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지개벽
설국열차는 느릿했다. 두 칸짜리 완행열차이다. 뜨문뜨문 간이역마다 한참이나 뜸을 들인다. 삿포로에서 꼬박 5시간을 걸려 이른 곳이 왓카나이(稚內), 일본의 땅 끝 마을이다. 북쪽 섬 홋카이도(北海道)하고도 최북단, 작은 마을에서 큰 바다가 펼쳐진다. 고즈넉하기 보다는 적막한 시골이었다. 하룻밤 새 통 눈이 그치질 않는다. 북쪽 섬과 북쪽 바다의 경계가 흐릿하다. 굳이 변경까지 찾은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 때문이었다. 러시아와 일본 간 회심의 빅딜이 성사되었다. 사할린과 홋카이도를 다리로 잇겠단다. 그 국경다리가 닿는 첫 마을이 왓카나이였다. 2030년, 이 땅 끝 마을이 국경 도시로 변신한다.
사할린 북쪽으로는 오오츠크해가 열린다. 더 북쪽으로는 캄차카(Камчатка) 반도가 자리한다. 캄차카도 홋카이도도 화산폭발이 만들어낸 섬이다. 실은 일본 본토까지 그러하다. 자연지리로는 하나로되, 인문지리로써 딴 나라가 되었다. 나라를 막론하고 온천에 제격이다. 캄차카의 간헐천에서는 혹한의 겨울에도 뜨거운 물이 솟아난다.
방향을 틀어 삿포로에서 남하하면 하코다테(函館)에 이른다. 홋카이도의 남쪽 끝이다. 메이지유신 150주년, 북해도 개척의 첫 삽을 뜬 곳이다. 혼슈를 마주하는 해양 도시로 화려하다. 본토와 연결되는 신칸센 역도 자리한다. 2030년이면 삿포로까지 노선이 확장된다. 도쿄부터 삿포로까지, 태평양의 절경을 감상하며 고속열차 여행을 할 수 있다. 삿포로는 왓카나이와 하코다테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허브 도시가 될 것이다. 고로 홋카이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게 된다. 일본 또한 섬나라가 아니다. 사할린-홋카이도와 동시에 연해주-사할린 다리도 건설되기 때문이다. 북해도와 연해주가 직통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사할린을 통하여 일본 열도를 내달린다. 모스크바는 극서 런던과 극동 도쿄를 잇는 중간역이 된다. 1945년 패망 이래 일본은 태평양 국가로 맹성했다. 2045년 일본은 유라시아의 일원으로 반전하게 될 것이다. 대양과 대륙을 잇는 해륙국가로 변모한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가교가 될 것이다. 20세기 초반 유럽과 아시아 사이, 20세기 후반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 더는 좌고우면 할 것 없다. 21세기 신대륙과 구대륙을 아우르는 일본의 신시대이다.
북극회랑 고속철도는 남진하여 남/북 유럽을 더욱 촘촘히 묶는다. 북해와 지중해를 뒤섞는다. 남유럽은 지중해를 사이로 북아프리카를 마주본다. 가장 가까운 곳이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 지브롤터 해협이다. 볕이 좋은 날이면 서로의 국경이 바라보일 만큼 도탑다.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 해저 터널을 놓기로 했다. 서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가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북아프리카의 서쪽 끝이 모로코라면, 동쪽 끝에는 이집트가 자리한다. 동아프리카와 서아라비아 반도에도 다리가 생긴다. 홍해를 가로지르는 이집트-사우디 대교이다. 아랍의 패권을 다투었던 백년의 앙숙이 이웃지간이 된다. 아라비아 해를 지나 벵골 만에 이르면 남인도와 스리랑카 사이에도 해양다리 건설이 논의 중이다. 인도양의 동/서로도 신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지중해, 유장했던 인도양 세계가 유려하게 부활한다.
