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요양보험과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제도 등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사회서비스가 제도적으로서 도입된지 벌써 10년 이상이 지났다. 하지만 지역사회복지관 등 기존의 사회'복지'서비스는 그대로 존속되고, 최근에는 사회서비스원, 찾아가는 보건·복지서비스, 커뮤니티 케어 등 서로 다른 방향의 정책이 동시에 추진되는 등 혼란은 여전하다. 이에 사회서비스를 도입 이전부터 연구해 온 연구자로서 각각의 쟁점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앞으로 10년의 방향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이 기획은 1) 사회서비스 공단 2)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등 찾아가는 복지서비스 3) 커뮤니티 케어 4) 사회서비스의 또 다른 10년을 위한 제언 등 4회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다. (필자 주)
국가복지의 발전 방향이 제시되었던 국민복지기본선 확보운동
문재인 정부에 이곳 출신 인사들이 몇 명이 중용됐다는 이유로 일부 언론에서 권력기관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 참여연대는 1994년 창립된 이래 핵심 정책 중 하나인 '국민생활최저선 확보운동'에 힘을 쏟아왔다. 이후 1996년 '국민복지기본선 확보운동'으로 개칭된 이 캠페인은 국가가 국민에게 보장해야할 복지의 기본선을 제시하고 필요한 제도적 과제를 관철하고, 입법화하기 위한 활동이었다.
주로 정치적 민주화가 사회적 아젠다였던 당시 상황에서 민주화 그 이후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서구사회의 경우 보편적 투표권이 결국 복지국가로 이어졌던 것처럼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된 우리나라도 이제 국민을 위해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줬다.
이것은 199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최초의 민주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동시에 IMF 금융위기라는 최악의 사회경제적 위기가 들이닥치며 급격한 복지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계기와 맞닿아있다.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에 모든 국민이 가입할 수 있게 되고,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이 모든 사업장에 적용이 되며, 일정 소득 이하로 어려워진 국민이라면 누구나 나라가 보호해준다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세워진 것도 그 때의 일이었다.
물론 여전히 건강보험의 보장률은 60% 수준이고, 국민연금은 용돈 연금으로 전락하고 있고, 실업을 당했을 때 받는 급여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나라가 발전할수록, 특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이런 제도들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번 정부는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기 위한 문재인 케어를 추진하고, 과거 고갈된다면서 급여액 깎기에 급급했던 이전 정부와는 달리 국민연금의 보장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여전히 혼란만 두드러지는 사회서비스의 발전 방향
그러는 동안 이 정부에서는 한편으로는 읍면동 중심으로 민간의 역할을 늘리겠다며 서울시 찾동을 전국화하는 '찾아가는 보건복지 서비스'를 추진하고(관련기사: '찾동'의 전국화, 문제있다) 또 한편으로는 광역 시·도에 사회서비스원을 세워서 공공의 역할을 확대한다고 하고 있다(관련기사: 문재인표 사회서비스공단, 정치적 책임은 누가 지나?). 또 올해에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 거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커뮤니티 케어(community care)'를 추진하겠다고 하지만 이것이 기존의 정책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관련기사: 커뮤니티 케어, '선진국 흉내내기'에 그치나).
사실 이러한 정부 정책의 혼란은 단지 정부의 탓만 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사회복지계에서도 사회서비스 발전방향을 두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현실이다. 입장에 따라 의견의 차이는 당연하겠지만, 유독 사회서비스에 대해서는 기본적 방향부터가 너무나 분분하다. 이러한 혼란의 기원을 따져보면 우리나라 복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최근에 나온 일본 국립 신규대학에서 재직 중인 김조설 교수의 책 <한국 복지정책 형성의 역사>(인간과복지, 2017)에서 우리나라의 국가복지체계가 처음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의 혼란이후 복지라는 것은 국제구호단체의 해외원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1960년대 원조가 급격히 감소되면서 건국이후 처음으로 국가에 의해 의식적인 체계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국가책임을 최소화하고 민간자원을 최대한 동원하는 구호행정의 성립
하지만 당시 반공국가와 국민경제 건설이라는 지상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군사정권은 사회복지에 있어 철저하게 국가책임은 최소화하면서 민간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 아니라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는 사회불안을 통제하는 것이 일관된 의도였다. 그래서 경제건설이 아닌 생활분야 자원배분은 최소화하면서, 국민들은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알아서 살아가기를 요구해왔다.
이를 김조설 교수는 '구호행정'이었다고 일컬으며 앞서 언급했던 1990년대 말 복지의 제도적 확대가 일어나면서 비로소 극복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복지 제도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사회서비스에서는 과연 극복이 되었는가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오히려 '구호행정'의 영향이 서로 다른 형태의 판타지와 결합되면서 여전히 논의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첫 번째는 서로 돕고 사는 마을에 대한 판타지다. 구호행정의 역사 속에서 일부 국가제도를 제외하고 지역에서는 철저히 민간이 책임지는 복지가 발전되어 왔다. 국가가 직접 국민에게 복지를 제공하기 보다는 주로 민간 기관이 제공하고 국가는 일부 재정을 지원하는 것으로 역할을 제한해 왔다. 그것이 복지관 등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민간 사회복지가 발전해온 기본적 배경이 되었다.
민간은 국가나 정부가 못하거나 하기 어려운 부분을 담당해야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복지에서는 국가가 '하지 않는' 역할을 대신해왔다. 국가가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민간이 국가가 못하는 새로운 영역이나 혁신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구호'하는 역할정도를 대신해왔다.
