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해 되짚어보는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
1년 전 오늘인 2018년 6월 23일(토), 한 노(老)정객이 향년 92세를 일기로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영욕의 삶 자체가 한국 현대정치사의 한복판에 있었기에, 언론은 그의 삶을 '3김 시대의 종언', '한일 외교 정상화 주역', '5·16 군사쿠데타 주역', '영원한 2인자' 등으로 평한다. 풍운아, 풍운의 노(老)정객, 정치 풍운아, 풍운의 정치인, 영원한 킹메이커, 정치9단, 처세의 달인, 로맨티스트 정치인….방송언론에서 부음 기사 등을 내면서 그의 이름 앞에 붙인 수식어다. 그의 이름은 김종필(金鍾泌, 1926.1.7.~2018.6.23.)이다. 호는 운정(雲庭)이며, JP로도 불린다.
이틀 후인 6월 25일(월) 주요 언론의 기사 제목은 이러했다.
"영원한 2인자의 삶" 한국 현대정치사의 풍운아 김종필(한국일보)
마지막 3김 떠나다...'영원한 2인자' 김종필 별세(조선일보)
97년 JP "호남 정권 잡게해 한 풀어줘야, 박정희 빚 갚을 것"(중앙일보)
늘 권력 편에 섰던 JP...유신독재.지역감정 '흑역사' 남기고...(한겨레)
박정희주의, 3김의 종언....공안.지역.계파 정치도 저물다 (경향신문)
경향신문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가장 논쟁적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면서 "그는 정부를 무너뜨린 군사정변 주역이었고,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2인자였으며, '3김 정치'의 길항 속에 권력의 중심을 탐한 정치인이었다. 그의 타계와 함께 한때 한국 사회를 지배한 '박정희주의'와 '3김 정치'도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게 됐다"고 평한다. JP에 앞서 지난 2009년 DJ에 이어 2015년 YS가 먼저 유명을 달리했다. 김종필의 죽음으로 20세기 한국사의 한 획을 그었던 '3김 시대'는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정의당은 6월 23일 논평을 통해 "'자연인' 김종필의 명복을 빈다"고 하면서, "김 전 총리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확실한 것은 이제 대한민국이 다시는 그가 주역으로 활동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역사는 한 걸음씩 전진한다는 것을 확인하며 JP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덧붙인다. 6월 25일 노회찬은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함께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조문한다.
김종필: 영욕과 부침의 파란만장한 삶
1926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서 7남 중 5남으로 태어난 김종필은 어린 시절 '댕고'(한번 성질을 부리면 풀지 않는다), '틀물레'(아무리 야단을 맞아도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 독하고 끈기있게 참아낸다)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교사가 되어 영국의 이튼스쿨과 같은 학교를 설립하는 게 꿈이었던 그의 생애는 2018년 서울 청구동 자택에서 운명하기까지 한국 현대정치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 한다.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를 도와 5·16 쿠데타를 주도한 후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의 명실상부한 2인자'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나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낙인 찍혀 야인 생활을 보낸다. 또 '3김 시대'를 이끈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파를 넘나드는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면서 김영삼 문민정부와 김대중 국민의정부 출범에 기여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대권과 인연이 없어 '영원한 2인자'라는 별칭이 따라 다닌다. "산업화·민주화 과정에서 영욕의 부침을 거듭한 그야말로 정치 풍운아의 삶이었다."(한국일보, 2018.6.23.).
'정치 9단'으로 불리기도 했던 김종필은 한국현대정치사에 숱한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30대의 나이에 중앙정보부장과 국회의원, 당 총재(대표)를 지낸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였던 1963년 첫 당선 이후 7, 8, 9, 10, 13, 14, 15, 16대 등 총 아홉 번의 국회의원 금배지를 단 9선 의원이다.
박정희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으로, 박정희의 정치적 동지이자 처조카로 2인자의 자리에 올라선 김종필은 그러나 1969년 3선개헌을 계기로 권력의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져갔고, 박정희의의 관계도 서먹해져갔다. JP는 인생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3번의 정계은퇴를 한다. 1968년 5월 김종필을 박정희 후임으로 추대하려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난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민주공화당 의장직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가 2년 7개월만인 1970년 12월 복귀한다. 1980년에는 신군부 등장과 함께 영어의 신세가 됐고 미국으로 건너가 야인 생활을 하다가 1986년 귀국, 1987년 9월 정계에 정식으로 복귀한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은퇴는 2004년 4월로, 17대 총선에서 10선 도전에 실패한 김종필은 43년간 몸담았던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정치에서 은퇴한 후 김종필은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실업(實業)인으로 갔으면 돈관이나 모았을 텐데 정치가는 허업입니다. 실업은 움직이는 대로 과실을 따니까 실업이지요. 경제하는 사람들을 왜 실업가라고 하냐면 과실을 따먹거든. 그러나 정치하는 사람은 이름은 날지 모르지만 속은 텅텅 비었어. 나도 2~3년 후에는 어떻게 살까 걱정이여."(<뉴스프리존>, 2018.6.25에서 재인용)
"정치는 잘하면 국민이 그 열매를 따먹지만 정치인 본인에게는 허업이다.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게 정치인의 희생정신이지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겠다면 교도소 밖에 갈 데가 없다."(2015.2.22 부인 고 박영옥 여사 빈소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한 말, 경향신문 2018.6.24.)
노회찬과 김종필의 '첫 만남'
현재까지 노회찬의 사료를 보면 김종필의 이름은 1973년 경기고 1학년 때 등장한다. 앞서 <4.19편>에서도 말한 것처럼 노회찬과 그의 고등학교 친구들(경기고 1학년 3반)은 1973년 4월 18일 수유리 4.19묘소에 참배를 간다. 4월 19일은 "김종필 등 5.16쿠데타 세력이 설치는 게 못마땅하고" "꼴도 보기 싫은 정치인들이 광내는 자리이니" "전날 참배하자"는 것이었다.