구세계의 귀환, 앞서가는 곳은 역시 '지속의 제국' 중국이다. 이미 홍콩과 마카오를 광동성과 잇는 다리를 완성시켰다. 복건성과 대만을 엮는 남중국해 다리 또한 시간문제이다. 신시대의 물결은 황해까지도 이른다. 요동반도의 다롄에서부터 산동반도의 옌타이를 잇는 해저터널을 건설한다. 더 나아가 산동반도를 한반도와 연결시키는 방안도 모색되고 있다. 유력한 후보지로는 인천과 군산, 평택이 꼽힌다. 황해는 산동반도, 요동반도, 한반도를 잇는 동북아의 지중해가 될 것이다. 서해만도 아니다. 남해도 출렁인다. 큐슈의 후쿠오카와 부산, 거제를 잇는 해저터널도 재차 거론되고 있다. 동해와 서해와 남해, 한반도의 3면이 모두 꿈틀거린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구대륙만 직통하는 것도 아니다. 베링해협에서 우회전하면 알래스카가 곧장이다. 빙하기, 시베리아 원주민과 아메리카 원주민은 생활공동체였다. 아이스로드, 얼음길을 따라서 사람들이 오고갔다. 동시베리아와 서알래스카 사이에도 바닷길을 닦는다. 절반은 해저 터널로, 절반은 해양다리로 만드는 방안이 논의 중이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구대륙과 신대륙을 잇는 글로벌 신시대가 코앞이다. 캐나다와 미국의 서부를 질주하는 캘리포니아 종단 고속열차가 달릴 것이다. 멕시코를 지나 칠레와 아르헨티나, 브라질까지 가닿는다. 20세기에는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가 시베리아와 아메리카에 각기 생겼다. 21세기는 동반구와 서반구를 주파하는 지구 횡단열차 시대가 열린다. 5대양 6대주라는 말도 과거지사가 된다. 지구를 육로로 일주하는 신세기가 도래한다. 지구는 둥글다. 앞으로 앞으로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친구를 다 만나고 돌아온다. 멀지않은 미래이다, 2050년, 불과 한 세대 이후이다.
천하의 지붕, 북극의 빙하는 계속 녹아내린다. 북극곰은 눈물을 흘린다. 사피엔스는 눈빛을 반짝거린다. 얼음물 사이로 파랑이 일렁인다. 환호성을 내지르며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마저 있다. 신대륙 개척하듯 북극항로 건설에 사활이다. 그 새로이 열리는 바다를 바라보노라니 판단이 명료하게 서지 않는다. 천재지변이 될지, 천재일우일지 가늠하기 힘들다. 멈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돌이키기 힘들다. 앞으로 20년 아무리 애쓴다한들, 지난 200년 화석연료 남용의 후과를 막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운명이라 하겠다. 업보라고도 하겠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학적으로, 지구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인류세로 진입한 것이다. 천지인(天地人) 가운데서도 말석을 차지했던 인간이 천지개벽의 주체로 등극한 것이다. 인간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지리를 재창조하고 지구를 재구성한다. 해안선을 다시 그리고 지표면의 고저를 변동시킨다. 하늘의 진노보다 땅의 분노보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더욱 중요한 지구사의 신시대가 개막한다.
2. 물질개벽
21세기, 더 이상 독립국가는 없다.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 독립(In-dependent)은 적폐이다. 20세기형 민족해방운동도 앙시앙레짐이다. 땅따먹기를 일삼는 제국주의 시대의 방편이었을 뿐이다. 경쟁의 논리가 바뀐다. 연결력 경쟁을 한다. 영토의 정복(conquer)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 인물과 사물을 연결(connect)시키는 경합이 성/쇠를 가른다. 담을 치고 성을 쌓는 자는 고립된다. 길을 내는 자가 주도한다. 더 많은 길을 닦고 더 많은 길을 여는 나라가 지도국이 된다. 길 내기와 길들이기는 불가분이다. 길을 깔면 깔수록 길을 들일 수가 있다. 영토를 더욱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장소를 연결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한층 중요해진다. 자연스러움(자유무역)과 억지스러움(보호무역)이 충돌한다. 가릴 것 없고 꺼리지 않는 원활한 흐름과 덜컥거리는 마찰이 경쟁한다. 한쪽은 국경을 봉쇄하고 규제를 강화하고 제재를 가한다. 다른 쪽은 자원과 상품과 자본과 기술과 사상과 데이터의 교환과 거래를 촉진한다. 뚫리면 강해질 것이요, 막히면 약해질 것이다. 세계 최대의 연결망을 보유한 국가가 21세기를 선도하게 된다.
