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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집단자살체제 속에서 살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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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더이상 집단자살체제 속에서 살 순 없다" <'녹색평론' 김종철 교수 인터뷰> "풀뿌리 자치가 21세기 희망의 단초"
흔히들 외국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 대해 '역동적'이라고 말한다. '재미있다'고도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 사건, 폭탄 선언이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예측 불가능한 변화무쌍함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외국 기자들은 한국 기자가 부럽다고도 한다. 그토록 사건·사고가 많으니 기사 거리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 않냐는 얘기다.

지난 10일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도 이같은 한국 사회의 특징이 잘 드러난 경우다. 어쩌면 건국 이후 최대의 정치적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노 대통령의 폭탄선언이 나오자 그때까지 관심사였던 송두율 교수 사건은 물론 이라크 파병문제, 부동산값 폭등 등에 대한 관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국민들의 시선은 온통 재신임 쪽으로 쏠리고 있다.

이처럼 하루 하루 급박한 사건·현안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문명의 전환'을 얘기한다면 잠꼬대로 들리기 십상이다. 지난 5백여년간 서양의 주도 하에 계속돼 온 물질 위주의 탐욕스런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고 모두가 고르게 가난하게, 그러나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 새로운, 진정 인간다운 문명을 만들어 나가자고 주장한다고 해도 귀 기울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같다.

하지만 우리 사회 한 구석에는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이들은 단지 새로운 문명을 꿈 꾸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다운 사회를 현실로 만들기 위한 씨앗 뿌리기를 묵묵히 해오고 있다. 그 작업의 결말은 1, 2년내에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몇십년, 어쩌면 백년 이상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작업이 진정 가치 있는 일이라면 한번쯤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는 있지 않을까. 개인의 삶은 몇십년에 불과하지만 인류의 삶은 몇천년 지속되고 있다. 한번쯤은 세기 단위의 성찰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지난 12년동안 <녹색평론>을 발간하면서 국내 환경·생태 운동을 이끌어온 김종철 교수(영남대 영문과)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특히 김종철 교수는 지난 9월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를 시작하면서 21세기 대안 문명과 대안 체제 논의의 물꼬를 트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마침 노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이 있었던 지난 10일 저녁 강연을 위해 모처럼 서울을 찾은 김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이 인터뷰에서 지난 5세기간 지속돼 온 자본주의 문명은 '모두가 절망으로 빠져드는 집단자살체제'라고 비판하면서 21세기는 '평화와 환경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이를 위해서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과 세계 각지의 풀뿌리 공동체 차원에서 전개되는 주민 자치의 움직임에 주목하라고 충고했다.

특히 김 교수는 근대 이후, 국가와 자본주의, 대의제 민주주의로 상징되는 현 체제를 극복할 때,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대안 문명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인간 내면 심성의 고양이 필요한 일이나, 그것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정신주의적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현 체제가 안고있는 구조적인 모순을 직시하고 그를 극복하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번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의 진행으로 서대문의 한 음식점에서 50분간 진행됐다. 편집자

***'평화와 환경의 세기' 맞기 위한 준비가 부족해**

프레시안: 프레시안을 통해서도 1회 강좌가 소개된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는 어떻게 준비하게 되었는가?

김종철: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기는 20세기와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세계나 한국 모두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최근의 모습은 너무나 불길하다.

한국 역시 정권이 바뀌었다고 변화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환경 문제 같은 것은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다. 최근 국책 사업을 둘러싼 갈등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가 '환경과 평화를 위한 세기'를 맞기 위한 준비가 너무 안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이를 이끌어야 할 지식인 사회는 더욱더 그렇다.

그래서 우선 미약하지만 우리라도 "21세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노 대통령에 대한 기대, 어리석은 짓**

프레시안: <녹색평론> 2003년 1·2월호의 권두언에서 선생은 "노무현 당선의 의미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 선생이 "선거 가지고 들뜨는 것이야말로 후진성의 징표다", "선진국 따라잡기가 과연 좋은 것인가", "모두가 가난하면서도 고르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등의 얘기를 한 것을 읽고 정신이 번쩍 든 적이 있다. 마침 오늘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이 나왔다.

선생의 관심 범위와 멀긴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오늘 발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종철: 작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로 나왔을 때, 나도 기대가 컸었다.

