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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인, 제주4.3과 손잡아 달라…미국은 합당한 입장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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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인, 제주4.3과 손잡아 달라…미국은 합당한 입장 밝혀야" [언론 네트워크] 강우일 주교, "제주도민 학살 명령은 미군정" 책임 공론화

"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제주4.3 생존자들, 특히 희생자 유가족들 그리고 제주도민 모두 한 마음이 돼 미국 당국이 어떤 식으로든 그 책임에 합당한 입장을 표명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제주 천주교계의 최고 어른이자, 제주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원로인 강우일 주교(천주교 제주교구장)가 전 세계를 향해 간곡히 당부했다. 세계인들이 모인 뉴욕 UN본부 회의장 안에서, 미국이 4.3책임을 밝히고 국제사회가 4.3의 손을 잡아주길 진심으로 촉구했다.

▲ 미국 뉴욕 현지 시간 20일 UN본부에서 열린 4.3심포지엄에서 강우일 주교가 기조 발표를 하고 있다. 제공=강덕환. ⓒ제주의소리


주UN대한민국대표부(대사 조태열)가 주최하고 제주도, 강창일 국회의원실,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이 공동주관하는 심포지엄이 현지시간 20일 오후 3시(한국시간 21일 새벽 4시) 미국 뉴욕 UN본부에서 열렸다.

'제주4.3의 진실, 책임 그리고 화해'를 주제로 이번 행사는 '세계의 심장' UN본부에서 4.3을 이야기하는 첫 번째 심포지엄이다. 제주, 한국의 여러 단체와 기관이 힘을 합쳤고, 무엇보다 외교부 산하 주 UN대한민국대표부가 주최 기관으로 참여하면서 공신력을 더했다.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미국 단체로는 미국 내 대표적인 인권단체인 세계시민단체연합(CoNGO)과 전환기 정의를 위한 국제센터(ICTJ), 미국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CUSA) 미국장로교회, 미국감리교회 교회와 사회위원회, 한미 외교의 가교 역할을 해온 코리아 소사이어티, 그리고 한인 민주‧인권단체인 북미민주포럼, 뉴욕민권센터 등 미국 내 단체들도 일찌감치 지지 동참했다. 심포지엄 협력단체 수는 국내외 포함 38곳에 달한다.

23선을 자랑하는 찰스 랭글 전 미국 하원의원, 시민단체 전쟁을 넘어선 세계(World Beyond War) 앨리스 슬래터, 한반도연구회(Korean Peninsular Study Group) 조 스피엘먼, 코넬대 스테픈 갈베이 교수, 홋카이도대 요시다 쿠니히코 교수, 로날드 그린버그 변호사, 캐롤린 칼베이 변호사를 비롯해 핀란드‧알제리‧가나‧아프카니스탄‧필리핀 외교관과 유엔 관계자들도 일찍부터 참가 의사를 전해왔고 이날 대부분 참석해 힘을 실었다.

이번 기조 발표에서 강우일 주교는 "유엔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목적은 제주4.3 희생자와 유가족이 지금까지 겪어 온 고통과 희생의 역사를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이런 비인간적인 학살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호소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이며 "세 번째로 우리는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한 맺힌 절규를 전하고, 미군정과 한국정부 당국이 저지른 부당행위를 국제사회에 명명백백히 밝힘으로써 궁극적으로 정의와 책임, 화해를 실현하고자 한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이뤄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고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의미를 강조했다.

강우일 주교는 제주4.3의 피해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이뤄졌음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 정부의 공식보고서에 따르면 1948~1954년 제주에서는 경찰과 군대가 민간인 3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10세 미만 희생자의 비율은 5.8%이고 61세 이상 희생자는 6.1%를 차지한다"며 "젊은 여성들이 당한 성폭행 역시 많은 마을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납치당했다가 집으로 돌아온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에 대해 평생 입을 열지 않았다. 한국전쟁(1950~1953) 발발 직후 여러 형무소에서 수많은 수형인들이 처형됐다. 후일 석방된 일부 생존자들은 평생 동안 경찰의 감시 하에 살아야 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제주4.3은 미국과 한국의 정부당국이 저지른 인권과 인간 생명에 대한 대대적인 위반이자 범죄"라고 정의했다.

강 주교는 미국이 한국전쟁 참전국이자 수십 년 넘는 한국의 우방이지만, 학살 범죄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재차 반복했다.

