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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北이 한국 정부 '원칙'에 굴복? 국제정세를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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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세현 "北이 한국 정부 '원칙'에 굴복? 국제정세를 봐야" [정세현의 정세토크]<70>"美 '북한 선조치' 요구, 비핵화 회피 위한 것일 수도"
남북관계가 미약하나마 회생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남북은 지난 14일 개성공단 가동 재개에 합의했고, 23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 회담도 열었다. 시기를 언제로 할 것이냐를 두고 이견을 조정 중이지만,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당국 간 회담을 열자는 원칙에도 동의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6개월과 맞물려 나온 이런 기류는 곧 박근혜 정부의 '원칙 있는 대북정책'의 성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취임 6개월을 맞아 이뤄진 여론조사에서, 상당수 국민은 박 대통령이 가장 잘 한 분야로 대북관계를 꼽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관계 전문가인 정세현 원광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은 더 크고 넓게 보기를 주문한다. 남북관계는 남북 양자 사이의 문제일 뿐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대 강국 등 국제관계 전반을 시야에 넣고 봐야 정확한 흐름을 짚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 전 장관은 23일 서울 마포구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북측이 단순히 남측의 '원칙'에 순응·굴복하는 차원이 아니라 북미대화로 건너가기 위해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이와 관련해 정 전 장관은 최근 중국 국방부장이 미국을 방문해 북핵 해결을 위한 북미 대화를 주문하면서 '북한이 3자 또는 4자회담에 응할 뜻이 있다'고 밝힌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짚었다. 미중관계의 최대 골칫거리 중 하나인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과 북한은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으며, 남북관계 개선도 이같은 정세 흐름 속의 한 맥락이라는 것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그러나 미국이 북한에 대해 선행동론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이는 "'비핵화' 대신 '비확산'으로 가려는 고도의 위장전략"일 수 있다면서, 박근혜정부는 미국 정부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기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북핵정책을 조율하고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 선행동론을 고집할 경우 협상 재개가 늦어질 가능성이 있는 데다, 미국은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해도 북핵을 빌미로 대중 군사 포위를 추진할 수 있는 반면, 그 기간동안 북한의 핵능력은 계속 커져 결국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한국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한편 정 전 장관은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이명박정부의 '비핵개방 3000'과는 순서가 완전히 다르다. '햇볕정책 0.9' 정도 된다. 아쉬운 점이 있어서 1.0까지는 아니다"고 평가해 눈길을 끌었다. 본인이 햇볕정책의 실행자였던 정 전 장관의 말인 만큼 결코 박한 평은 아니다.

그는 이런 평가의 이유에 대해 햇볕정책과 마찬가지로 '인도적 문제와 경제 협력을 우선하고 정치적인 논의는 시간을 두고 진행한다'는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정치적 상황과 경협 사업을 분리하고,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를 병행적으로 풀어가려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종합적으로 그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 문제 해결 의지에 대해 "기대해볼 만한 것 같다"는 평을 내렸다.

다음은 지난 23일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이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편집자>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파국으로 치닫던 남북관계가 기사회생하는 듯 보입니다. 보름 전만 해도 '개성공단 폐쇄'까지 거론될 정도로 남북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이렇게 상황이 반전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정부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 있는 대북관계'의 성과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기도 합니다만...

정세현 : 정부에서 일을 하다 보면, 대개 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의 홍보 차원에서 정책과 관련된 모든 사안을 그 정책의 결과라고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고 그걸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민주당 정부 시절) 우리도 해 봤던 '짓'들이니까요. (웃음) 때문에 정부는 최근 남북관계가 호전되는 것을 우리 정부가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보기 쉬운데, 전체적인 국제 판세를 봐야 합니다. 북측이 단순히 남측의 '원칙'에 순응·굴복하는 차원이 아니라 북미대화로 건너가기 위해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모양새를 갖추는 게 아닌가 합니다.

개성공단과 관련해서, 북측이 유연하게 나옴으로써 문제가 풀리지 않았습니까? (7월 25일) 6차 실무회담까지 북측은 똑같은 소리를 하다가 8월 14일 7차 회담으로 넘어가면서 입장이 조금 유연해졌고, 그렇게 되니 우리도 '북한이 그렇게까지 나오는데 6차 회담 때까지의 입장을 고수할 수 있겠나'라며 한 발씩 양보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북한이 7차 회담 제의에 호응한 것이 8월 7일이니 1주일 사이에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합의를 했어요.