평소 기성 정당 정치에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작년 대선 즈음에는 나도 기대를 많이 했다. 나는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사회의 지배 구조에 큰 변화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작년 대선 때, 노 대통령이 후보가 되고 열광적인 분위기를 보면서 이 지배 구조를 바꿀 큰 변화가 노무현 대통령을 통해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여러 가지 불리한 요소를 가진 그가 부각됐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일이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환멸감도 큰 것이 사실이다. 오늘 발표보고도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정권이 다시 한번 나라를 잘 꾸려가겠다고 각오를 한다면 필요한 절차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설마 불신임이라도 당하겠느냐?

***실망스럽더라도 노 대통령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어야**

프레시안: 아직도 조금 기대가 있는 것처럼 들린다.

김종철: 그렇다. 미련이야 완전히 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는 국민국가의 틀 속에 살고 있다. 사상적으로는 국민국가를 부정하더라도 이 사회 약자들이 국민국가 안에서 합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운명이라면, 기대를 끊을 수야 있겠는가.

프레시안: 미국에서 보인 행보나 부안·새만금 문제에 대한 개발주의적 태도, '2만불 시대'라는 표어에서 연상되는 박정희 시대의 개발 패러다임 등을 볼 때, 과연 희망을 걸어야 하는지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김종철: 그렇다.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절망할 권리는 없고 희망할 권리만 있다. 희망을 걸어야 비판이라도 하고 욕이라도 할 것 아닌가.

주변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박정희 전대통령이 연상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어떻게 보면 그게 당선에 이롭게 작용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박정희 전대통령을 아주 싫어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을 존경하는 풍조가 여전히 남아있다. 박력 있는 스타일에 대한 대중들의 선호도 있고. 이런 이미지가 개혁 추진 등 좋은 방향과 연결돼 긍정적인 모습으로 표출되길 바랄 뿐이다.

***21세기는 '평화와 환경의 세기' 돼야**

프레시안: 선생의 글에서 보이는 시간적 규모는 1~2년이 아닌 세기 차원의 사고다. 공간적으로도 국민국가를 넘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상정하고 있다.

김종철: 그 때문에 나를 보고 "수해 피해를 입어 복구에 나서야 할 때, 나무를 심자고 주장한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프레시안: 그런 시간적, 공간적 사고 속에서 '평화와 환경의 세기'를 지향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왜 '평화와 환경의 세기'를 지향해야 하는가? 왜 환경과 평화인가? 그 둘이 긴밀한 관련이 있는가?

김종철: 지금 자원 고갈, 생태계 오염 등 심각한 문제들이 우리 앞에 산적해 있다. 이런 생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인류 문명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하다. 특히 '지구 온난화'는 파국의 징후이다. 나는 이 문제들이 21세기 전반에 해결되지 않으면 인류 문명은 파멸한다고 생각한다.

또 지금 이라크 전쟁, 북핵 사태 등을 통해서 몇십년 동안 불안한 준전시 상태 속에서 느껴왔던 전쟁에 대한 공포가 현실로 대두되고 있다. 피부로 전쟁 위기를 실감하는 상황이다.

전쟁 문제는 환경 문제와 본질적으로 그 뿌리가 같다. 배타적으로 자기 이익만을 챙기다 보니 타자와 환경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고 평화적 심성이 파괴되었다. 또 자본주의 체제의 생활방식 자체가 바로 이런 폭력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 평화만 얘기하는 것은 허망한 얘기다. 21세기는 '환경과 평화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

***제한된 자원 고려할 때, 고르게 나누는 것이 최선의 방안**

프레시안: 선생은 방금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문화가 다른 사람과 환경을 배려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구조적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문제를 지적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다같이 고르게 살수 있는 사회'를 내놓았다. 하지만 그런 사회를 향해 가는 길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미국은 가장 큰 장애물이다. 미국은 세계 자원의 상당 부분을 소비하고 있다. 또 전세계의 소비 문화는 미국이 그 원류이다.

김종철: 나한테 해답이 있으면 어떻게 좋겠는가. 미국식 소비주의 경제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세계는 그걸 모방하지 못해서 안달하고 있다.

무기를 버려야 하는데 평화를 유지한다는 핑계로 계속 군비를 확장하고 있다. 이런 터무니없는 현실의 논리가 우리를 지배한다. 또 환경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돈과 기술을 앞으로 내세운다. 이것은 곧 과학기술 관리사회로 가겠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주류 사회의 노선이다.