국민국가(Nation-State) 또한 유들유들해진다. 전 지구적 네트워크의 연결자(Node-State)가 된다. 노마디즘(Nomadism)이 내셔널리즘을 잠식한다. 그 연결(Inter-dependent) 국가들의 집합도를 19세기형 세계지도, 만국전도로는 재현할 수가 없다. 국가 간 체제로 쪼개져 있는 현재의 세계지도가 미래의 청사진, 천하도를 왜곡시킨다. 글로벌 허브 도시들 간의 횡단적 네트워크(connectivity atlas)를 그려야 한다. 고속도로와 고속철도와 송유관과 인터넷과 케이블 연결망을 입체적으로 구현해야 한다. 흡사 인체도에 방불할 것이다. 지구를 몸통으로 삼아 사람과 자본과 정보와 에너지가 피처럼 흐르고 기처럼 통하고 숨처럼 드나든다. 터닝 포인트, 물류와 문류와 인류의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초래한다. 티핑 포인트, 더더욱 많은 연결망이 누적되어 전혀 격이 다른 세계로 도약한다. 나라님에 충성하는 난세가 저물고, 하나님/하늘님/한울님을 모시고 섬기고 받드는 치세의 논리가 재귀한다. 포스트-웨스트(Post-West), 만인이 만국에 가로막히지 않았던 천하가 환생하고 움마가 재생한다.
하여 유라시아는 더 이상 '거대한 체스판'도 아니다. 인과 연의 인드라, 그물망이다. 접속하고 접촉하고 접대한다. 외계에서 관찰한 지구별의 상징 또한 만리장성이 아니게 된다. 억리와 조리에 달하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될 것이다. 지상의 길이 달라지면 땅의 논리, 지리 또한 전변한다. 19세기 주조된 '유럽'이라는 개념도 물렁해진다. 타자로 강요되었던 '아시아'라는 발상 또한 물컹해진다. 유럽과 아시아를 따로 분리하기가 힘들어진다. 고로 유라시아는 하나이다. 또 유라시아는 여럿이다. 내 안에 네가 있고, 너 안에 나도 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는 자타불이의 지평으로 올라선다. 남과 나를 가르지 않는 자리이타의 경지에 도달한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요, 온 마음이 한 마음이다.
앞으로 30년, 지난 300년보다 더 많은 연결망이 만들어진다. 2050년이면 유라시아 전체가 일심동체로 엮이고 묶이게 된다. 남으로는 인도양, 북으로는 북극해, 서로는 대서양, 동으로는 태평양. 네 개의 대양을 아우르는 하나의 대륙이다. 사해동포 감각이 실감으로 승한다. 유라시아를 중원으로 구대륙 아프리카와 신대륙 아메리카를 좌/우로 겸장하게 될 것이다. 고로 유라시아는 다시 지구의 중원이다. 고인류의 시원인 아프리카와 신인류의 고향인 아메리카를 잇는 개신(改新)인류의 요람이 된다. 구대륙의 쇠락과 신대륙의 득세를 조정하고 조율하는 글로벌 균형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언 30년 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념과 체제 대결이 저물었다. 한쪽의 승리, 역사의 종언이 아니었다. 일방의 굴욕을 강요하는 서구적 근대의 마침표였다. 서세동점의 끝물이었다. 바로 그해 World Wide Web이 탄생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지상의 길과는 또 다른 천상의 길이 열린 것이다. 오프라인과는 또 다른 온라인 신천지의 개막, 디지털 창세기였다. 축의 시대, 천주일가와 천하일가는 소원했다. 천주와 천하와 움마가 공진화하여 지구일가(Global First)를 이루지 못했다. 이제 축의 시대에 망의 시대가 접속한다. 망과 망으로써 축과 축을 소통시키고 융통시킨다. 축과 축을 잇고 땋는 망과 망이 겹겹으로 포개진다. 축과 망이 상호진화 한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공진화한다. 상전벽해, 물질이 개벽한다.