1971년 6월 4일 임명되어 1975년 12월 18일 전격 경질될 때까지 김종필은 4년 198일 동안 국무총리 직을 맡는다. 국무총리 자격으로 김종필은 4월 19일 기념식에 참석하고 수유리 4.19묘소에 헌화한다. 4.19묘소 참배의 경우는 이 행사가 부총리 주관이어서 참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972년 4월 19일 국무총리 김종필은 시민회관에서 열린 '4.19의거 12돌 기념식'에 참석, 기념사를 통해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4.19와 5.16이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같은 지향을 갖고 있다. 5.16혁명은 4.19의거의 연장이며 5.16의 정신과 성취 속에 4.19는 승화돼 있다"고 말한다. 또 4.19세대를 아우에, 5.16세대를 형에 비유하면서 "아우들이 시작한 것을 형들이 매듭지어가고 있다"고까지 말하기도 한다(동아일보, 1972.4.19.). 기념식에 앞서 오전 9시 민관식(문교부 장관), 양택식(서울시장) 등은 4.19묘지를 참배한다.
1998년 4월 19일 김종필은 국무총리서리 자격으로 김대중 정부를 대표해 38주년 4.19기념식에 참석한다. "4.19혁명을 뒤엎은 5.16쿠데타의 핵심주역인 김종필은 그동안 당총재나 당대표 자격으로 수유리 4.19국립묘지를 참배해왔지만, 기념식 참석은 이번이 처음"(한겨레, 1998.4.20.)이라고 한다.
이들이 반대한 것은 무엇보다도 김종필이 4.19혁명의 물줄기를 가로막은 5.16쿠데타의 주역이자 동시에 5.16을 미화하는 데 앞장서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5.16쿠데타 관련 김종필의 발언을 간추려보자.
- "파국 직전의 조국을 구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5·16 혁명과 1963년 공화당 창당이라는 역사적 전기가 마련됐다."(김종필, <새 역사의 고동>, 1987)
- "역사는 기승전결로 이루어진다. 5·16은 역사 발전의 토양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를 일으킨 사람이며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그 계승자이고, 김영삼 대통령의 변화와 개혁은 그 전환에 해당된다."(5·16 민족상 시상식, 1993.5.16.)
- "5·16혁명은 조국 백년대계의 청사진 위에서 결행됐고,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출발한 것이다."(운정재단 아카이브)
- "후손들이 어느날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와 평화, 여유있는 삶의 근원을 거슬러 찾아갈 때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될 것이며, 고마움을 다시 새길 날이 있을 것이다." (「김종필 대표의 '5.16 예찬'」, 한겨레 사설, 1993.5.18.)
5.16에 대한 노회찬의 어린 시절 기억은 이렇다.
"5·16 때 계엄이 내려져서, 어머니하고 서울에 갔다가 오는데 어머니 팔뚝에 야간통행증 도장이 찍힌 일이 기억납니다." (구영식 기자 미공개 인터뷰 자료) "5.16쿠데타가 나던 날 7시에 통금이 내려서 차가 안 다니던 바람에 어머니가 팔뚝에 야간 통행증 도장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퍼슨웹 인터뷰)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노회찬: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2003년 1월 1일)
1961년 5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한 박정희의 5.16쿠데타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1호'를 통해 "7. 야간 통행금지 시간은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아침 5시까지"라는 것을 포고하고, "이상의 위반자 및 위법행위자는 법원의 영장없이 체포, 구금하고 극형에 처한다"고 발표한다. 한편 1960년대 당시 기차나 장거리 버스가 통금 이후에 도착하면 경찰관이 승객들의 신원을 확인한 뒤 팔목에 통행허가 도장을 찍어줬다. 도장을 받은 사람이 집에 가는 길에 검문을 당하면 팔목을 내밀면 됐다.
※ '1960년대 야간 통행금지' (「5.16군사쿠데타와 제3공화국」,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우리나라에서 처음 통행금지가 실시된 것은, 해방 후인 1945년 9월 7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서울과 수도권 일원에서만 실시하였는데, 6.25 전쟁 이후에는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처음에는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였다가 다시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로 단축하였다. 제주도 지역은 통행금지에서 제외되었으며, 그리고 크리스마스 전야 등 특별한 날은 일시적으로 통행금지를 해제하였다.
통행금지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 퍼지면 도심이 조용해졌으며, 간간이 경찰관의 호루라기 소리가 정적을 깨우곤 했다. 통행금지를 위반한 사람들은 경찰서에 연행되어 즉결심판을 받은 뒤 과태료를 내고 풀려나야 했다. 여러 가지 진풍경들을 만들어낸 통행금지는 37년 동안 실시된 뒤 5공화국 초기인 82년 1월 6일부로 폐지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일간신문을 즐겨 읽었던 노회찬에게 김종필이라는 이름은 5.16쿠데타만이 아니라, 중앙정보부, 4대 의혹사건, 김종필-오히라 메모와 한일협정, 유신독재의 동조자 등을 떠올리게 하는, '나쁜 정치인'의 대명사로 각인되었을 것으로 충분히 추측 가능하다.
2015년 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반(反)헌법 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상임대표 이만열.신인령)는 '반反헌법행위자 열전수록 집중검토 대상자 405명의 명단 발표 기자회견'을 한다. 이에 따르면 김종필은 "5·16 쿠데타, 5·16 직후 인권침해, 1967년 6·8 부정선거 사건에 책임"이 있다. 그밖에도 김종필은 "중앙정보부 설립, 한일회담 추진, 3선개헌, 유신체제 협조 등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 김종필과 노회찬
5.16쿠데타 직후 김종필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기관으로 중앙정보부(Central Intelligence Agency, 이하 중정)를 창설하고 초대 중정부장을 맡는다. 1961년 6월 5일자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기사에 중정부장으로 처음 등장한 김종필은 5.16쿠데타의 경위 및 그 불가피성과 정당성을 혁명의 이름으로 역설한다.
