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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기쁨도 잠시…제주에는 4.3광풍이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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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기쁨도 잠시…제주에는 4.3광풍이 몰아쳤다 [언론 네트워크] 생존수형인 4.3을 말하다 ③ 변연옥 할머니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 군법회의를 통해 민간인들이 전국의 교도소로 끌려갔다. 수형인명부로 확인된 인원만 2530명에 이른다. 생존수형인 18명이 70년 만에 재심 청구에 나서면서 사실상 무죄에 해당하는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졌다. 사법부가 군법회의의 부당성을 인정한 역사적 결정이었다. [제주의소리]는 창간 15주년을 맞아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전국 각지에 거주하고 있는 생존수형인을 만나 당시 처참했던 4.3의 실상을 전한다. [편집자주]

▲ 경기도 안양에서 만난 변연옥(91) 할머니가 4.3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출신인 변 할머니는 4.3당시 평소 알고 지내던 동네 언니를 따라 나섰다 경찰에 붙잡혀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제주의소리(김정호)

경기도 안양시의 한 주택. 문이 열리자 변연옥(91) 할머니가 두 손을 맞잡으며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손아귀의 힘이 어찌나 세던지 거칠고 주름진 7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향 얘기를 꺼내더니 느닷없이 나이 정리부터 했다. 올해로 아흔 한 살이지만 호적에 3년 늦게 올라가 실제는 1926년생, 아흔 네 살이라고 강조했다.

변 할머니의 고향은 알뜨르비행장이 위치한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다. 당시 신도1구에서 8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야학을 다니던 오빠가 있었지만 어릴 적 일본으로 간 후 연락이 끊겼다.

아버지가 소를 사고파는 장사를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부모님이 돈을 열심히 모아 신도 한길(큰길)에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를 갖춘 집도 마련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에게 군사훈련을 받으며 지냈다. 훈련 없는 날에는 어김없이 밭으로 향했다. 친구들이 있었지만 놀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검질(김) 매는 것이 일상이었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자, 친구들과 동네를 돌아다니며 만세삼창을 외쳤다. 당시 변 할머니의 나이는 20세였다.

▲ 변연옥(91) 할머니가 4.3사건 당시 산에 올라가 홀로 병과 싸우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한국전쟁후 북으로 올라가 만난 남편과 찍은 가족사진이다. ⓒ제주의소리(김정호)

기쁨도 잠시. 4.3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조용하던 마을이 쑥대밭으로 변했다. 평소 알고 지낸 한 언니를 따라나선 길이 길고긴 70년의 굴곡진 세월이 될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해방 직후 전국적으로 민간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1948년 어느 가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바람을 쐬는 변 할머니를 향해 그 언니가 손을 내밀었다.

어딘가 가자고 했다. 무턱대고 따라 나선 길은 무릉리 인근의 소낭(소나무)으로 둘러싸인 한 궤(굴)였다. 인민위원회 소속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군경의 초토화작전이 본격화 되면서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 산 속으로 숨기 시작했다. 소개령으로 마을이 불타고 총성이 오가면서 원치 않던 산속 생활은 계속됐다.

설상가상 변 할머니는 그곳에서 열병으로 불리는 장티푸스에 감염돼 생사를 넘나들었다. 피난 무리에서조차 낙오되자 돌트멍(구멍)에 숨어 홀로 열흘간 열병을 이겨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변 할머니는 사람들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 사이 산에서 내려오라는 방송은 온 산에 울려 퍼졌다. 계절은 겨울을 넘어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 변연옥(91) 할머니는 4.3사건 당시 산으로 올라갔다 열병으로 불리는 장티푸스에 감염돼 생사를 넘나들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변 할머니는 마을로 내려온 직후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제주의소리(김정호)

산에서 만난 여성들을 따라 마을로 내려오니 경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두 손은 전깃줄에 감겼다. 순간 찌릿찌릿한 느낌이 온 몸을 자극했다. 전기 고문이었다.

"빨갱이니 뭐니 하면서 고문을 하는 거야. 경찰이 죄 없는 사람을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냐고 죽도록 소리를 질러댔지. 언니 따라 산에 올라간 얘기를 하니 나중에는 풀어주더라고."

해를 넘겨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은 다시 반복됐다. 밭에서 검질 매고 보리를 베며 집안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예고 없이 경찰이 다시 찾아와 차량에 태웠다. 사람들을 태운 트럭은 쉬지 않고 제주시로 향했다. 조사도 고문도 없이 곧바로 불법적인 군사재판이 이어졌다.

변 할머니는 영문도 모른 채 목선에 올랐다. 도착한 곳은 전주형무소였다. 징역 3년이라는 얘기도 그 곳에서 들었다. 얼마 후 변 할머니는 화차에 올라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이듬해인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형무소 문이 열렸다. 인민군들은 수형인들에게 북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 4.3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변연옥(91) 할머니가 제주도 지도를 보며 고향 위치를 확인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70년 넘게 살아 온 변 할머니는 생전에 4.3추념식 참석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제주의소리(김정호)


"아침부터 문을 부수는 소리가 요란했어. 난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지. 문이 열리더니 마당으로 다 모이게 하는 거야. 거기서 주먹밥을 주더니 줄줄이 북으로 데려갔지."

무리를 따라 걷다보니 평양 대동강에 다다랐다. 황해북도 황주에서 생활하다 다시 남으로 내려왔다. 그 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목숨을 건 피난 생활을 함께했다.

경기도에 터를 잡아 딸 셋을 낳았지만 고향 제주에서 겪은 4.3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딸들도 어머니의 아픈 과거를 묻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2018년 제70주년 4.3추념식에서 제주평화공원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4.3희생자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하자 그때서야 4.3의 실상을 딸에게 조금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작년 4.3추념식, 텔레비전으로 다 봤어. 대통령이 사과 하니까 눈물이 나더라고. 죽기 전에 4.3평화공원에 가보고 싶어. 고향에 까마귀만 봐도 반가울 것 같아. 나 노래나 한 곡할까."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한정무의 '꿈에 본 내 고향')

▲ 경기도 안양에서 만난 변연옥(91) 할머니가 4.3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변 할머니는 죽기 전 재심을 청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제주의소리(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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