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해녀모집 서명에 '빨갱이' 낙인...쫓기듯 고향 등진 60년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해녀모집 서명에 '빨갱이' 낙인...쫓기듯 고향 등진 60년 [언론 네트워크] 생존수형인 4.3을 말하다 ④ 김정추 할머니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 군법회의를 통해 민간인들이 전국의 교도소로 끌려갔다. 수형인명부로 확인된 인원만 2530명에 이른다. 생존수형인 18명이 70년 만에 재심 청구에 나서면서 사실상 무죄에 해당하는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졌다. 사법부가 군법회의의 부당성을 인정한 역사적 결정이었다. [제주의소리]는 창간 15주년을 맞아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전국 각지에 거주하고 있는 생존수형인을 만나 당시 처참했던 4.3의 실상을 전한다. [편집자주]

▲ 만감이 교차했을 터다. 4.3 당시를 떠올리는 일은 그만큼 살아남은 생존수형인들에게 고통의 기억이다. 눈을 지그시 감은 4.3생존수형인 김정추 할머니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1948년 4.3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입 밖으로 내기는 커녕 머릿속으로 떠올리기 조차 꺼려졌던 70년 전 그날의 기억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버렸다. 당차고 자신감 넘쳤던 10대 소녀는 '빨갱이'라는 주홍 낙인을 견딜 수 없어 쫓겨나듯 고향 땅을 등져야만 했다.

"숨 쉬어지니까 살았지. 죽고 싶은 생각도 많이 했어요. 나한테 접근하는 사람도 무섭고, 사람들의 눈길이 무섭고... 잘난 척도 많이 하고 살았지만 기가 팍 죽어버리니까 살고 싶지가 않더라."

지난 1일 4.3해원방사탑제가 열린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만난 김정추 할머니(89). 4월 제주의 따스한 볕을 맞는 것은 꼬박 10년만에 일이다. 제주어보다 60년 세월을 의탁한 경상도 방언이 더 입에 밴 김 할머니에게 고향 제주는 사무치도록 그리웠지만 멀찌감치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던 애증의 땅이었다.

고향인 서귀포시 하효마을에서 나름 이름 난 부잣집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김 할머니는 남 부럽지 않은 유년생활을 보냈다. 마을 친구들과 소소한 이야깃거리를 재잘거리던 것이 추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었다.

▲ 4.3생존수형인 김정추 할머니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1948년 4.3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평화롭던 나날도 잠시, 김 할머니가 열여섯이었던 1947년 별 생각 없이 마주한 해녀 가입 원서는 그녀를 4.3의 광풍으로 몰아 넣었다. '육지에서 물질하게 해주겠다'고 건넨 백지에 친구인 오희춘과 의심 없이 도장을 찍은게 평생의 한이 됐다.

"날 갑자기 죄인으로 찍어 놓고 끌고 가는데 뭐 때문에 끌려갔는지 알 수도 없었어요. 무서워서 물어볼 수도 없었지. 총을 가슴팍에 대고 다짜고짜 '뭐 때문에 가담을 했느냐', '죄를 고하라'고 하는데 내가 뭘 알아야 얘기할거 아니에요. '나는 가담한 적 없다', '죽일테면 죽여봐라' 악을 질렀지."

도장이 찍힌 문서가 남조선노동당 가입문서였다는 것을 알게된 건 경찰 조사를 받고 난 후였다. 졸지에 남로당 간부로 이름이 올라간 김 할머니는 서귀포경찰서로 끌려가 20여일을 지내고, 제주시로 옮겨져 10여일간 더 갇혀 있었다.

1948년 12월 관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징역 1년형. 누구 하나 죄명도,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 길로 전주형무소로 보내졌고 옥살이를 해야 했다. 너무나 억울해 하염없이 눈물만 흐른 날의 연속이었다.

10개월 간의 옥살이 끝에 돌아온 고향도 더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찍힌 '빨갱이'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다.

▲ 4.3생존수형인 김정추 할머니가 1일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열린 4.3해원방사탑제에 참석해 인사를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말은 안하는데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길이 좋지가 않지. 뭐랄까. '그렇게 잘난척을 하더니 꼴 좋다'고 비웃는 듯 했어요. 내가 잘못한 것도 없고, 그런 소리 들을 이유도 없는데... 너무 분한거라."

숨어지내는 것도 분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드러낼 자신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무게였다. 결국 외부와 단절되는 삶을 택했다. 집 안에 틀어박혀 숨 죽이고 지내기를 몇 해. 이대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도망치듯 혈혈단신 부산행 배에 몸을 실었다.

부산에서 은행원인 남편을 만나고 가정을 꾸렸지만, 지독했던 그날의 기억은 가족들에게도 평생 털어놓지 않았다.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있는 제주에도 명절때나 가끔씩 들러 일주일 이상 머물지 않았다.

▲ 4.3생존수형인 김정추 할머니와 오희춘 할머니가 마주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두 할머니는 71년 전 4.3 당시 함께 억울한 수형생활을 겪었다. ⓒ제주의소리

고향 생각이 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그걸 말해 뭣 하나. 난 제주도 사람"이라고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김 할머니는 "설날·추석이면 말 할 것도 없고, 비가 올 때면 성 외곽에서 놀면서 친구들과 오만 얘기하던 생각도 많이 났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저 가슴 속으로만 묻어두려 했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기까지는 소꿉친구이면서 함께 옥에 갇혔던 오희춘 할머니의 도움이 컸다. 오 할머니는 지난 1월 4.3 재심 재판에서 공소기각 판결로 명예를 회복한 4.3생존수형인 중 한 명이다.

"(4.3도민연대에서) 자꾸 사람들이 찾아오겠다고, 당시 얘기해달라고 하는거라. 처음에는 안하겠다고 거절했어요. 이제 폭로해서 거꾸로되면 안되겠다 싶어서 또 전화가 오면 '왜 자꾸 날 쪼으냐', '다시 연락하지 말라'고 매몰차게 거절했지. 그런데 어느 날은 희춘이가 연락이 왔어요. '나도 했는데, 니는 나보다 똑똑한데 가서 말 좀 잘해달라'고 하더라고, 꼭 참석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왔어요."

이날 해원방사탑제에서 또 다른 4.3생존수형인들과 만난 김 할머니는 추후에 진행될 2차 재심 준비에 나선다.

"처음에는 내가 참 싫었어요. 그전에는 날 버리고 살았지. 오늘 와보니까 느끼는게 참 많아요. 제주도민들이 4.3사건에 희생당한 불행한 사람들 명예회복이라도 하려고 이렇게 노력하니까 참 고맙고. 또 나 자신을 알게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얼마 남지 않은 삶이지만 이제부터 나 자신을 살려가면서 살려고 합니다."

▲ 4.3생존수형인 김정추 할머니가 1일 열린 4.3해원방사탑제에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주의소리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