얼른 보기에는 개성공단이 북한의 '달러 박스'이고, 돈 때문에 개성공단 가동 재개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물론 돈이 들어올 수 있으면 좋겠죠. 5만4000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의 일자리 문제도 북한 당국으로서는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북한 내부의 경제적 사정, 수요 때문에만 변화하는 건 아닙니다. 국제 정세에도 영향을 많이 받아요. 북한이 회담 제의를 받기 전,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에 북한과 중국 사이에 긴밀한 협의 내지 조율이 있었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이 창완취안(常萬全) 중국 국방부장의 방미입니다. 중국이 공개적으로 미국에 대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촉구한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지난 6월 말, 7월 초에 북한 김계관 외무성 1부상이 중국과 러시아를 잇달아 방문하면서 바쁘게 움직인 적이 있어요. 그에 앞서서는 5월 22일 최룡해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이 베이징(北京)에 가서 '6자회담을 비롯한 모든 형식의 대화에 나갈 용의가 있다'고 했죠.

북한은 미국과도 접촉을 적극 시도했으나 미국은 일체 반응을 안 보였습니다. 한국 정부가 개성공단 문제 때문에 '원칙'이라는 이름 아래 대북관계를 냉랭한 분위기로 끌고 가는 상황에서 미국이 나설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중국은 지난 6월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미국에 가서 '신형 대국관계' 수립을 얘기해 놓은 마당에 미중 간 가장 껄끄러운 문제인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북한으로 하여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미국이 북핵 문제 해결에 나올 수 있도록 끌어낼 필요가 있었겠죠.

여기서 잠깐 살펴볼 것은 미국과 중국 가운데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누가 더 적극적으로 바라느냐인데, 저는 중국이라고 봅니다. 왜냐, 한반도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는 한 미국은 북핵을 빌미로 한반도 지역이나 일본에 미사일방어(MD) 체제를 배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북한을 넘어 중국으로 날아갈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불리해지게 됩니다. 반면 미국으로서는 핵 문제가 '비핵화'가 아닌 '비확산'으로 간다면 (한·일에) MD도 팔 수 있고, 중국을 압박할 수 있습니다.

미중 모두 그런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신형 대국관계'를 수립해 나가는 데 있어서 북핵은 중국의 약점입니다. (MD 등)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고, 미국으로부터 자꾸 '북핵 문제 해결하라'는 주문을 받는 상황을 피하자는 겁니다. 그러니 중국은 북한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라. 그래야 우리가 나서서 북미대화도 성사시킬 것 아니냐'고 했을 것입니다. 북한으로서도 그게 중국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든 뭐든 간에 중국이 북미대화도 성사시켜 주고, 정전 60주년을 맞아 평화체제까지 실현될 상황이 조성된다면 나쁠 게 없죠. 오히려 바라던 바일 겁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중국 창완취안 부장이 수전 라이스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북한 지도부는 3자 또는 4자 다자회담에 응할 용의가 있다"는 표현을 했다는 점입니다. 최룡해나 김계관은 6자회담을 얘기하면서 돌아다녔는데, 창완취안이 얘기한 4자는 의미가 다릅니다. 6자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거라면, 3자·4자회담은 곧 평화체제 논의의 장이고 한반도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상태의 종식과 관련된 회담입니다. 1953년 7.27 정전협정에 나온 3자는 북한·미국·중국이지만, 2006년 11월 하노이에서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당신과 내가 김정일을 만나 한국전쟁의 공식적 종료 선언을 추진하자'고 말한 바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또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면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뜻을 전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관련기사 보기) 이후 같은 해 발표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0.4 정상선언의 4항에는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3자 또는 4자 회담'이라는 창완취안 부장의 말은, 단순히 북한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한미 간 논의를 거쳐 남북 간에도 합의됐던 포뮬러(공식)라는 거죠. 북중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에 창완취안 부장이 그런 얘기를 했을 것이고, 미국도 겉으로는 '북한이 먼저 성의 있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뭘 하라는 얘기가 없었다는 점에서 언제든지 올릴 수 있는 차단봉으로 보입니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의 북한 인국을 받아들이는 정도만 해도 '그 정도면 성의 있다'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중국이 이처럼 서둘러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관계 개선에 나서게 하고 그 성과로 미국을 압박해 북미대화를 성사시키려는 것은 더 이상 MD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해서 중국의 국가이익을 도모하려는 큰 판세 속에 있습니다. 중국이 최근 들어 '태평양은 미중 두 나라가 쓰기에 충분히 넓다'면서 사실상 태평양을 반분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미국의 대중(對中) 포위망을 풀려는 것인데, 그 핵심 포인트가 북한입니다. 서쪽으로 인도, 파키스탄, 베트남까지는 미국이 자기 편으로 만들어 놨고, 북핵 문제를 기화로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려고 하고 있죠. 이걸 돌파하기 위해 중국이 '3자회담이든 4자회담이든 하자'면서 미국보고 나서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겉으로만 보면 북한이 돈 때문에 급해서, 또는 한국 정부의 '원칙 있는 대북정책'이 통해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같은 북중 간의 국제적 이해관계 일치가 북한을 더 적극적이고 유연하게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만약 미국이 북한·중국이 내민 손을 잡지 않는다면 결국 의미 있는 정세의 변화는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정세현 :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 박근혜 정부는 적극적인 남북관계 개선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미국입니다. 지금 미국의 '아시아로의 귀환'정책은 결국 중국 견제론이거든요. 미국 입장에서 중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게 더 좋습니다. 게다가 전시작전권 환수 연기까지 거론되고 있는 마당이니 미국은 나쁠 게 없죠. 미국의 본심이 뭐냐가 중요한데, 공식적으로는 '비핵화'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 속마음은 '비확산' 쪽인 것 같습니다.