강 주교는 "미군은 일본 경찰과 군대에 협조했던 한국인을 상당수 채용하기로 결정했고, 오랫동안 해방과 독립을 염원하던 이들은 엄청난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며 "질서 있는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경제정책은 수립하지 않았다. 이전의 경제체제를 폐기함으로써 토지주들과 소수의 부유층이 시장을 마음대로 매점매석할 기회를 줬다"고 해방 이후 미군정의 문제를 지적했다.

학살에 이르는 과정도 마찬가지.

강 주교는 "주민 대부분은 정치 이념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농민이었음에도 미군은 현지 주민들을 그저 좌익으로만 취급했다. 경찰정보부가 제공한 잘못된 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한 미군 지도부는 제주의 모든 좌익 운동을 철저히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며 "이런 정책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에게 그대로 계승됐다. 처형과 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한국경찰과 한국군이었지만, 정책을 수립하고 작전을 수행하도록 명령한 이들은 미군 지도부였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강 주교는 "4.3생존자, 희생자 유가족, 모든 제주도민은 미국 당국이 어떤 식으로든 그 책임에 합당한 입장을 표명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며 "유엔의 다른 회원국들도 보편적 인권을 위한 연대의 표시로 이 잊힌 역사에 대해 관심과 공감을 표명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다"고 촉구했다.

▲ 미국 뉴욕 현지 시간 20일 UN본부에서 열린 4.3심포지엄에서 강우일 주교가 기조 발표를 하고 있다. 제공=강덕환. ⓒ제주의소리

제주4·3 UN 인권 심포지엄
강우일 베드로 주교 / 천주교 제주교구장

저는 오늘 심포지엄에서 제주4.3에 대한 기조연설을 하게 되어 매우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UN에서 발표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지난 70년 동안 제주4.3의 비극으로 고통 받는 제주도민들을 대변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948년 12월 10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는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민족과 국가가 공통되게 추구해야 할 기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선언에는 보편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인간의 기본적 권리가 사상 처음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나치스가 저지른 온갖 잔혹행위들을 목격한 국제사회는 개인의 인권을 명시한 보편적 선언이 필요하다는 합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같은 시기에 한반도 남단 약 100km 지점에 위치한 제주도에서는 경찰과 군대가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역사의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외적으로는 1948년 4월 3일 좌익 무장단체가 제주도 해안가에 위치한 경찰지서 12곳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당시 점령군으로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 지도부는 제주지역 군경에 무자비하게 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후 한국정부가 사건에 대한 조사나 보고, 연구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90% 이상의 한국인은 이 전례 없는 비극에 대해 무려 50년 가까이 모르고 지냈습니다. 2000년이 되어서야 정부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를 공식 발족했고, 2003년에는 관련 보고서가 발간되었습니다. 보고서가 나오자 많은 한국인들은 정부당국이 수많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자행한 경악할 만한 잔혹행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오랫동안 자신들이 겪은 사건을 언급할 수도, 그에 대해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에게조차 어떤 것도 폭로하지 않았고 감히 기억을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가족에게까지 해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제주4.3 희생자와 관련된 이들 중 상당수는 다른 지역 또는 다른 나라로 이주했습니다.

오늘 유엔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목적은 희생자와 유가족이 지금까지 겪어 온 고통과 희생의 역사를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있습니다. 또한 어떤 이유로든 이런 비인간적인 학살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호소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한 맺힌 절규를 전하고, 미군정과 한국정부 당국이 저지른 부당행위를 국제사회에 명명백백히 밝힘으로써 궁극적으로 정의와 책임, 화해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이뤄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역사적 배경

제주4.3은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한 직후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한국이 혼란을 겪던 전환기에 발생한 비극이었습니다. 2003년 3월 29일 발간된 한국정부의 공식보고서에 따르면 1948~1954년 제주에서는 경찰과 군대가 민간인 3만 명 이상을 학살했습니다. 10세 미만 희생자의 비율은 5.8%이고 61세 이상 희생자는 6.1%를 차지합니다. 이 수치는 가해자가 성별과 나이에 구분 없이 무차별 살상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0~30세 희생자의 비율은 35.3%, 11~20세 희생자의 비율은 21.6%로 나타났습니다. 체포 혹은 단기 구속 직후 모든 연령대의 시민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적법한 수사나 재판 절차에 대한 기록은 전무합니다. 젊은 여성들이 당한 성폭행 역시 많은 마을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졌습니다. 납치당했다가 집으로 돌아온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에 대해 평생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제주지방검찰청의 수감자 명단에 따르면 유죄판결을 받은 수형인이 2,530명에 달했습니다. 한국전쟁(1950~1953) 발발 직후 여러 형무소에서 수많은 수형인들이 처형되었습니다. 후일 석방된 일부 생존자들은 평생 동안 경찰의 감시 하에 살아야 했습니다. 제주4.3은 미국과 한국의 정부당국이 저지른 인권과 인간 생명에 대한 대대적인 위반이자 범죄였습니다.