중정은 1961년 5월 20일 5·16 군사쿠데타의 주체들이 주도하여 군사정부 최고 의결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소속의 정보기관이자 수사기관으로 설치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6월 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법과 중앙정보부법을 통해 중정의 설치 근거를 명문화한다. "국가안전 보장에 관련된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 부서의 정보수사활동을 조정감독"(제1조)하며, 검사의 지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제1조에 규정된 정보수사에 관하여 국가의 타기관 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하는 막강한 권한을 지닌 중정은 당초부터 군 내부의 반혁명 기도나 민간 정치인들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분쇄․저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직된다. 즉 중정은 애초부터 국가안전보장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안전보장을 활동의 주된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다. 특히 중정 부서 가운데 가장 악명을 떨쳤던 것은 국내 정치사찰을 전담한 6국과 밀실 고문수사의 상징인 지하실이었다. 6국은 정치권은 물론 중정 내부에서도 '육국'(肉局)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혹독한 고문의 산실이었다.
※ 중앙정보부
이후 중앙정보부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주도하여 입법한 국가안전기획부법에 따라 1981년 1월 1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된다. 국가안전기획부법은 민주화 과정에서 초헌법적 정치사찰, 인권침해와 강압적 수사 등이 문제시되어, 1999년 1월 21일 김대중 정부 하에서 <국가정보원>으로 개칭된다.
박정희와 김종필의 합작에 의해 실로 번갯불에 콩 볶듯이 만들어진 중정의 설립 당시 구성원의 성분에 대해 중정부장 출신인 김형욱은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중정의 직업 수사관의 전직은 사찰계 형사, 방첩부대 문관, 헌병 하사관, 심지어 일제 치하에서 설치던 조선인 헌병과 밀정 등 형형색색이었다. 그 중 어떤 사람은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 순사로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다가 나중에는 공산당 간첩을 때려잡은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도 있었다. 그들에게 소위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도 사람들을 때리고 고문할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누구든지 증오할 수 있고, 어떤 고문술도 개발할 수 있으며, 피의자를 학대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하는 새디스트들이었다." (김형욱․박사월, <김형욱 회고록>, 아침, 1985, 235쪽)
'음지에서 양지를' 줄곧 지향해온 중정, 일명 '남산'은 공포의 동원을 통해 권력우상의 총구가 되었으며, 박정희 독재정권을 지탱시켜준 최고의 숨은 공로자였다. 김충식은 중정의 역할과 관련해, "안보 파수꾼, 외교 주역에서부터 정치공작, 선거조작, 이권 배분, 정치자금 수수, 미행, 도청, 고문, 납치, 문학예술의 사상 평가, 심지어 여색 관리, 밀수, 암살까지 그야말로 올마이티의 권력 중추였다"(<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I>, 동아일보사, 1992, 11쪽)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노회찬의 기록을 보면, '중앙정보부(중정)-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국가정보원(국정원)'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 가운데 몇 가지만 추려본다.
"그는 1973년 경기고 1학년 때 정광필 군(대안학교 교장)과 둘이서 유신반대 유인물을 제작해 살포하는 사고를 친다. 제목을 성경 구절에서 따와 '귀 있는 자 들으라'로 했다. 첫머리에 서울대 4·19 선언문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를 인용한 뒤 격렬하게 유신체제를 비판했다. 필적이 드러날까봐 등사기를 사용하지 않고 청타집에서 16절지 양면에 인쇄를 했다. '귀 있는 자 들으라'라는 제목은 서예를 하던 같은 반 이종걸 군(열린우리당 의원)이 큰 글씨로 썼다. 둘이서 밤에 전교생의 책상 속에 일일이 넣고 다녔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1973년 11월 경기고는 이 사건으로 조기방학했다. 중앙정보부의 막강 수사력으로도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다. 1974년엔 경기고에서 유신반대 데모가 일어났다. 다행히 든든한 배경을 가진 동문들이 감싸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황호택, 「여의도에 입성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신동아>, 2004년 6월호)
2005년 노회찬의 '떡값검사' 실명공개, 즉 삼성 X파일 사건의 도청자료인 'X파일'은 1991년 9월부터 1998년 11월까지 제6공화국과 문민정부 시절의 안기부가 운영하던 비밀 도청팀인 '미림팀'(팀장 공운영)이 수집한 것이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미림팀의 사찰대상은 연인원이 5000명을 넘었고, 미림팀이 만들어낸 각종 도청정보는 '문민정부 황태자'로 불렸던 김현철과 이원종(청와대 정무수석) 등에게 수시로 보고돼 정권 핵심실세들이 정치권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된다.
중정은 안기부를 거쳐 1999년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국가정보원의 치밀한 시나리오 연출에 따른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국정원 대선개입 국정조사 등이 2013년에 들어와 알려지기 시작한다. 노회찬은 CBS <김현정의 뉴스쇼>
김현정 : 그렇게 보시는군요. 지금 대화록 열람과는 별개로 한쪽에서는 국정원 대선 개입 국정조사가 진행 중인데요. 보는 마음이 편치 않으시죠?
노회찬 : 국정원은 사실 지금 국가정보원으로써의 기능은 거의 상실한 거 아니냐. 이렇게 봅니다. 우리 국민들이 볼 때는 국정원이 아니라 국가걱정원이다, 이렇게 보이는데요.
김현정 : 국가걱정원이다?
노회찬 : 지금 이나라에서 최고의 걱정거리는 국정원입니다. 사실은.