3. 정신개벽
더는 개인(In-dividual)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사문화될 개념이다. 디지털 신세계가 각별한 것은 만인과 만국만 연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 인터넷 시대가 열린다. 인공지능 시대가 개창한다. 자가용도 냉장고도 유사-의식을 탑재한다. 스스로 도로를 주행하고, 알아서 식품을 주문한다. 자동에 자각을 보태어 자율에 도달한다. 생산 활동의 도구에서 생명 운동의 주체로 진화하는 것이다. 인물과 동물과 식물은 물론이요 광물까지 접속한다. 만인과 만물이 활물(活物)로써 소통한다. 만물의 영물(靈物)화, 물질개벽의 특이점을 돌파한다.
장차 생물과 미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마저 희미해 질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분단체제가 허물어진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기반이 통으로 허물어진다. 만민평등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 만물평등, 제물평등만이 오롯하다. 나의 마음 됨됨이와 남의 마음 씀씀이가 일파만파, 실시간으로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죄와 벌의 시간차가 초 단위로 축소된다. 인과응보의 순환 또한 전생과 후생으로 갈리지 않게 된다. 신속하고도 광범위한 업보의 네트워크가 여여하게 펼쳐진다. 양심과 욕심이 전천후로 전방위로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고로 천상에도 천하에도 유아독존 할 수가 없다. 근대적 주체의 죽음, 포스트휴먼이고 트랜스휴먼이다. 에고를 다스려 슈퍼에고로 거듭나야 한다. 헛나에 휘둘리지 말고 참나를 갈고 닦아야 한다. 소아에서 대아로 거듭나야 한다. 몰아를 연마하고 무아를 단련하야 진아에 도달해야 한다. 자아와 자유와 자연을 합일시켜야 한다. 일천년 전 가라사대, 천인합일이라 하셨다. 일백년 전 가로되,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 하였다.
더 이상 이성만으로는 인간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인공이 인간을 월등하게 앞지른다. 인간지능은 인공지능에 백전백패, 단 일승도 거두기 힘들어진다. 격차는 나날이 벌어질 것이다. 족탈불급, 비교불가하다. 이성과 이성의 네트워크, 집합지성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성적 인간은 백세 인생의 잉여로 전락할 것이다. 서둘러 사람의 근간을 재정립해야 한다. 논리와 합리보다 성리와 도리가 더 중요해진다. 무릇 천리를 배우고 익혀서 성리를 밝히고 도리를 다하는 것이 사람의 길이었다. 사람은 나면서 이미 사람으로 존재하되, 돌아가는 순간까지 영원히 사람이 되어가야 할 숙명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다운 사람 되기가 인류의 숙제가 된다. 노동자와 소비자를 넘어서는 존재, 참사람 되기가 영구혁명=천명이 된다.