'서로 돕고 사는 마을 판타지'로 재생산되는 구호행정의 유산
이러한 구호행정 체제는 지금에는 민관협력이니, 참여니, 공동생산이니, 마을이니 하는 이름으로 재생산되는 모습이 없지 않다. 서구에서 이러한 개념이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국가 역할이 어느 정도 확립된 이후 새로운 모색으로 등장한 맥락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이 생략된 채 개념만 수입이 되면서 국가책임을 최소화하면서 민간활용을 극대화하는 구호행정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공동체나 마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주민의 역량을 높이고 자치의 경험으로 주체화되는 과정은 값지고 중요하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국가의 복지기능을 대체하는 것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하면 과거의 불우이웃돕기와 본질적 차이를 보기가 어렵게 된다. 마을과 복지의 의미가 모두 왜곡되고 훼손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특히 기본적인 빈곤 문제만 하더라도 빈곤해도 부양의무자 등의 이유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100만 명 규모를 헤아리고, 보호를 받는 170만 명도 낮은 보호 수준으로 만성적 빈곤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를 무시한 채 이 문제에 대한 민간의 참여나 역할을 강조할수록 '구호행정'을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찾동 논의에서 많이 발견되는 모습이다.
두 번째는 국가 행정에 대한 판타지이다. 권위주의 정부의 구호행정 체제에서는 국가행정 이외의 정치적 과정이나 분권이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어떤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그것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에 불만이 없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제도만 합리적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고 전달 과정에서의 역동성이나 정치적 책임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국가 책임을 행정의 문제로 전락시키는 '국가 행정 판타지'
민주적이고 정치적인 과정에 대한 관심보다 제도의 합리성과 행정에만 관심을 갖는 경향은 제도 발전에 있어서 국가가 직접 책임지는 방향보다는 별도의 기구로 분리시키는 양태로 나타난다. 복지의 기능을 별도의 기구로 분리시키면 정부는 그 제도에 대한 직접적 책임에서 벗어나면서 제도의 문제는 그 기구의 행정적 문제로 제한된다.
특히 사회서비스는 일상공간의 문제로서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의 책임성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때 국가중심의 행정적 사고는 더욱 한계가 분명해 진다. 국가 행정의 판타지에서는 제도의 합리성이 문제의 전부이기 때문에 지방의 분권적 책임은 사고의 범위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사회서비스공단 논의에서 많이 발견되는 모습이다.
물론 이러한 혼란이 이번 정부의 일만은 아니다. 사회서비스가 처음 도입되고 확대되어 온 지난 10년의 역사에서 누적되어온 일이다. 2007년부터 민간기관에만 떠넘겨져 왔던 지역사회에서의 복지 기능을 사회서비스라는 이름으로 국가 제도가 수행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된 것이 아니라 기존 민간기관은 민간기관대로 있고, 새로운 사회서비스 제도는 그것대로 확대되어 왔다. 그러면서 기존 복지관의 기능이나 역할에 대한 혼란은 증폭되어 왔다.
2012년 통합 사례관리가 전국 기초 시·군·구에 도입되면서 공공급여와 서비스를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자원을 끌어들이자 지역 민간기관들과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지만 정책적으로 정리된 적은 없었다. 이것이 서울시에서는 찾동으로, 박근혜 정부에서는 복지허브화로 전국 읍·면·동으로 확산이 되면서 그 양상은 더욱 심화되었지만 이를 해소하려는 정책적 시도는 없었다.
정리해보면 우리나라 사회서비스가 발전은 되어왔고, 고령화 등과 함께 가족구조가 변하면서 필연적이긴 하였지만 뚜렷한 정책적 방향이나 목적을 가지고 정책과 제도가 발달해온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가능한 최소한 범위에서 제한된 역할에만 그치다보니 혼란이 가중되어 왔다. 그에 따라 사회서비스의 혜택을 받고 이용하는 사람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지만 어떤 것이 어떠한 대상에게 얼마만큼 보장되고 있는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황은 변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의 사회서비스 10년을 위해 필요한 '주민복지기본선 확보운동'
앞으로의 10년의 발전은 말하기는 이러한 상태에서는 어려울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앞으로의 사회서비스 10년을 이야기하는 출발은 과연 사회서비스를 통해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만큼을 보장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정부가 어떠한 역할을 얼마만큼 할지, 민간 영역은 어떠한 역할을 분담할지, 중앙정부는 무엇을 하고 지방정부는 어떤 책임을 가질지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커뮤니티 케어는 그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글에서 밝혔듯이 커뮤니티 케어라는 개념 자체가 지역사회에서 가능한 한 완전하고 자립적인 삶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정책적 목적이자 이를 위해 당사자 중심의 유연한 지원과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정책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구호행정의 유산이 극복되어야 한다. 주민의 기본적인 삶조차도 민간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기본권으로서 기본적인 보장을 하겠다는 의지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 또한 그냥 중앙중심의 행정적 제도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생활공간에서 지방정부가 책임있게 구현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국민복지기본선이 국가적 차원에서 논의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제도적 발전을 중심으로 했다면 주민복지기본선은 일상적 공간에서의 기본적 권리 보장을 위해서 이를 지역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지방정부의 역할을 중심으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역에서의 공공의 역할을 분명하게 규정하면서 비로소 공공의 대체제가 아닌, 공공의 한계를 보완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지속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민간의 역할 또한 제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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