1972년 10월유신과 80년 5월 광주
10월유신이 선포되기 1년 전인 1971년 12월 2일 국회 대정부질문, 신민당 박종률 의원은 국무총리 김종필에게 묻는다. "총리, 최근 국회에 대해서 문을 닫는다, 기일 내에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국회문을 닫는다는 소문이 있는데 총리는 소문의 진원지를 철저히 조사해서 엄벌해 주기 바랍니다." 예의 간첩 타령을 하면서 김종필은 동문서답을 한다. "행정부는 기일 내에 예산안이 통과되어 원활한 집행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전했을 뿐이고 국회를 해산할 권한은 없습니다. 혹시 간첩들이 민심교란책으로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게 아닌가 질문하셨는데 저희도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과장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미 비밀리에 구성된 '특별팀'과 '실무팀'에서 강력한 통치체계 구축방안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던 시점에서 김종필은 의도적으로 유신 쿠데타를 통한 헌정질서 파괴 음모를 엄호한 것이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다. 국무총리 김종필은 10월 17일 하오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중앙청에 모인 국무위원들에게 "앞으로 국회도 없으니 국무위원들이 국회기능까지 모두 맡아야 하므로 매우 바빠졌다"고 말하고 배전의 분투를 당부한다(경향신문 1972.10.18.). 김종필에게는, 당시 고입 재수생이던 노회찬을 격분케 한 "국회해산은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김종필은 10월 31일 전국검사장회의 자리에서 "범법과 질서문란행위를 엄단함으로써 국민단결을 저해하는 일체의 요인들을 봉쇄할 것"을 당부한 데 이어, "10월유신의 역사적인 사업은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한국적 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박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면서 "검찰은 온갖 노력을 새 역사를 창조하는 유신사업의 추진에 집주(集注)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인다(동아일보 1972.11.1.).
한편 노회찬을 노동운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1980년 '5월 광주' 발생 직전인 5월 17일 김종필은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전격 연행된다. 5월 18일 오후 계엄사령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령 확대 실시 선포를 계기로 국민의 지탄을 받아오던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와 그동안 사회불안 조성 및 학생.노조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자 26명을 연행, 조사 중이라고 발표한다.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 1순위는 김종필이었고, 불안조성과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 1순위는 김대중이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김종필은 1980년 당시 기준 시가로 213억 4천여만 원을 강제로 헌납당한 바 있다. 이른바 '도둑놈이 도둑질한 것을 또 다른 도둑놈이 도둑질한 것'이다. 당시 인구에 회자됐던 213억여 원은 월 100여만 원의 봉급생활자가 먹지도 쓰지도 않고 꼬박 저축을 한다 하더라도 2,000년이 걸려야 모을 수 있는 액수라고 한다(조현연, 「김종필: 그는 정통 보수주의의 원조인가」, <보수주의자들>, 삼인, 1997, 50-51쪽). 6월 18일 합동수사본부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공직에서 사퇴하는 것을 전제로 형사처벌을 유보한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한다. "김종필 216억원, 이후락 194억원 등 총 853억 원이며, 이와 관련한 기업인들은 수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 발표한다. 7월 2일 김종필 등 권력형부정축재자 9명이 연행 46일 만에 석방된다.
※ 김종필의 강제 헌납 액수와 관련해 기록에 따라 213억과 216억으로 일정한 차이가 드러난다. 1980년 6월 18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신군부가 몰수한 JP의 부정축재 금액은 213억4648만원으로 '일요신문'을 발간한 61억원 규모의 현대경제일보사, 28억원에 이르는 12만 평의 제주 감귤농장, 79억원에 상당하는 640만평 서산 소재 삼화축산, 300돈의 순금제 칼, 50돈의 순금제 황소, 각종 고서화와 골동품 1억3000만원 등이다.
김종필은 당시의 정치상황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으나 아직 봄이 아니다)이란 말로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5.16이 형님이고 5.17이 아우라면 고약한 아우를 둔 것"(1987.1.1. 관훈토론회), "구십이 되었는데도 미운 사람이 한명 있다"(2016년 1월 90번째 생일축하연)라고 말하면서 전두환에 대한 미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종필은 전두환과 끝까지 화해하지 않았다.
1987년 대통령 선거와 1988년 국회의원 총선
1980년 11월 3일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신군부세력의 집권을 위한 포석으로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 정계의 핵심인물 567명을 강제로 퇴출시킨다, 이후 전두환 정권은 1985년 12대 총선(2월 12일) 직후인 3월 6일 그동안 미해금된 14명에 대한 마지막 4차 해금 조치를 단행한다. 해금된 14명은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등 3김씨와 함께 구여권의 이후락, 오치성, 김창근, 성낙현, 이철희 등 5명과 구야권의 김상현, 홍영기, 김명윤, 김윤식, 윤혁표, 김덕룡 6명이다.
1987년 9월 28일 김종필은 정계복귀를 선언한 뒤 10월 30일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3대 대선(12월 16일) 출마를 선언한다. 대선 결과 김종필은 8.1%(1,823,067표)를 획득한다.
1987년 대선은 6월민주항쟁 이후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는 최초의 선거였다. 진보세력이 후보로 밀었던 백기완이 민주연립정부를 주장하며 등장한다. 당시 대학로 백기완 후보 연설장에 모인 30만 명의 지지자들, 그들은 보수 야당과 구별되는 새로운 세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 중심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있었고(김원, 「이달의 역사: 인민노련, 그 빛과 그림자」, <노동자역사 한내 뉴스레터>, 58호, 2013.10.14.), 인민노련을 이끈 리더의 한 사람이 노회찬이었다.