제주4·3 이전의 사회경제적 환경

일본이 항복했을 때만 해도, 한국인들은 자신들만의 나라를 꿈꾸며 열정에 불타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스템과 조직을 도입하여 새로운 국가를 여는 준비과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상륙한 미군은 새로운 국가에 봉사하려는 자발적 운동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미군정은 자체적인 임시군정을 조직하여 자신들의 제도를 한국 국민에게 부과했습니다. 한국은 이미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립했고,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가 가한 온갖 억압과 방해공작을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이 조직의 적법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 경찰 및 군대에 협조했던 한국인을 상당수 채용하기로 결정했고, 오랫동안 해방과 독립을 염원하던 이들은 엄청난 좌절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 결정은 많은 한국인들을 크게 낙담시켰고 한국에 깊은 분열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정부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상황을 우려하였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공산진영이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군정은 좌익 세력의 영향력 확장에 대해 매우 불안해했으며 주로 한국의 국내 치안 상황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효율적 행정시스템으로 민간을 통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여러 차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미군정은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이루어지던 국가통제 경제를 철폐하고 자유시장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질서 있는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경제정책은 수립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의 경제체제를 폐기함으로써 토지주들과 소수의 부유층이 시장을 마음대로 매점매석할 기회를 주었을 뿐입니다. 이는 시장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1945년 9월 말 9.4엔이던 쌀값은 1년 만에 280배 올라 2,800엔까지 뛰었습니다. 다른 지방보다 빈곤했던 제주도민들은 전례 없는 경제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미군 관계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공무원이었던 지도부의 경찰력에 모든 행정권한을 위임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도민들은 미군정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미군 당국에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정의 역량과 제주도민의 기대치 사이에 너무 큰 격차가 발생하면서 제주4.3이라는 고통스러운 비극이 태어났습니다. 제주도민들은 미군을 또 다른 외국점령군으로 여겼습니다. 미군 지도부는 현지 주민들에게 적절한 행정서비스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러한 훈련을 받지도 못한 이들이었습니다. 2차 대전 종전 후 1년 사이에 60,000명에 달하는 제주 출신 재일교포들이 갑작스레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제주도내에는 식량과 일자리가 극도로 부족해졌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극심한 공황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같은 혼돈 속에 1947년 3월 1일, 30,000명에 이르는 제주도민이 학교 운동장에 운집하여 현재 자신들이 처한 위기상황에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3월 1일에 이렇게 많은 주민들이 모였다는 점은 미군을 해방군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침입자로 여겼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1919년 3월 1일은 일제에 맞선 저항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군 지도부는 오랫동안 일제에 저항했던 제주지역의 지도층 인사들을 수용하고 그들과 협력하는 데 매우 서툴렀습니다. 미군은 섬 주민 전체를 소련과 연결된 빨갱이 반란자들로 간주했습니다. 미군 지도부의 이러한 오해와 편견, 오판으로 인해 도민 전체가 그들에게 등을 돌렸고, 이는 결국 30,000명에 이르는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주민 대부분은 정치이념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농민이었음에도 미군은 현지 주민들을 그저 좌익으로만 취급했습니다. 경찰정보부가 제공한 잘못된 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한 미군 지도부는 제주의 모든 좌익 운동을 철저히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에게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처형과 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한국경찰과 한국군이었지만, 정책을 수립하고 작전을 수행하도록 명령한 이들은 미군 지도부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서 제주4·3 발생 후 55년 만에 제주를 찾아 제주도민들에게 공식 사과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3일 제70주년 추념식에 참석하여 진심 어린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 특히 희생자 유가족들 그리고 제주도민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미국 당국이 어떤 식으로든 그 책임에 합당한 입장을 표명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유엔의 다른 회원국들도 보편적 인권을 위한 연대의 표시로 이 잊혀진 역사에 대해 관심과 공감을 표명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심포지엄이 진정한 평화와 화해를 이끌어내는 국제적인 협력의 좋은 씨앗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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