우리 정부가 적극 나서서, 미국이 비핵화 쪽으로 가도록 요구하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 나가야만 합니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을 앞세워 미국을 끌고 나가야지 미국을 뒤띠리 가려고 하다가. '비확산' 상황으로 끝나면 한국은 앞으로 정말 어려워집니다. 6자회담이 지금 당장 열린다 해도 2008년 이후 5년 만입니다. 그 5년 동안 북한의 핵능력은 더 커졌다고 봐야 해요. 2009년과 올해, 그 사이 핵실험을 2번이나 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핵능력이 커진 북한을 상대로 협상을 하려면 미국이나 한국이 준비해야 할 반대급부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에 자꾸 시간을 주면 절대 안 돼요. 북한에게 시간을 주면 그만큼 우리 입지가 약해집니다.

지금까지 북핵회담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했다, '도로아미타불'식이었다는 이유로 새로 북핵회담을 시작하려면 북한의 선행동 선조치가 필요하다는 요구를 하는데 언뜻보면 그게 말이 되는 것 같아 보일겁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참 어리석은 짓입니다. 왜냐? 그 사이에 시간이 자꾸 가지 않습니까? 북한이 핵능력을 키워온 건 이런저런 이유와 구실로 회담이 열리지 않은 기간 중이었습니다. 북한을 '악의 축' '불량국가'라고 딱지를 부치면서 그런 북한에게 시간을 주면 어떡합니까? 이제는 북한의 선조치론. 선행동론이 '비핵화' 대신 '비확산'으로 가려는 고도의 위장전략이라는 의심도 해보면서 북핵정책을 조율하고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의 선(先)행동을 요구하면서 시간이 흘러가도록 놔두면 우리는 그만큼 점점 불리한 입장에 빠지게 됩니다. 그걸 정부와 국민들이 알아야 합니다. 북한에 대해 압박도 소용이 없었고, 제재를 하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지금 북한이 뭐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습니까? 별 거 없어요. 북중관계라는 뒷문을 통해 할 짓은 다 하고 있습니다.

북한 경제도 별 타격이 없어 보입니다. 개성과 금강산에서 한국의 달러가 못 들어가니 북한이 굉장히 힘들 것 같지만, 그렇게 달러 한 푼 안 갔을 때 핵실험을 2번이나 했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북한은 죽는다'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유엔의 제재가 유효한데도 북한의 핵능력은 커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하고, 제재 만능론이나 선핵폐기론 같은 것에 홀리지 말아야 합니다.

"박근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햇볕정책 ver. 0.9 정도는 된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아직 금강산 관광 재개 회담에 대해 남북이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는 있지만 남북관계가 다소 풀리면서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정책이 가동을 시작하지 않았나 하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뢰 프로세스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정세현 : 우선 시간적으로 류길재 통일장관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관련 정책 간담회를 연 시점이 지난 21일, 개성공단 문제가 어느 정도 풀린 이후라는 것이 주목할 대목입니다. 누차 얘기하지만, 신뢰 프로세스의 입구는 개성공단입니다. 개성공단 정상화 전망이 분명해지면서 공단 입주기업들의 시설점검을 위한 방북 바로 전날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설명을 내놨다는 것을 보면, 정부도 전반적으로 남북관계가 잘 풀려 나갈 것으로 보고 있다, 또는 그럴 준비가 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이번의 남북 간 개성공단 재개 합의에서 중시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정경 분리 원칙에 입각해 어떤 상황에서도 공단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고 한 부분입니다. 이는 남북 경협사업에서의 정경분리 원칙을 확립한 것이고, 신뢰 프로세스 전반에도 적용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잘 된 일입니다. 언론을 통해 발표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정책을 보니, '햇볕정책 0.9'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평가한다면 박근혜 정부 쪽에서는 기분 나빠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요. (웃음)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그렇게 평가하십니까?