백기완은 후보단일화를 통한 군부독재 종식을 촉구하면서 12월 14일 후보 사퇴 기자회견을 갖는다. 군정종식에 대한 국민의 여망은 높았지만 결국 김대중과 김영삼 양김씨의 후보단일화는 실패했고, 민정당 후보 노태우가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1988년 4월 26일 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다. 13대 총선은 1987년 10월 29일 공포된 제6공화국 헌법에 따라 제12대 국회의원의 당초 임기(1985.4.11~1989.4.10)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종료일을 1년 정도 남겨둔 상황에서 실시된다. 제13대 대선에 이은 '1노 3김'의 제2차 대결이자, 선거전은 초반부터 연고지역에 따라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4당 대결구도를 보인다. 더욱이 그동안 여야 나눠먹기식이라는 비난을 받아오던 중선거구제가 폐지되고 17년 만에 1선거구에서 1인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로 치러지면서 후보자 간에 경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다.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충청권(충남 13석, 충북 2석)과 경기도 지역(6석)에서 선전해 총 35석을 확보한다. 이때부터 김종필은 '충청권의 맹주'로 불리기 시작한다.
1988년 3월 6일 ⓵외세의 억압을 일소하고 민족의 자주권 회복을 위해 싸우는 정당 ⓶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참된 민중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정당 ⓷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싸우는 정당임을 표방하면서 <민중의 당>(대표: 정태윤)이 창당된다. 비합법 노동운동계에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인민노련과 제헌의회(CA)그룹의 노동자해방투쟁동맹(약칭 노해동. CA그룹이 1986년 말경부터 당국에 의한 검거로 조직적으로 와해되면서 잔류 성원들이 재건)이 두 중심축이었다.
1988년 13대 총선에 16명을 출마시킨 <민중의 당>의 정치 실험은 0.33%의 득표율을 보이며 실패로 끝난다. 5월 16일에서 18일까지 개최된 <민중의 당>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는 정당 해산 후 <민중정당재건추진위원회>로 재편을 결의한다. 이후 1989년 8월 25일 노회찬은 권우철, 주대환, 황광우 등과 함께 인민노련 기관지 「사회주의자」 창간호를 발행하고 '정명수'란 가명으로 「사회주의자」, 「노동자의 길」 등에 글을 기고한다.
1990년 3당합당 선언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새로운 역사 창조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통해 3당 합당을 발표한 뒤 2월 9일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한다. 김영삼에게는 "고뇌 끝에 구국의 차원에서 내린 위대한 결단"이었다. 3당합당에 대해 청와대는 "헌정사 40년 만의 명예혁명"이라 했고, 김종필 역시 "구국의 결단"으로 자찬한다. 그러나 그것이 구국의 결단이 아니라 '권력 분점을 위한 밀실야합'이자 '정치쿠데타'였을 뿐이라는 것은 뒤이어 터진 내각제 개헌 합의각서 유출 파동으로 들통이 난다.
역사적인 민주자유당의 제 1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우리 3인은 신뢰와 협조 아래 국가와 당의 발전을 위하여 합당정신에 입각,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2. 1년 이내에 의원내각제로 개헌한다.
3. 이를 위하여 금년 중 개헌작업에 착수한다.
1990년 5월 6일
1노 2김이 '구국의 결단'이라는 포장에 대해 노심초사할 무렵인 1989년 12월 23일, 노회찬은 이적단체 가입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치안본부 홍제동 대공분실로 끌려간다. 1990년 1월 3당합당 선언 당시 노회찬은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었다. 김종필과 김영삼이 구국의 결단을 수행할 날만 기다리고 있을 당시, 노회찬의 어머니 원태순은 수감 중인 맏아들에 대한 걱정과 어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손편지를 쓴다.
"1월 9일 저녁 들어선 너의 집은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고 화초도 파릇파릇 잘 자라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주인이 현관으로 들어올 것 같은 착각을 했다" "하도 큰 애기(며느리)가 침착하고 말 한마디, 동작 하나하나 예의 바르고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니 어머니는 눈물겹도록 고맙고 마음 아팠다. 늦은 나이에 시집와서 인제 1년 넘나드는데 이토록 심신의 모진 고생을 시키다니 정말 하늘이 원망스럽고 땅에 통곡할 뿐이다. 주인 잊은 방의 인삼과 꿀, 비타민은 큰 애기 먹도록 했다"
1997년 대선: 김종필의 'DJP연합'과 노회찬의 '국민승리21'
1993년 2월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1994년 말부터 민자당 내의 민주계를 중심으로 한 여권 핵심부가 개혁과 세계화를 내세워 김종필의 2선 퇴진 압박을 본격화한다. 이에 김종필은 1995년 1월 민자당 당대표 사임을 통해 김영삼과 결별하고 2월 민자당을 탈당한 뒤 1995년 3월 30일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을 창당, 독자노선을 걷는다. 그는 충청을 지역 기반으로 삼아 문민정부에서 소외된 대구·경북 인사들을 영입해 당세를 확장한다. '충청도 핫바지론'으로 '녹색바람'을 불러일으킨 자민련은 1995년 6월 27일 제1회 지방선거에서 5명의 광역자치단체장을 당선시키고, 1996년 4월 12일 15대 총선에서는 50석을 획득(지역구 41석, 전국구 9석)해 제3당의 위치에 오른다.
노회찬의 경우 "1992년 4월 1일 청주교도소를 만기 출소한 이래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을 지배한 것은 '진보정당 건설'이었다. 그 해 4월 민중당 해산과 함께 진보정당은 이제 끝났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갈 때 '진보정당추진위'로 남은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항해를 떠났다." (노회찬, <힘내라 진달래>, 사회평론, 2004, 283쪽). 1992년 3·24총선 결과 민중당은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또 유효득표율 2%에도 미치지 못함으로써 등록취소되고 만다.
1997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김종필(자민련 총재)은 "정권교체로 의회민주정치 실현"을,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은 "새로운 천년 맞아 지혜로운 결단"을 강조한다.
두 사람의 신년사 내용은 11월 3일 이른바 후보단일화와 'DJP연합'으로 모아진다. DJP연합은 12월 18일 15대 대선 승리와 공동정권 창출로 나아간다. 김종필은 김대중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아 실세총리로 2인자 역할을 유지하고, 자민련은 2년간 공동 집권여당으로서 권력의 한 축을 이룬다.