새로운, 색다른 견해도 아니다. 150년 전 이르되 "인내천"(人乃天), 사람 안의 하늘을 발굴하고 한울을 발현하는 것이 평생의 학습이라 했다. 공자는 일흔이 되어서야 천성을 닮은 인성,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제는 범인들에게도 30년이나 더 긴 세월이 덤으로 주어진다. 미숙한 사람에서 완숙한 사람으로, 설익은 인간에서 무르익은 인간으로, 홍익인간에 육박해 가야 한다. 인권을 앞세우기보다 인륜을 다해야 한다. 누리기보다는 모시고 섬겨야 한다. 하늘 아래, 땅 위에, 공손하고 겸허해야 한다. 장차 지구의 운명은 오롯이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세상만사 사람 책임이다. 그러한 정신개벽, 의식의 빅뱅이 수반되지 못하면 사피엔스는 정보사회의 숙주로 전락한다. 임포메이션과 데이터로 강등된다. 산업화 시대에는 노동의 소외를 고민했다. 정보화 시대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소외되는 백척간두에 처하게 된다. 노동의 해방보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탈노동 속도가 더욱 빠르다. 깨어나야 한다. 깨우쳐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생생하게 생각하고, 생생으로 생활해야 한다. 선업은 더하고 악업은 덜어내는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
노동은 부차적이다. 생명을 묵상하는 생각이야말로 근본적이고 근원적이다. 생명을 생각하는 되먹임과 되새김이야말로 인간의 생활이자 생업인 것이다. 물질세계는 더더욱 복잡해 질 것이다. 복합계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 의식은 더더욱 집중도가 높아져야 한다. 얼의 완성도를 고취시켜야 한다.
앎의 대상 또한 외부에서 내면으로 반전시켜야 한다. 최첨단 과학은 사람과학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뜻하지 않는다. 수심정기(守心正氣), 수련학을 말한다. 문헌학과 서재학에서 수양학과 수도학로 진화한다.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만인이 주인 되는 초기 민주화 시대를 지나서 지상과 천상의 변증법, 만민이 주님 되는 후기 민주화 시대로 진화한다. 만인이 주인이자 주님으로 주권자가 된다함은 공소한 레토릭이 아니다. 만인이 만물과 접속함으로써 모두가 왕년의 황제와 천자의 권능만큼 파급력을 미치게 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함도 옛말이다. 글로벌 네트워크, 이제는 독배가 될 수도 있다. 일인이 욕심을 내고 흑심을 부리면 일사천리 지구적 영향을 미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발상 또한 철지난 격언이다. 아랫물과 윗물을 나눌 수가 없다. 모두가 맑아지고 전부가 밝아져야 한다. 고로 선천시대, 지배층을 도덕적으로 훈육시켰던 원리 또한 만인들에게 전면적으로 개방되어야 한다. 만인이 성인(聖人)이 되고, 만민이 천민(天民)이 되어야 한다. 만인이 갈고 닦지 않으면 후기 민주, 후천개벽의 때가 오더라도 만개하지 못한다. 후천세계의 촛불을 밝히고 기운만 지피다 스르르 사라져 버린다. 후기민주 시대가 오고 있음에도, 혹은 이미 왔음에도 초기민주에 길들여지고 선천세계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후천개벽의 사명을 받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의 문법도 달라져야 하겠다. 지리가 동/서로 나뉘지 않듯이 천리 또한 성/속으로 가름할 수 없게 된다. 세속화에서 탈세속화로 재영성화로, 성과 속이 하나로 융합된다. 이성과 영성이 합류한다. 혼/백과 영/육이 공진화한다. 원시반본 천지회복(原始反本 天地回復), 천상의 신학과 지상의 법학을 회통시키는 천지의 동학(東學)도 되살아난다. 지난 백년, 법가의 득세가 저물어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규율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를 규정했던 법학은 사후적 대처이다. 만인과 만물이 전면적이고 즉각적으로 소통하는 신시대에는 사후 약방문, 뒷북이 되기 십상이다. 영토에 고정되고 국가에 귀속되는 법학으로부터, 하늘과 땅과 사람을 모시고 살리는 동학으로 반전시켜야 한다. 정과 성으로 남을 모시고 님을 섬겨야 한다. 제물평등과 경천애인, '정치적 영성'을 일깨워야 한다. 깨뜨림과 깨우침과 깨달음의 공진화, 정신의 개벽이다.