정세현 : 우선 첫째, 대북정책을 큰 틀에서 보면 결국 '강풍정책' 아니면 '햇볕정책'밖에 없습니다. 박정희 정부 이후로 보면 노태우·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은 햇볕정책으로, 전두환·김영삼·이명박 정부 시절은 '강풍정책'으로 봐야 합니다. 박정희 정부 시기는 '대치 중의 암중모색' 상태였기 때문에 강풍 또는 햇볕으로 분류하기는 좀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대북정책인 '비핵·개방·3000'과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정확히 순서가 반대입니다. '비핵·개방·3000'이란 건, 북한이 먼저 비핵화를 하고 개방을 하면 국민소득 3000달러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는 교류협력을 통해 신뢰를 쌓아 가면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겠다는 겁니다. '남북관계를 핵 문제와 직접적으로 긴밀히 연계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고 비핵화는 도외시하고 남북관계만 갈 수도 없다'는 것이니 사실상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를 병행하는 정책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죠. 남북관계를 북핵 상황의 종속 변수로 삼지 않겠다고 한 점에서 이명박 정부와는 분명히 화살표의 방향이 다릅니다.

또 정부는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해 가면서 교류협력을 통해 신뢰를 쌓아서 먼저 경제공동체를 만들고 이후 정치 통합을 하겠다고 얘기하고 있죠. 이것도 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과는 다릅니다. 이명박 정부는 '평화공동체->경제공동체->민족공동체'라는 순서를 잡았었습니다. 비핵·개방·3000의 연장선상인 것이죠. 먼저 북한이 핵을 포기해서 '평화 공동체'가 해결되면 우리가 북한을 3000달러까지 끌어올려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 주고, 다음에 '민족 공동체'인 통일 국가로 가겠다는 겁니다. 그때 '이것 참 순서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는데,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는 순서가 맞습니다. 햇볕정책의 제일 큰 정책추진 방침이 바로 '선경후정(先經後政)'이거든요. 경제를 앞세워 정치상황까지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게 맞는 것이죠.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21일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설명을 위한 내외신 기자간담회에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겠다"며 "작은 통일(경제공동체)에서 시작하여 큰 통일(정치통합)을 지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편집자>)

선경후정 원칙은 유럽의 통합과 독일 통일을 통해서도 그 방식이 옳다는 게 증명됐습니다.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발표 이후 서독은 동독에 대한 경제지원을 20년 이상 계속했고 그 끝에 통일을 하게 됩니다. 유럽연합(EU)도 유럽경제공동체(EEC)로부터 시작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서 경제공동체를 먼저 하고 정치통합으로 나가는 방식으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전적으로 계승한다는 것은 맞는 얘기일뿐더러 우리 현실에서 그것 말고는 대안이 없습니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89년 이홍구 통일부 장관이 발표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이명박 정부를 빼고는 역대 모든 정부의 통일방안으로 계승돼 왔습니다. 경제적 교류협력을 통해 남북 상호 간 경제적 의존도가 커지도록 해서 정치통합까지 간다는 것은 이 통일방안에서 나온 순서이고, 이는 남북관계의 현실에 맞는 방안입니다. 그러나 이 방안을 당장 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남북관계부터 발전시키겠다는 것이 이른바 햇볕정책입니다.

또 류 장관이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 간의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며 나아가서 통일기반을 구축한다"고 설명했는데, 튼튼한 안보를 토대로 남북관계를 발전시킨다는 것은 햇볕정책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리고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다만 구체적 이행 문제는 국민적 합의와 안보 상황을 고려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는데, 이런 단서는 큰 의미가 없고 '존중한다'고 한 것만 해도 이명박 정부에 비하면 상당한 진전입니다. 6.15와 10.4라는 게 바로 햇볕정책의 상징들 아닙니까.