① 대통령 후보는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로 하고 집권 후 공동정부의 국무총리는 자민련 김종필 총재로 한다.
② 차기정부의 관료구성 등은 동등하게 균분하고 양당 동수로 공동정부 협의기구를 구성한다.
③ 공동정부 출범과 함께 개헌추진위를 발족하고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개헌안을 발의, 99년 말까지 개헌을 완료한다.
④ 대통령을 간선으로 선출하고 수상이 국정 전반을 책임지는 순수내각제로 한다. 독일식 불신임제를 채택한다.
⑤ 내각제 개헌 후 초대 대통령과 수상의 선택은 자민련이 우선권을 갖는다.
※ 2008년 민주노총 등에서 나온 '민주대연합' 목소리에 대해, 노회찬은 'DJP연합'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민주세력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데 무얼 중심으로 합쳐야 하나? 힘을 합치는 대상과 주체 등이 명확해야 한다. 서로 차이가 많은데 이명박이 나쁘니 하나로 뭉치자고 하는 것은 안 통한다. 문제가 이명박 정부에만 있나? 비정규직 악법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연합해 통과시켰지 않나? 정치적 합종연횡으로 상황돌파를 해서 안 된다. DJ는 왜 JP와 연합했나? DJP연합에 철학이 있나? 거기엔 이해관계의 관철만 있었을 뿐이다. 민주당은 자기 이해관계에 복속하라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쉽게 (민주대연합으로) 가겠나? 가더라도 그 연합은 선언적 의미 이상이 구축되기 어렵다. 선거연합으로까지 발전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남북문제 하나로 두터운 연합은 건설하기는 어렵다." (「"민주대연합론은 결국 '민주당 강화론', '진보 수혈' 대신 보수야당이 전향해야"-[민주대연합논쟁] 노회찬 진보신당 공동대표 인터뷰①」, <오마이뉴스>, 2008.12.5.)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노회찬이 이끌고 있던 <진보정치연합>은 대선에 참여하고 이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이 참여한 가운데, 진보진영은 97년 대선기구로 9월 7일 <국민승리21>을 출범시키고 대선 후보로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내세운다.
노회찬은 <국민승리21>에서 기획위원장, 정책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한다. 권영길 후보는 306,026표(득표율, 1.2%)를 득표한다. 1992년 대선에서 백기완이 받았던 238,648표(득표율, 1.0%)보다는 높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였다.
민주노총은 대선 패배 이후 국민승리21에 대한 공식적인 지원을 할 수 없었고, 전국연합은 공식적으로 국민승리21에서 철수할 것을 결의한다. 그러나 1987년과 1992년 대선 때와는 달리 국민승리21은 포기하지 않고 진보정당 건설을 계속 추진하기로 한다. 1998년 6월 4일 제2회 지방선거에서 국민승리21은 123명의 당선자를 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승리21은 이후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국민승리21은 일단 대통령선거를 통해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정당작업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1998년부터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원탁회의를 저희들이 제안해서 원탁회의를 만들었고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를 98년 하반기에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99년도에는 이른바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2000년 1월 30일날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게 된 것이죠." (「<한국정당실록 60년>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인터뷰 전문 ① 」, <폴리뉴스>, 2009.5.4.)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1996~97년 노동자 총파업 이후 내가 대선 후보로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후보로 나서야 된다는 얘기가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내게 그런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총파업이 끝난 후 어느 날 노회찬이 만나자고 했다. 두 시간 이상 나를 설득했다. 그전에도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 건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만약 노회찬이 없었다면 나는 1997년 대선에 후보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광호, 「진보정당운동과 노회찬」, 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21쪽)
"1997년 대선에서 진보 후보였던 내가 예상보다 낮은 득표율(1.19%)로 모두들 실의에 빠졌을 때, 다시 진보정당(민주노동당) 추진 운동을 일으켜 세운 이가 노회찬이었다." (한겨레 사설, 2018.7.24.)
2004년 17대 총선: 노회찬과 김종필, 희비의 쌍곡선
2000년 1월 14일 김종필은 국무총리 직에서 물러난다. 이어 2월 24일 자민련은 새천년민주당(민주당)과의 공동여당 포기를 공식 선언한다. 자민련의 이같은 선언은 민주당의 내각제 강령 제외와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을 계기로 관계가 악화되면서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이로써 1997년 11월 'DJP 합의'를 모태로 1998년 2월부터 가동해 온 공동정권이 2년만에 일단 막을 내린다. 그러다가 2000년 4.13총선 실패 이후 자민련이 민주당과의 공조를 복원하면서 민주당 의원 4명이 자민련에 입당하는 초유의 '의원 꿔주기'로 교섭단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햇볕정책을 둘러싼 지속된 갈등 끝에 2001년 9월 4일 자민련이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을 한나라당과 함께 가결시킨 것을 계기로, 새천년민주당과의 공조는 최종적으로 파기된다.
