 된 중학교 동창이라고 하면 모두 깜짝 놀라지요. 인희에 비해 제가 늘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속상하다고 푸념을 하지만 이해인 수녀의 표정이 밝다. 세월의 흐름을 어떻게 비껴가겠는가. 자세히 보면 산 넘고 강 건너 겪어온 80년 풍상이 두 사람의 얼굴에 새겨져 있다.
두 사람은 풍문여중(豊文女中) 단짝이었다. 양 갈래 머리의 두 소녀는 매일 아침 서로의 책상에 편지를 넣었고 그 우정이 7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35년 만에 귀국콘서트를 가진 박인희 씨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해인이는 예쁘고 명랑해서 친구들에게 늘 인기가 많았어요. 제가 해인이에게 말을 걸려면 다른 친구들이 질투할 것 같아 눈치를 보곤 했습니다. 발랄했던 해인이가 연예인이 되고, 말이 없던 내가 시인이 되었으면 아마 어울렸을 것 같아요"하고 회고했다.이해인 수녀에게 학창 시절 인기의 비결을 물었다. "제가 도도할 정도로 새침하고 공부를 잘한 것이 친구들이 좋아했던 이유 같아요. 동네 골목길에서 저를 지켜보는 남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꽤 인기가 있었지요."
문학적 재능도 인기 비결 중 하나였을까.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그러다 중학교 문예반 지도교사였던 임영무 선생님의 인정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풍문여중 문예반에 인물이 많았습니다. 2년 선배 최순강은 <대머리 총각>으로 유명한 가수 김상희 씨에요. 지금도 탤런트로 활약하는 반효정 씨(본명 반만희)도 선배였습니다. 연극인 손숙 씨도 바로 1년 위 선배였고요." 그러고 보니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도 풍문여고 출신이다. '문학이 풍성하다'라는 학교명이 어울린다.
그렇게 단짝이던 두 사람이 어떤 이유로 갑자기 헤어지게 됐을까. "2학년 때 집안에 사정이 생겼습니다. 제가 갑자기 부산 동래여중으로 전학 갔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수녀원에 입회하게 됐어요. 인희는 저의 수도 생활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편지를 쓰지 않았다고 해요. 인희가 1981년 돌연 연예계를 은퇴하고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습니다."
박인희 씨는 가수로 활동하면서 절친 이해인을 그리며 노래 <젊은 날의 우리들>을 지었다. 시 낭송곡 '얼굴'과 시 '친구를 위한 기도'도 친구 해인을 위해 썼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연락이 끊겼던 두 사람은 2016년 이해인 수녀의 <민들레의 영토> 출간 40주년 행사와 박인희 씨의 컴백 콘서트가 성사되면서 50년 만에 해후했다.수녀원으로 많은 편지가 온다고 들었는데 대부분 이해인 수녀 앞으로 온 것일까. "맞아요. 대부분 제 것이에요. 꼬마들이 연말 산타클로스에게 편지 보내듯, 주소도 쓰지 않고 '민들레의 영토 수녀원' 앞이라고 해서 제게 보냅니다. 참 고맙지요. 어른들 편지는 제 시를 읽은 소감이나 안부 인사가 대부분입니다. 무엇보다 몸이 아픈 분의 편지를 받을 때 안타깝습니다. 사형수 한 분이 교도소 안에서 예수님의 그림을 잘라 붙이고 직접 글을 쓴 화보 집과 밥풀로 만든 십자가를 보내주셨어요.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위해 기도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연이 대부분이다. 종교를 뛰어넘는 우정이라고 할까. 이해인 수녀와 법정 스님의 교류가 한때 화제가 됐다. 어떻게 인연이 시작됐는지 물었다. "법정스님의 글을 좋아하던 친구 수녀님이 저에게 법정스님 주소를 주면서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보내드리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요. 편지와 시집을 송광사 불일암으로 보낸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스님은 수도 생활의 어려움, 절대자에 가까워지는 방법, 본질적인 고독에 대해 편지를 주셨어요. 스님께서는 수도자의 고독은 단절이 아니라 결국 자기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씀하셨어요. 법정스님이 돌아가셔서 너무 허전하고 아쉽습니다. 살아 계셨다면 수행자로서, 때로는 문학적 도반으로서 좋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큽니다."
오래전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도 아들을 잃었을 때 이해인 수녀를 찾아와 위안을 받았다. "제가 있는 수녀원이 고향 같다고 찾아오셨어요. 수녀원 끝 방에 머물며 바닷가를 산책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언덕 방은 내 방'이라는 글을 통해 하나뿐인 아들 원태 씨를 잃었을 때의 고통과 이해인 수녀에 대한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 생애 가장 고통스러웠던 1988년 가을, 나는 그때 나만 당하는 고통이 억울해서도 미칠 것 같았지만 남들이 나를 동정하고 잘해주려고 애쓰는 것도 견딜 수가 없었다. (…) 마침 그때 이해인 수녀님으로부터 수녀원에 쉴 만한 방이 있으니 언제라도 오라는 소리를 듣자 그렇게 가고 싶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언덕 방 손님 노릇을 통해 (…) 홀로 서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 거기 언제나 갈 수 있고, 또 가기를 꿈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참 복도 많다 싶다."