그리고 단서 부분과 관련해서 말인데, 사실 남북 간의 합의를 자구(字句) 하나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이행한다는 것은 교조주의적인 요구입니다. 6.15 선언은 벌써 13년 전, 10.4 선언은 6년 전에 합의한 거예요. 그 합의의 정신은 존중할 수 있어도 구체적인 내용은 현실에 맞게 조정하고 조율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레시안 : 하지만 결국 정책의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나 국가정보원장 등 외교안보 분야 핵심 당국자들이 군 출신 강경파라는 점에서 구체적인 정책 실행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을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습니다.

정세현 : 현재 국정원장이나 안보실장이 군 출신 강경파라서 남북관계가 잘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건 기우가 아닌가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미중관계 등 국제적인 판세에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이라면 군인 출신 대통령들은 남북관계 개선을 이룰 수 없었을 것 아닙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도 1970년대 초의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남북 대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바뀌고 있는데, 대화를 통해 북한의 의도를 파악해야 국가 안보를 챙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1971년 8월 남북 적십자 회담을 제의하고 이듬해인 72년 7월 4일에는 7.4남북공동성명에도 합의한 것이죠. 국가 지도자는 늘 이렇게 국제 정세의 흐름 속에서 정책을 선택하는 것이고, 참모들도 거기에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이제 정세가 긴장 완화 쪽으로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는데 군장성 출신들이라고 해서 그것을 한사코 막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역사의 흐름은 잠시 지체시킬 수는 있어도 끝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5.24 조치, 허공에 뜬 채로 남을 것"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앞으로 남북관계가 풀려 가는지 판단할 시금석은 아무래도 금강산 관광 재개 여부와 5.24 조치의 해제 여부가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정세현 : 개성공단은 원래 5.24 조치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또 류길재 장관은 금강산 관광 재개도 진상규명, 재발방지, 관광객 신변안전 보장이라는 3대 조건만 해결되면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습니다. 이 3대 조건은 북한에서도 쉽게 해줄 수 있습니다. 북한이 작심하면 금강산 문제는 고비를 넘어간다고 봐야 하고, 정부도 장관이 직접 "어렵지 않다"고 한 마당이니 3대 조건만 해결되면 재개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5.24 조치는 허공에 뜬 원칙으로 남을 겁니다.

이 정부에서 5.24 조치 무효화를 선언하긴 어려울 것이니 그대로 놔두되 (남북관계는) 그냥 가는 거죠. 공식적으로 '없애겠다'고 못 할 뿐입니다. 또 개성공단 입주 기업을 조금씩 늘려 가는 문제는 개성공단 공동위원회를 통해 5.24 조치와는 무관하게 조금씩은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임금 저지대라는 경쟁력을 가진 개성공단에 중소기업들이 들어가는 것까지 막을 필요는 없겠죠.

프레시안 :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드디어 가동되기 시작했고, 한 번 기대해볼 만하다고 봐도 될까요?

정세현 : 그렇습니다만 몇 가지가 모자랍니다. 앞서 말한 '선경후정' 외에 햇볕정책의 또다른 원칙이 '선민후관(先民後官)', '선공후득(先供後得)'인데 이 지점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생각이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햇볕정책 1.0까지는 아니고 0.9입니다. (웃음)

선민후관이란, 민간으로 하여금 먼저 나서도록 해야 더 빠른 북한의 변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관(官)이 먼저 앞서야 한다'는 입장을 굳히고 있고 민간을 앞세울 준비는 안 돼 있는 것 같습니다. 관이 먼저 나서서 판을 짜놓고 민간이 거기 따라가는 식으로 한다면 그만큼 북한이 변화하는 속도는 늦어질 것입니다.

(친박계 핵심인 새누리당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는 지난달 7일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이 정부의 회담 제의를 수용한 데 대해 "박근혜 정부의 '선 당국, 후 민간'의 전략이 주효했다"고 평가했었다. 또 정부는 앞서 북측이 6.15 기념 공동행사를 위해 남북 간 민간 접촉을 갖자고 제안한 데 대해 '당국 회담이 먼저'라며 일축했었다. <편집자>)

또 '선공후득'은 먼저 주고 나중에 그 결실을 거둔다는 것인데, '퍼주기'라는 비난을 우려해서인지 박근혜 정부는 엄격한 상호주의를 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첫 술에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남북관계는 상대가 있는 문제이니, 북한이 좀더 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더 잘될 수도 있겠죠.

프레시안 : 이제까지 하는 것으로 보면, 박근혜 정부가 대북정책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추진하고 있다고 판단하시는 쪽이신가요?

정세현 : 뭐, 할 만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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