하지만 지구는 닫힌 시스템이다. 지구가 가진 자원은 유한하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잠시 시간을 연장할 수 있을지언정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제한된 자원을 고르게 나눌 수밖에 없다. 그래야 평화와 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 내가 <녹색평론>을 펴내면서 일관되게 고르게 나누는 사회를 지향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한계 명백해**

이것은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느냐 못하느냐와도 상통하는 문제다. 선진국들이 몇백년 동안 민권 투쟁을 통해 달성한 인류가 만든 현실적으로 가장 설득력 있는 제도라고 교육받아온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문명의 전환을 절대 이룰 수 없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완전히 속임수 민주주의다. 민중이 하는 일은 4년에 한번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일 뿐이다. 실상은 각 정당들끼리 서로 공생하면서, 엘리트 집단 내부에서 교류· 교체를 해내는 일종의 독과점 체제에 불과하다.

내가 자치, 자율, 민중의 자급적인 생활과 같은 것을 강조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엘리트 독과점적 정치와 권력 구조가 계속되는 한 민중은 끊임없이 수탈당할 수밖에 없고, 민중 생활의 터전은 끊임없이 황폐화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새만금 문제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자치적 실험,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어**

프레시안: 옳은 얘기다. 그런 얘기가 실현되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새만금 문제만 해도 전북 주민들의 개발 욕구가 큰 추진력이다. 다들 돈 버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다. 기본적으로 모두 자본주의 사회에 얽매여 있다. 그런 대안적인 방향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는 현실적인 단초를 어디서 찾고 있나?

김종철: 세계 전역에서 주류 언론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문명과 생활방식에 대한 자치적 실험이 다양한 형태도 밑바닥부터 전개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학교에 있으면 잘 안 보이는 이런 움직임을 현장에서 감지하곤 한다. 먼저 풀뿌리 농민들을 들 수 있겠다. 현재 농민들은 말도 안 되는 농정의 결과로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농촌을 떠나지 않고 자기 터전을 지키면서 자기와 자기 이웃의 자급을 위해서 농사짓는 것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농민들이 존재한다. 이런 그들의 행동의 경제적 합리성의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또 곳곳에서 소규모 생활 자치를 꿈꾸는 조직들이 움직이고 있다. 서울에서는 그런 조직들이 안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비공식적 네트워크를 통해 이런 조직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생활협동조합 운동도 그 중 하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생협 운동 가운데 의사가 참여 하지 않는 의료 생협을 꾸려 보려는 움직임이다.

이것은 대단한 결의다. 흔히 의료나 건강문제는 전문가 집단이 선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고, 이것이 주류 문화의 논리다. 이제 이런 논리에서 벗어나 우리 힘으로, 우리 건강을 돌보는 움직임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굉장히 큰 저항정신이 들어있다.

프레시안: 그런 것이 현실로 가능한가?

김종철: 실제로 그것을 준비하는 그룹이 있다. 그런 움직임을 직접 준비하고 있는 그룹의 존재 자체가 현실성이 있다는 얘기다.

근본적으로 이런 움직임에는 인간이 건강을 유지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지금 이 세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온 서양식 근대문명의 기계론적 우주관과 세계관을 거부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을 추구한다. 죽음을 자연의 원리로 받아들일 것. 병원에 가서 생명부양 장치를 달고 인간답지 않게 죽어가는 것을 거부할 것. 병원의 산업화된 의료를 극복하는 것. 궁극적으로 스스로의 책임하에서 자율적으로 상호부조하면서 건강 문제를 서로 보살피는 것 등등.

앞에서 열거한 시도들이 많지는 않지만 작은 풀뿌리 조직들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의 희망적 조짐이다. 이런 움직임이 쌓이고, 경험이 공유되고 엮어질수록 우리 사회의 인간적인 건강성이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앞으로 교육에 대한 근본적 문제도 제기될 것**

교육문제만 해도 그렇다. 10년 전에는 한국 사회에서 상상도 못할 일들이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이다. 대안학교는 그야말로 통상적으로 쓰이는 용어가 되었고, 홈스쿨링을 실현하는 사람도 나오고 있다.

나는 궁극적으로 교육 자체가 필요 없다는 흐름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 교육은 인간이 갖고 있는 기본 잠재력을 무시하고, 제도의 틀 속에 넣어 상품으로 돈을 주거나 대가를 지불하고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교육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형성하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제도나 시스템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일하고, 생활하고, 놀이를 하는 가운데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조만간 우리 사회에서도 나올 것이다.

