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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이 주치의', 성폭력 2차 가해에 가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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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나영이 주치의', 성폭력 2차 가해에 가담하다 [데스크 칼럼]<31> 새누리당의 '뻘타'와 민주당의 '뻔뻔함'
십여년 전 신입기자 시절 아동 성폭력 사건을 취재한 적 있었다. 70대 할아버지가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여성의 일곱 살 난 딸을 여러 차례 성폭행했다는 의혹이었다. 이 아동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은 명확했지만 가해자가 누구인지 가려내기 힘든 상황에서, 이 할아버지는 범행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오히려 피해 아동의 어머니가 자신으로부터 돈을 뜯어 내기 위해 '딸을 팔아 먹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사건의 담당 형사도 이런 주장에 내심 동감하고 있어 수사가 크게 진척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해 아동은 성폭력을 당한 뒤 흔히 보이는 '외상후증후군'이 심해지고 있었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어른들이 자신을 거짓말쟁이 취급한다는 사실은 이 아동에게는 성폭력 못지 않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동 성폭력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연관된 다양한 문제를 취재하게 됐다. 피해 아동의 어머니를 통해 성폭력 피해 아동 부모 모임을 소개받기도 했다. 아동 성폭력은 피해 아동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점에서 용서 받기 힘든 범죄다. 나아가 피해 아동의 부모, 특히 어머니는 전문적인 상담과 치료를 요할 정도의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앞에 언급한 사건처럼 사회적 무관심과 편견 때문에 피해 아동과 부모는 적절한 보호와 치료를 받기 힘들었다. 수사기관과 법원의 아동 성폭력에 대한 이해 수준은 저열했고, 법.제도적 장치도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피해 아동의 부모들이 자발적인 모임을 꾸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도움을 주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수사 과정에서 피해 아동의 진술은 인정받기 힘들었다. 피해 아동은 경찰 수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성폭력에 대한 진술을 반복해야 했고, 검찰로 넘어가면 또 같은 진술을 반복해야 했다. 아동 성폭력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남성) 수사관의 의심에 가득찬 질문들 앞에서 아동의 진술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진술로서 법적 효력이 사라졌다. 이 자체가 2차, 3차 성폭력이었다. 성폭력으로 몸도 마음도 망가진 아이에게 멀쩡한 어른에게도 힘든 일을 강요하는 셈이었다. 설혹 범죄 사실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형량은 턱없이 낮았다. 2009년 조두순 사건 때도 가해자 조두순은 음주로 인한 심신 미약 상태라는 이유로 형량이 12년으로 감형됐다. 피해아동과 그 부모가 직접 신고해야만 하는 친고죄 규정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대한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이름이 있다. 바로 당시 연세대 의대 교수였던 신의진이었다. 그는 아동 성폭력 문제에 대한 전문가가 전무한 상황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피해 아동과 부모들에게는 자신들의 사정을 이해해주고, 자신들의 편이 되어주는 너무나도 고마운 '선생님'이었다. 그는 수사 과정에서 성폭력 사실에 대한 질문을 반복하는 것 자체가 2차, 3차 가해라고 주장하면서 피해 아동의 진술을 녹화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등 전문가로서 법.제도 개선에 역할을 했다. 신의진은 2009년 조두순 사건의 피해 아동 나영이(가명)의 주치의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는 또 아동 정신과 전문의 입장에서 교육과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내 '엄마들' 사이에선 유명인이었다. 나도 '엄마'로서 그의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국회의원이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다. 아동이나 여성 문제에 있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새누리당의 비례대표라, 자신의 특기를 얼마나 살릴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도 됐지만, 전문가 입장에서 소속 정당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 민주통합당의 인식 수준도 새누리당과 비교해 그다지 훌륭하다 보기도 힘들다. 여하튼 그는 결혼이주여성인 이자스민, 여성 핵물리학자인 민병주 등과 함께 소위 '박근혜 개혁공천'의 상징 인물로 비례대표 상위 순번(7번)을 받아 국회에 입성했고, 원내대변인 자리까지 맡게 됐다.