건강을 묻자 "이전 같지는 않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하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이해인 수녀의 어머니는 2007년 95살의 연세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납북되고 57년을 홀로 사시며 삯바느질로 4남매를 키우셨다. 이해인 수녀에게 어머니는 큰 산이었다. 그 충격 때문일까. 이해인 수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 직장암 3기 판정을 받았다. 큰 수술과 수십 차례 항암치료를 받았다. 끝내 투혼을 발휘해 암을 이겨냈다. 최근에는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고 대상포진과 통풍의 고통을 잘 견뎌냈다. 육신의 고통이 밀물처럼 밀려왔지만 그녀의 정신을 지배할 수는 없다. 표정이 밝다.이해인 수녀는 매일 오전 '해인글방'으로 출근한다. 이곳은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유치원 교실이었다. 수녀원의 배려로 1997년 서재로 사용하기 시작한 뒤 3년 뒤 '해인글방'이란 문패를 달았다. "이곳에서는 주로 사람을 만납니다. 글을 구상하고 쓰는 것은 주로 수녀원 침방이지요. 침대에 누우면 시상과 '이런 글을 써야지'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옛날에는 어렵고 힘들 때 시상이 떠올랐는데 요즘은 기쁠 때 떠오르니 신기하지요. 머릿속으로 잘 다듬었다가 어느 정도 완성되면 글방에 나가서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물건이 무엇인지 물었다. "저에게는 모두 소중한 보물이지만 특히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편지입니다." 은색 액자 속에 정갈한 글씨가 보인다.
"축하합니다.
장구한 세월 귀찮게도
숱한 발길에 채이던
돌맹이가 닳코 닳아 빛이 난다.
서울에서 엄마가 기쁜 마음으로."
이해인 수녀가 1981년 아동문학가 윤석중 선생이 설립한 '새싹문학상'을 수상하자 어머니가 보낸 축하 편지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입회한 지 60년이 됐지만 세속의 어머니는 늘 마음속에 살아있다.바다일기
늘 푸르게 살라 한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 굽은 마음을 곧게
흰 모래를 밟으며
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바위를 바라보며
내 약한 마음을 든든하게
그리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마음
갈매기처럼 춤추는 마음
늘 기쁘게 살라한다
그동안 이해인 수녀는 시집과 에세이, 그림책, 시낭송 음반집, 대담집 등 50여 권을 출간했다. 총 판매 부수는 700만 부가 넘을 것이다. 앞으로 쓰고 싶은 책은 무엇일까. "최근 문득 든 생각인데 일 년이 52주이니 그동안 쓴 52개의 시를 뽑아 묵상 자료를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그림이 곁들인 사랑의 동화책 한 권을 쓰고도 싶고요.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니 개인적인 버킷리스트 같은 것은 없고요. 그저 순리대로 선하게 살다가 때가 되면 삶의 여정을 한 편의 시처럼 마무리하고 싶을 뿐입니다."
몇 년 전 이해인 수녀는 푸르메재단 강당에서 장애어린이와 어머니를 위한 토크 콘서트를 열었다. 그때 이해인 수녀는 용돈을 저금해 만든 '민들레 기금'을 전달해 줬다. 장애어린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할까.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가진 분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데 현실은 그렇질 못해 속상할 때가 많아요. 가족이나 친지, 이웃이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잘해주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꼭 용기를 잃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가 행복해 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남을 원망하기 전에 나부터 돌아보고,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먼저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으면 합니다. 전쟁으로 고통받고, 가난과 자연재해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아픔에 간절하게 기도하고 도움을 주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내가 먼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입회 60년을 맞은 이해인 수녀가 전해준 지혜였다.
헤어질 무렵 이해인 수녀는 최근 아들을 잃은 한 지인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너무 힘들었는데 이해인 수녀의 시 <파도의 말>을 읽고 큰 위안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문학은 위대한 것일까.파도의 말
울고 싶어도
못 우는 너를 위해
내가 대신 울어줄게
마음 놓고 울어줄게
오랜 나날
네가 그토록
사랑하고 사랑받은
모든 기억들
행복했던 순간들
푸르게 푸르게
내가 대신 노래해줄게
일상이 메마르고
무디어질 땐
새로움의 포말로
무작정 달려올게
*백경학 푸르메 상임대표는 CBS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뒤 영국에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푸르메재단을 세웠습니다. 푸르메재단은 시민 1만 명과 넥슨 등 500개 기업과 함께 2016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고, 2022년 경기도 여주에 푸르메소셜팜을 여는 등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와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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