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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적 자본주의가 남긴 컵라면 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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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적 자본주의가 남긴 컵라면 세개 [기고] 나는 지금 마음이 두렵고 흔들린다
1.

아들아이가 스물아홉이고 딸아이가 스물여섯이다. 첫째는 사회에 나갔고 둘째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면서 제자들 얼굴에 늘 자식들 얼굴이 겹친다. 20대 청년들이 짊어진 멍에와 너무나 쉽게 바스러지는 꿈. 그렇게 아이들의 표정에 드리워진 그늘이 가슴에 무겁다.

다행히 평소 가고 싶었던 회사에 들어간 아들은 취업 후부터 집의 지원을 받지 않고 서울에서 혼자 산다. 그런데 새해가 오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사는 곳을 새로 구해야 할 판이다. 한달여 동안 집 알아보러 여기저기 다니는 것 같다. 압도적으로 오른 전월세 값에 지하철이 바로 통하는 2호선 주위는 일찌감치 포기. 지금은 변두리 쪽을 알아보고 있단다.

마음 같아서야 거처 구하는 걸 다 도와주고 싶지만, 뻔한 대학교수 월급에 마음만 타들어가는 중이다. 신입사원 봉급 받아 50만원짜리 적금 넣고 나면 사는 게 늘 빡빡한 아들 녀석. 그래서일까 12월 11일 태안에서 일어난 참극을 지켜보며 아비로서 나는 마음이 더욱 복잡하다.

걸신들린 악령처럼 휘돌아가는 자본의 컨베이어벨트가 삼켜버린 스물 네살 청년 노동자 김용균의 삶.

최초 뉴스를 접한 후 여러 번 울컥했다. 그렇게 토요일 오후 기말 레포트 평가하러 연구실에 나왔는데, 조금 전 올라온 뉴스 사진 하나를 보고는 마음이 부르르 떨린다. 사정없이 눈물이 난다.

김군의 유품에서 그가 작업 중 늘 먹었다는 컵라면 3개가 나온 게다. 육개장라면, 진라면, 열라면... 탄 가루가 잔뜩 묻은 슬리퍼와 명찰 달린 점퍼 옆에 늘어놓은 저 보잘 것 없는 먹거리들. 알 수 없는 죄책감에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아비로서 선생으로서 명색이 지식인으로서.

▲ 고 김용균 씨가 남기고 간 소지품들 ⓒ공공운수노조 제공

2.

참극이 일어난 후 많은 이들이 자동적으로 2016년 5월의 구의역 사건을 떠올렸다. 그러한 지난 2년간 우리네 세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촛불혁명을 통해 정권이 바뀌었다. 적폐청산이 소리 높혀 외쳐지고 사람이 바뀌었다. 지난 10년 극우정권 치하의 악질적 관행들이 개선되는 듯 했다. 나라 전체에 개혁의 바람이 부는 듯 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은 변했는가?

나는 섬뜩한 마음으로 사회의 뿌리를 구성하는 분배적 하위구조가 미동도 없음을 확인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적 변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 변화가 없음을 목도한다.

새 정부 집권 후에 펜을 거의 놓았다. 보잘 것 없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에 벽돌 하나라도 얹었다는 책임감 때문이었으리라. 그저 새 정부의 성공을 기원했다. 종이신문에서도 온라인신문에서도 페이스북에서도 비판적 발언을 멈추었다.

지금도 대통령과 핵심 참모들의 선의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심이 없다. 이른바 개혁정부가 잠시도 역사적 소명을 잊지 않고 가용자원을 총동원하여 애쓰고 있음을 믿는다. 박수는 치되 동지적 비판은 삼갔던 이유가 그것이다.

어디 역사가 한 걸음에 앞으로 뛰쳐나가는가.

해방 70년을 넘기며 깊고 넓게 뿌리내린 이 나라의 기득권 구조가 얼마나 끈질기고 표독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완고한 탐욕 시스템의 저항 앞에 사자의 용기와 뱀의 지혜를 겹으로 쏟아도 태부족이기 십상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오늘 저 처연한 사진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정수리에 찬물이 끼얹어지듯 정신이 번쩍 든다.

그저 응원의 마음으로만 있었구나. 세상의 본질적 변화가 저지되고 오히려 그것이 역류하고 있음에도 응시의 끈을 놓고 있었구나. 바뀐 것이 별로 없음에도 과도한 기대에 취해 있었구나. 명색이 선생인데 그렇게 넋을 놓고 살아왔구나.

아들 녀석보다 한참 어린 비정규직 노동자의 저 참혹한 죽음에 나의 이런 안이함이 일조를 한 것은 아닌가, 섬뜩한 자책이 드는 것이다.

도우려면 제대로 도와야 하는데, 침묵만이 응원이 아닌데, 싸움에서 지치고 포기하는 기색이 보이면 오히려 냉정한 격려와 비판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새 정부의 탄생을 눈꼽만큼이라도 도왔던 자의 동지적 책무일진대.

3.

무산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알몸으로 세상을 부딪혔던 내 청춘의 삶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들아이와 딸아이와 제자들이 과연 내게 주어졌던 만큼의 최소한 사회적 성취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도저히 희망이 생기지 않는다. 땅바닥이 꺼지듯 후속세대의 발밑에서 공동체적 기반이 푹 꺼져가는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최약자들에게만 잔혹한 생존 스트레스를 집중적으로 밀어붙이는 사회. 하청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만 목숨 건 위험노동을 전가하는 약탈적 자본주의. 이 추세가 (개선의 희망조차 까마득하게) 점점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흐름을 바꾸려는 개혁시도가 철벽에 가로막힌 듯 힘을 잃고 있는 것이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매몰차게 제거되고, 빈곤과 직업 격차가 세습처럼 반복되는 세상이, 정권 교체와는 관계없이 (세계적 추세와도 역진하여)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가 2년 전 구의역 참극이었고 지금 쌍둥이처럼 반복되는 태안 화력발전소 참극인 것이다.

12시간 2교대의 가혹한 노동 후에 월급 160만원을 받아들고 기뻐했다는 청년의 죽음 앞에 나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피붙이가 늘 안쓰러운 것이야 어찌할 수 없는 인지상정. 그러니 아들 녀석더러 그래도 너는 낫다, 라고 덧없는 위로를 해야 할 것인가.

그나마 나은 직장에 들어간 아들 녀석의 삶조차 범상하게 보이지 못하게 하는 이 일그러진 세상. 이런 세상을 만들었거나 최소한 저지하지 못한 세대가 바로 우리들인데.

나는 지금 마음이 두렵고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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