10년 전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 지금 상식이 된 것처럼, 지금 생각하지도 못한 또 다른 움직임들이 나와 근본적인 사회의 문화 변혁을 꿈꿀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하나의 거대한 기운이 될 것이다. 지금은 막연하게 느껴지고 미약한 것 같지만, 이런 단초들이 전체적으로 절망으로 빠져드는 집단 자살 체제 속에서 하나의 출구라고 생각한다.

***사빠티스타 요구는 세계 토착민의 공통된 요구**

프레시안: 사빠티스타도 그 중 하나인가?

김종철: 흔히 사빠티스타를 민족해방군이라고 번역해서 부르는데, 이것은 종래의 민족해방군과는 다르다.

민족 단위라기보다는 원초적인 민중 공동체 단위가 자기들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단순명쾌하다. 우리들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겠다. 우리가 잘하든 못하든, 가난하든 말든 내버려 둬라.

그들은 결코 멕시코 정치의 주류가 되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또 자주적 권리를 구걸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살도록 내버려 달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그들의 절규가 사빠티스타뿐만 아니라 세계 토착민의 공통된 요구하고 생각한다. 넓게 생각해보면 지금 한국의 민중 공동체가 갖고 있되, 각성하고 있지 못한 요구일 것이다.

***부안 투쟁은 세계사적 의미 지닌 사건**

얼마 전 부안에 다녀왔다. 태풍이 온 날도 빠지지 않고 매일 저녁마다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내가 간 날에는 청년, 할아버지, 할머니, 농민 등 지역 주민들 5천명이 모여 있었다.

물론 주민들의 이런 움직임은 핵폐기장이 생기면 자기 생활에 타격이 올 것이라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걸 그냥 이기적으로만 볼 것인가? 박정희 정권 이래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주류의 엘리트와 전문가들은 민중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을 조장해왔다. 조장 정도가 아니라 폭력적으로 밀어붙인 것이 사실이다.

내가 제일 딱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폭력을 당하면서도 희생자인 풀뿌리 민중 공동체는 국가의 발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희생을 감수하고 공동체의 생활 터전이 망가지는 것을 발전이라고 오인하기까지 했다. 이런 비극이 근본적 변화 없이 몇십년 동안 지속돼온 것이 현실이었다.

부안에서 본 것은 민중 공동체가 "이것은 아니다"라는 확실한 신호를 보낸다는 점이었다. 서울 사람들과 엘리트들이 뭐라고 하건 부안 주민들은 그것이 속임수라는 것을 풀뿌리 차원에서 느낀 것이다.

굉장히 감명 깊게 들은 것이 있다. 부안 읍내에 나왔던 그냥 평범한 촌로가 불필요한 전기가 켜져 있으면 나무란다고 한다. "이러니까 원전을 하려고 하지 않느냐" 하면서. 어지간한 식견이 있는 지식인들도 눈여겨보지 않는 현실의 메커니즘을 평범한 촌로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었다.

촌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수준이 굉장히 높다. 집회에서 나보고 나와서 한마디 하라고 해서 내가 그랬다. "여러분이 앉아서 투쟁하는 것은 단순히 부안을 살리는 것도 아니고 또 한국 안의 문제만도 아니다. 이것은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대단한 사건이다"라고.

사빠티스타의 자율적 투쟁과 부안 군민들의 투쟁은 근본적으로 같다. 정부가 판단착오를 해 역설적으로 풀뿌리 공동체를 정치적으로 의식화시키는 교육을 하고 있었다.

***반세계화 투쟁과 풀뿌리 자치 운동 동심원 그려**

프레시안: 선생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공동체 내에서 상부상조하면서 자치를 일궈내는 것 즉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추구하기 위한 월러스틴의 표현을 쓰자면 '반체제 운동'의 세계적 동향은 어떤가?

김종철: 우선 최근 칸쿤 WTO 각료회의 반대 투쟁 같은 세계적 저항 움직임이 있다. 1999년 시애틀 이후 계속해서 활동가들, NGO, 농민들이 모여 세계화를 이끌어가는 신자유주의체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 해오고 있다.