2003년 2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2004년 자민련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도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에 동의했다가 역풍을 맞는다. 제17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지역구 4석만을 얻었다. 출사무적(出師無敵)과 "서산 앞바다를 붉게 물들이겠다"는 말을 내건 김종필은 자민련 비례대표 1번을 받아 10선을 노렸지만, 정당득표율 2.82%만 얻어 국회에 복귀하는 데 실패한다. 비례의석을 배분받는 최소 기준이 정당득표율 3%로 0.18%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최다선으로 역사에 기록을 남기겠다는 77세 김종필의 욕심은 좌절되고 만다. 대한민국 다선 국회의원 목록을 보면 김종필은 김영삼(1927~2015), 전 국회의장 박준규(1925~2014)와 함께 9선으로 공동1위에 올라와 있고, 공동 4위인 8선 의원으로는 정일형(1904~1982), 김재광(1922~1993), 이만섭(1932~2015), 서청원(1943~ ) 등 네 명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2004년 17대 총선의 압권은 열린우리당의 152석 획득과 함께, 김종필의 정계은퇴와 노회찬의 정치 전면 등장이다. 2004년 4월 15일. 전자 개표기가 처음으로 도입된 이날 선거에서 대부분의 당선자는 이른 시간에 윤곽이 드러났지만 당선자 한 명을 놓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비례대표 한 석을 놓고 벌어진 예측 불허의 상황이었다. 결국 4월 16일 새벽 2시를 넘어서면서 노회찬은 299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299번째로 당선이 확정된다. "보수의 퇴조, 진보의 약진, 이번 선거의 단면을 압축해 보여준 한밤의 드라마"가 연출된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집계한 최종 정당득표율은 민주노동당 13.03%(2,774,061표), 자민련 2.82%(600,462표)다.
총선이 있기 3개월 전인 2004년 1월 10일. 노회찬 대표가 서울 은평지구당 후보 선출 대회에서 했던 축사의 맨 마지막은 이랬다.※ 4월 16일 MBC뉴스는 '0.1%에 갈린 운명'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전한다.
- 앵커: 이번 총선에서 처음 도입된 1인 2표제가 두 정치인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10선에 도전한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민노당 비례대표 8번 노회찬 선대본부장의 경우, 정승혜 기자가 보도합니다.
- 기자: 간신히 3%대를 유지하던 자민련의 정당득표율은 자정쯤 2.9%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후 2.9와 3 사이를 오락가락하기 2시간. 김종필 후보와 노회찬 후보의 당락도 덩달아 엎치락뒷치락한 2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벽 2시가 지나자 2.9는 3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차이는 불과 0.1%. 결국 0.1% 때문에 보수정계 김종필은 퇴장하고 노동운동가 출신 노회찬은 한국정치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 노회찬(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 서민들을 위한 정책들을 많이 입안해서 국회를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 기자: 보수의 퇴조, 진보의 약진, 이번 선거의 단면을 압축해 보여준 한밤의 드라마였습니다. MBC뉴스 정승혜입니다.
"김종필 총재의 10선 등극이 좌절되는 낭보를 준비 중이다!"
축사를 이렇게 하긴 했지만, 그 낭보를 이뤄 낸 당사자가 본인이 될 거라는 걸 당시 노회찬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김종필의 10선 등극이 좌절된 것보다 대한민국 정치에 더 낭보는 노회찬이라는 정치인의 화려한 등장이었다. 김종필의 퇴장과 노회찬의 등장은 구시대가 끝장나고 새 시대가 열린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의 심경을 노회찬은 몇몇 지면을 통해 이렇게 밝힌다.
나는 당시 비례대표 후보 8번이었다. 오후 6시에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됐을 때 비례대표 후보 9번까지 당선되는 걸로 나왔다. 여기에 울산과 창원까지 합치면 11석이 되기 때문에 엄청난 대승이라며 좋아했다. 그런데 개표에 들어가자 오후 10시부터는 비례대표 후보 7번까지 당선되는 것으로 굳어졌다.
나는 낙선되는 것이었다. 당이 정치적으로 성공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당선되는 것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당선되면 좋겠지만 그것이 쉬운 일도 아니어서 오후 10시 반쯤부터는 텔레비전 앞을 벗어나 그냥 편하게 사무총장실에서 잤다. 사람들이 차마 깨우러 들어오질 못하고 있었다. 당선되는 줄 알았는데 안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새벽 2시 반쯤에 윤영상 위원장이 방에 들어와 나를 깨우더니 당선됐다고 했다. MBC, KBS에서 '당선 확실'로 보도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또 농담한다며 "AFKN에는 어떻게 나와?"라고 물었다. (웃음) 9번까지는 안 되고 8번에서 끝났다. 299명을 뽑는 선거에서 298명까지 당선이 확정되고 그 마지막 한 명이 김종필이냐 노회찬이냐를 가지고 새벽 2시 반까지 갔는데 내가 당선됨으로써 김종필이 떨어졌다. 그 열흘 전에 내가 <난중일기>에다 '김종필의 10선을 저지하겠다.'고 썼다. 그날 사람들이 사무실 주변에 운집해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그날도 마지막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8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40-141쪽).
당선되면 한번 포부 있게 일해 보는 거고, 안 될 경우에 대비해서도 마음 정리를 빠르게 했어요. 안 되더라도 내가 선거과정에서 얻은 게 많고, 우리 당의 현실로 볼 때 여러 역할을 해나가야 하니까요. 우리가 일을 궁색하게 진행했지만 포부가 크고 목표는 높은 곳에 있습니다. 국회의원 되는 게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여의도 입성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신동아> 537호, 2004년 5월 27일)
국회에 들어가면 눈에 핏발 세워 정치하고 싶습니다. 전혀 새로운 정치를 국민들에게 선보이겠습니다. 국민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174호, 4월 20일~4월 25일)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나는 오늘 정치를 떠나기로 했다." 며칠 뒤인 4월 19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자민련 당사. 김종필은 "오늘로 총재직을 내놓고 정계를 떠나겠다"며 자민련 총재직을 사임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또 "내가 일찍 떠날 수도 있었지만 뭔가 세워놓고 떠나려고 욕심을 부린 모양"이라며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며 내 나름대로는 완전 연소해 재가 되도록 탔다"고 감회를 밝힌다. 이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은 변했다"며 "노병은 죽지는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후 김종필은 2007년 이명박 대선 후보 지지 선언, 2012년 대선 박근혜 후보 지지 등 간접적인 정치 활동에만 나선다. 2013년 9월 자신의 호를 딴 운정회(雲庭會) 창립총회 참석차 국회를 방문한 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행사 나들이였다.