4. 다시 개벽파
개벽파가 일어나야 한다. 개벽파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개화파만 있던 것이 아니다. 마주 편에 척사파만 있던 것도 아니다. 개화 대 척사, 프레임을 바꾸어야 한다. 지난 백년의 적폐이다. 승자가 쓴 역사이다. 승리한 개화파가 힘으로 쓴 역사이다. 척사파를 나무람으로써 정당성을 구하고 정체성을 취했다. 뜻으로 본 역사를 써야 한다. 개벽파야말로 역사의 주체였다. 줄기차게 옹골차게 변화와 변혁을 추동했다. 1860년 동학의 창도야말로 새 시대의 개막, 개벽의 태동이었다. 낡고 묵은 조선의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다운 새 나라'를 표방했다. 유학국가에서 동학국가로의 환골탈태, 신시대의 신문명 개벽천하(開闢天下)를 창안한 것이다.
고로 1876년 강화도조약이 근대의 출발점이 아니었다. 개항기니 개화기니 시대인식 또한 진부한 개념이다. 서구적 근대를 표준으로 삼아 외부의 충격을 도드라지게 강조하는 편향되고 편벽된 사관이다. 1860년 이후 '개벽기'야말로 19세기의 올바른 이름, 정명(正名)일 것이다. 유학국가를 고집하는 척사파도 서학국가를 맹종하는 개화파도 지배계층의 보/혁 갈등에 그쳤을 따름이다. 동학국가를 표방하는 개벽파야말로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민주주의의 첫 깃발을 휘날린 것이다. 동방적 민주화의 원형이자 영성적 근대화의 원조였다. '새 정치'의 마르지 않는 샘, 원천이었다. 1987년 민주화 전후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고민했다면, 2017년 촛불혁명 이후로는 <개벽 전후사의 인식>을 궁리해야 하겠다. 지난 150년의 역사를 '개벽사'(開闢史)로서 고쳐 써야 할 것이다. 다시 개벽의 환생을 재촉하고 촉발하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학술로만 그칠 일도 아니다. 사회운동가로서 개벽파의 불씨를 되살리고 재점화하는 실천 활동에 매진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서구적 근대를 반복하고 변주하는 양대 세력, 개화좌파(진보)와 개화우파(보수)가 '더불어한국당'으로써 지루하게 경합하는 구시대와 구체제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토착적 근대의 회생과 창생을 꾀하는 신시대와 신문명의 새 물결, 개벽의 파도를 일으키고 싶다. 그것이 내 나름의 '적폐 청산' 과업이다.
20세기 전반기 탈식민운동은 동학/개벽파가 전위에 섰다. 천도교, 원불교, 증산교, 대종교 등이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었다. 1948년 분단정부 수립과 1950년 한국전쟁은 개벽파에 찬물을 끼얹는다. 미/소가 주도하는 냉전체제에 깊숙이 말려듦으로써 남/북 분단, 좌/우 갈등이 전면에 도드라졌다. 고로 20세기 후반 탈분단, 탈냉전 운동에는 개화파가 맹위를 떨쳤다.
개화우파(자유주의)와 개화좌파(사회주의)가 민주화를 주도하는 사이, 개벽파는 수줍게 후방 지원에 머물렀다. 2019년 3.1 100주년을 기점으로 다시 한 번 개화와 개벽의 대합장-대합창을 도모할 만하다.
조급할 것도 없다. 100년 전과는 시세가 달라졌다. 개벽파를 좌초시켰던 지난 120년, 서세동점 또한 끝물이다. 최후의 서세 미국도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동/서가 재균형을 찾아간다. 구대륙과 신대륙도 균형을 맞추어간다. 앞으로 30년, 한 세대를 내다보면서 착실하게 진지전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개벽파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파하는 매체부터 필요하다. 다음은 학당을 세워야 한다. 대안적 학술과 교육으로 새 학파를 일구어야 한다. 그래야 새 사상에 기초한 새 정파, 새 정당도 출범시킬 수 있다. 2045년, 해방 100주년 언저리에는 개벽파가 여당이 되고 주류가 되는 후천세계의 원을 크게 그려보는 것이다. 통일헌법 또한 응당 동서고금을 회통한 신동학에 기초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서구파와 동구파에 주눅 들지 않는 토착파의 기개로써 나라다운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다.
(개벽의 성소, 미륵 마을 익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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