또 이런 큰 규모의 운동과 함께 삶의 터전에서 민중들이 자치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결정하는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이 두 가지가 서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나아가고 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근대 이후 국가-자본주의가 문제**

프레시안: 아까도 언급했듯이 우리는 국민국가 틀 안에 살고 있다. 또 역사적으로 보면 권력은 계속되는 것 같다. 심지어 일부 학자들은 국가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연합에 의한 세계 권력이 나올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그 반대쪽에서는 민중들의 세계화가 말해지기도 하고. 권력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서 대안 세계를 추구해야 할까?

김종철: 나는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이 완전히 없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근대 이후 전쟁이 갖는 문제점이다.

옛날에도 부족과 부족간 전쟁을 포함해 많은 충돌이 있었다. 인간 사회의 폭력과 충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완전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교육을 하고, 서로 갈등을 겪으면서 조정을 해나가야 한다. 그런 가운데 인간다운 문화가 실현되고 예술, 종교, 철학이 나오는 것이다. 종교, 예술, 철학이 필요 없는 사회는 로봇들의 사회지 인간의 사회가 아니다. 비극, 재난, 재앙 등 이런 불가피한 것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또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문제는 근대 이후이다.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이 횡행하고 생태적 파국으로 질주해가는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권력 욕망은 그 뿌리는 같을지 몰라도 여러 가지 면에서 근대 이전의 그것과는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아무리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해도, 삶 자체가 우리를 폭력으로 몬다.

뿌리부터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당장 여기 있는 물 한 잔도 상품으로 우리 앞에 나온 것이다. 물로는 이익을 얻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 콜라 같은 것을 만든 것이고.

요즘의 전쟁이 무서운 것은 옛날보다 더 잔인무도한 무기가 개발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전쟁이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것이 된 사실이 가장 끔직한 일이다. 자본주의의 순환적 경기불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쟁은 필수적이다. 전쟁의 군수품처럼 소모가 빨리 되는 상품이 없는 것도 이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근대 이전 사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몇몇 권력자들의 지배욕에서 비롯된 전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근대 이전 사회에서 대부분의 민중에게 전쟁은 남의 얘기였다. 국민 개병제도 국민이라는 개념 자체가 탄생한 나폴레옹 이후에나 가능해진 것이다.

국가와 자본주의는 쌍두마차다. 국가가 없으면 자본주의가 유지가 안 된다. 또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고. 이 둘이 긴밀하게 결합된 것을 극복할 수 있을지 여부에 따라 인류가 살아남고 인간다운 문화를 이룰 수 있을지가 결정될 것이다.

***극단적 정신주의로는 한계 명백**

최근 많은 사람들이 환경 문제를 포함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서 "인간의 내면 심성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일리는 있는 얘기다.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주는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내면은 평화롭지 못하다. 이런 폭력적인 심성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든지, 대안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실험을 해본다든지, 전쟁을 막는 운동을 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내면의 점증하는 공격성을 줄여야 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극단적인 정신주의는 현상을 외면하고, 인간성을 왜곡하는 것이다. 정신주의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물론 "내 이웃을 사랑하라" "자비를 가져라"와 같은 선인들의 가르침은 옳다. 하지만 인간은 어차피 죄와 결함이 많은 존재다. 그 현상을 무시하고 인간을 성인군자로 가정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대단히 비현실적인 얘기다. 현실의 구조적 모순에 눈길을 돌리고 그것을 극복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프레시안: 끝으로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에 대해 한두가지 더 묻겠다. 강좌를 하는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없는가? 비용도 꽤 부담이 클 텐데.

김종철: 외국에서 강사들을 데려오는 것이 번거로운 일이다. 하지만 비용은 영남대에서 전부 후원을 하기 때문에 걱정거리가 아니다. 그러고보면 영남대는 좋은 대학이다. 교수들의 힘으로 20년 전에 재단을 인수해 교수들의 자치로 운영되고 있는 것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굳이 구별해서 말하자면 민립대학이라고나 할까.

프레시안: 앞으로 국내의 주목할 만한 사례도 소개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종철: 그렇지 않아도 1년 이상 계속될 이 강좌에 두 번 정도 국내 인사를 초빙할 계획을 갖고 있다.

프레시안: <녹색평론>을 운영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가? 독자들은 많이 늘었는가?

김종철: 한 5년 동안 그대로다. 8천부 찍어서 유료독자 5천명한테 보내고 나머지는 후원하거나 서점에서 판매를 한다.

프레시안: <녹색평론>의 정기구독자 5천명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김종철: 그런 얘기를 하기도 한다. <녹색평론> 독자 중에는 매니아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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