주말을 앞둔 지난 10일 늦은 오후 국회 정론관을 찾은 신의진 의원의 브리핑을 듣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민주당 고위 당직자가 여기자를 성추행 했는데 민주당과 해당 매체가 이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는 의혹 제기였다. 이런 충격적인 사건을 공개하면서 신 의원은 사건의 정황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피해 여성이 사건을 어느 수준에서 공론화하고 싶어하는 지에 대해서도 몰랐다. 쏟아지는 기자들의 추가 질문에 그는 "모른다", "말할 수 없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 신 의원의 브리핑 덕분에 이 사건은 만천하에 공개됐다. 알고 보니 피해 여성이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원하지만 사건 자체의 공개를 원하지 않아 '조용하게 처리'됐던 일이었다. 결국 피해 여성의 소속 매체도 드러나게 됐다. 특정 매체의 민주당 출입 여기자가 몇 안되는 상황에서 사실상 피해자가 '특정'된 셈이다. 같은 여기자 입장에서 피해 여기자가 왜 사건의 공개를 원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된다. 계속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 입장에서 이 사실이 공개되는 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회와 정당은 어느 곳 못지 않게 남성중심적이며 보수적이다.

당장 민주당에선 신 의원이 "2차 가해"를 했다며, 원내대변인을 사퇴할 것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자당의 당직자가 여기자를 성추행한 민주당이 제대로된 사과도 없이 "2차 가해" 운운하고 나서는 것은 앞뒤가 바뀐 태도다. 하지만 이런 모순적 상황을 만든 것은 전적으로 신 의원의 책임이다. 초선인 원내대변인의 브리핑이 이한구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와 조율없이 독자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새누리당도 공동 책임이 있다. 신 의원이 기자들의 질문에 남성 원내대변인인 이철우 의원에게 물어보라고 답한 것도 당내 어느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는 방증이다.
▲ 이종걸 의원의 박근혜 의원에 대한 막말에 대해 사과 요구를 하고 있는 새누리당 여성 의원들. 마이크 앞에 선 이가 신의진 의원. ⓒ연합뉴스

새누리당은 왜 이런 무리수를 던졌을까? 이 대목에서 지난 주 내내 시끄러웠던 '박근혜 그년' 파동이 떠오른다. 민주통합당 이종걸 의원이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박근혜 의원인데, 그년 서슬이 퍼래서...'라는 표현을 썼고, 새누리당과 박근혜 캠프는 발끈했다. 이 의원은 "그년은 그녀는의 준말"이라고 해명하는 등 버티다가 쏟아지는 비난 여론에 결국 공식 사과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은 이 문제를 국회 윤리위원회에서 다루겠다는 입장이고, 여기에 새누리당 여성 의원들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 의원의 행위가 명백한 잘못이지만, 새누리당이 "의원직 제명"까지 언급하고 나선 것은 과도한 반응이다. 정작 욕을 들은 박근혜 의원 본인은 침묵하고, 의원들이 나서 대신 화내고 사과를 받아내는 이 구조 역시 '사당화'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혹여 신의진 의원의 지난 10일 브리핑이 '여성 의식 없는 민주당'이라는 인식을 강화시켜 '그년 파문'의 여세를 몰아가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신 의원은 민주당의 비판에 "물타기"라면서 "성폭력 사건에 대핸 너무 쉬쉬하는 것도 문제"라고 언론을 통해 반박했다. 하지만 이미 가해자가 처벌을 받은 상황에서 신 의원의 공개 브리핑을 통해 피해 여기자가 얻은 이득은 무엇인가? 원치 않았던 신분의 노출과 사실상 비난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 각종 '평가' 이외에 실질적으로 피해 여기자가 얻은 건 뭔지 궁금하다. 그런 점에서 새누리당의 이번 사건 공개는 정치 공세에 불과했고, 여기에 '나영이 주치의'인 신 의원을 동원했다는 점은 매우 유감이다. 신 의원을 이런 식으로 동원하는 새누리당도 문제고, 누구보다 '2차 가해'가 어떤 것인지 잘 아는 신 의원이 이를 거부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성폭력 전문가인 신 의원이 '2차 가해'에 가담하게 되는 현실, 이게 우리 정치의 씁쓸한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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