역사학계와 정치학계의 진보적인 두 명의 학자는 이런 글을 남긴다.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 노회찬의 극적인 당선이 더욱 큰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당선으로 김종필이 낙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4.19를 짓밟은 5.16 군사반란의 주역인 김종필은 하필이면 민주노동당의 노회찬에게 자리를 내주고 4월 19일에 정계은퇴 성명을 내야 했다. 박정희, 전두환 등과 함께 군사독재 정권을 상징하는 김종필이 정계에서 활보한 43년의 세월은 우리의 정치에서 '노동'과 '진보'가 실종된 기간이었다. 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그 세월은 퇴행의 시절이었다." (한홍구, <대한민국사 3>, 한겨레신문사, 2005)
"지금도 2004년 총선의 개표방송을 밤새고 보던 감격이 떠오릅니다.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마지막 의석을 노 의원이 차지하느냐, 아니면 자민련의 김종필이 차지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었는데 극적으로 노 의원이 마지막 의석을 차지할 때의 감격이란! 노 의원은 이 승리를 통해 4.19 이후 살아났던 진보정당을 무력으로 학살한 김종필에 대해 복수를 하고, 위기 속에서도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나온 그를 영원히 한국 정치에서 은퇴시켜 버렸습니다." (손호철, 「우리는 진보정당의 대들보를 잃었다-[추모사] 고인은 갔지만 진보정치는 더 강하게 꽃피워야」, <프레시안>, 2018.7.23.)
<브레이크뉴스>(2004.4.19.)는 이렇게 말한다.
"김종필과 노회찬, 정치권 입문 이전, 아니 입문했어도 서로간 마주칠 일이 없는 그들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왜곡된 수레바퀴는 어쩌면 두 사람의 운명을 필연적으로 예고했던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한 사람은 권력의 정상 언저리에서, 또 한 사람은 저 낮은 곳에서 지향하는 바는 달리 자신의 세계를 꿈꾸며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속에서 김종필 총재는 자신이 싹을 짜른 '4·19혁명 44주년'날 마침내 43년의 정치역정을 마감했다. 노회찬 총장은 30여 년의 형극의 세월을 보낸 후 처음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양지'로 끌어 올린 것이다."
김종필의 상선여수(上善如水), 노회찬의 상선약수(上善若水)
김종필과 노회찬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남긴 '어록들'이 많다는 것이다. 김종필은 정치판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풍부한 경력을 바탕으로 은유와 비유, 고사성어를 간접화법으로 이용, 자신의 심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데 능하다는 평을 듣는다(매일경제, 2018.6.24.). 드물지만 김종필 특유의 간접화법이 아닌 것을 하나 들라면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 죽어도 안 한다. 누가 뭐라도 해도 소용없다. 5000만 국민이 달려들어서 내려오라고 해도 거기 앉아 있을 것이다."(2016.11. <시사저널>과의 인터뷰)는 말을 꼽을 수 있겠다.
두 사람 화법의 차이에 대해 박지수(<보스토크> 편집장)는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노회찬에 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그를 좋아했다면, 결국 그가 했던 말을 좋아한 것이다. 국내 정치인 중에서 가장 알아듣기 쉽게 말했던 그의 화법은, 정치 고수로 통용되던 김종필식 선문답과 매우 대조적이다. 고도의 복선이 깔렸다는 김종필 씨의 말에서 무엇을 했다는 건지, 누구의 잘잘못인지 파악할 수 없다. 전형적인 정치인의 화법으로, 말 바꾸기와 책임회피에 유용한 방식이다. 고수끼리는 통한다는 이 화법에는 시민은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특권의식이 숨어 있다.…누구나 알아들을 비유를 구사하고, 누구의 잘잘못인지 분명한 노회찬의 화법은 자기 발언에 책임지는 말하기 방식이다. 상대가 누구든 논리적으로 설득하려는 대화 방식은 수평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 특권의식과 권위의식에 젖은 정치인들 사이에서 노회찬의 목소리가 빛났던 이유다. 그의 말을 너무 오래 공짜로 들었던 우리의 마음은, 안녕을 고하는 건지 붙잡는 건지 모를 사진 속의 손처럼 검고 쓰다." (경향신문, 2018.8.3.)
김종필에게는 인생의 좌우명이 두 개 있다고 한다. 하나는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이고, 다른 하나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여수(上善如水)다. 상선여수란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으며 물 흐르듯 순리에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2016년 2월 1일 경남 창원에서 "노동자 서민의 땀과 눈물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 그곳이 저 노회찬의 고향입니다"라고 20대 총선 출사표를 던지면서 노회찬은, "진보정치가 상선약수의 정신으로 민중의 바다로 나아가도록 온몸을 던지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노회찬이 가슴에 품고 있는 몇 안 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선약수(上善若水)다. 지난 1월의 <신영복 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상선약수는 노회찬이 마음의 스승으로 존경한 신영복 선생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내용 가운데 이것만은 꽉 잡고 읽으라고 권하고 싶은 두 개의 글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자신은 항상 낮은 곳에 둡니다. 그리고 결코 다투는 법이 없기 때문에 또한 허물이 없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이 물과 같다고 하는 까닭입니다."
"물은 흐르면서 점점 낮은 곳으로 자리하고 낮아질수록 차츰 모여서 갑니다. 산을 만나면 휘감아 돌고 언덕을 만나면 채워서 넘고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어 떨어지면서 끝내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물, 바다로 모입니다. 진보정치가 상선약수의 정신으로 민중의 바다로 나아가도록…" (20대 총선 창원 성산 노회찬 출마 기자회견문, 2016.2.1.)
노회찬의 상선약수나 김종필의 상선여수나 그 뜻은 같은 말이다.
누군가를 평할 때 말보다 중요한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파란만장했던 두 사람의 인생행로 가운데 과연 어떤 삶이 '물과 같은 삶'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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