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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100분토론의 첫 사회자' 정운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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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회찬, '100분토론의 첫 사회자' 정운영을 만나다 [노회찬 OOO를 만나다] '미완의 기록'으로 본 노회찬과 정운영

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해 되짚어보는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

오늘은 정운영 선생이 향년 62세로 돌아가신지 만10년이 되는 날이다.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해마다 줄어들겠지만 '진보논객의 맏형'으로, 경제학자로, 100분토론 첫 사회자로 큰 울림, 깊은 발자국을 남기신 분이다. (2015년 9월 24일 노회찬 트위터 글)

▲ 고 정운영 선생의 생전 모습과 그가 남긴 저서(광대의 경제학;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경제학을 위한 변명; 시지프의 언어; 피사의 전망대; 레테를 위한 비망록; 세기말의 질주; 신세기 랩소디;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2005년 9월 25일자 중앙일보는 '정운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별세'라는 제목으로 부음을 이렇게 전한다.
"정운영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24일 오전 9시 서울삼성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1세.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71년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을 졸업,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81년 벨기에 루뱅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서울대·고려대에서 강사로 활동하던 고인은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MBC 100분토론 사회자를 맡기도 했다. 고인은 최근까지 중앙일보에 '정운영 칼럼'을 집필해왔고 경기대 교수로 재직했다."
언론매체의 부음기사를 보면 그에게는 '광대의 경제학자'이자 진보 경제학계의 '큰 별'(<프레시안>), '대표적 경제 논객이자 언론인'(<미디어오늘>), '전 <한겨레> 논설위원'(한겨레), '칼럼니스트이자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 사회자'(매일경제), '경제 논객'(동아일보), '진보적 경제학자'(<오마이뉴스>), '이코노미스트이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경기대 경제학부 교수'(조선일보) 등의 수식어가 붙어 있다.
그의 부음 소식을 들은 오랜 지인들이 쓴 추도사 목록의 글쓴이와 제목은 이렇다:
김수행(서울대 교수), 「"이 못난 사람아! 왜 먼저 죽어"-정운영 선생 추도사」(<참세상>, 2005년 9월 25일); 조정래(소설가), 「정운영 형을 기리며-그토록 꼿꼿하고 당당했던 삶」(중앙일보, 2005년 9월 27일); 윤소영(한신대 교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위하여: 정운영 선생 추모…아카데미즘-저널리즘의 조화도」(<프레시안>, 2005년 9월 25일); 안수찬(한겨레 기자), 「정.운.영, 우리시대 논객을 위한 비망록」(한겨레, 2005년 10월 14일); 김민웅(성공회대 교수), 「인간적 진실을 소중히 했던 탁월한 인문주의자-추모사: 정운영 선생을 그리워하며」(<프레시안>, 2005년 9월 26일).

정운영은 누구?


1944년 3월 18일 충남 온양에서 태어난 정운영(鄭雲暎)은 1964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 「상대신문」을 매개로 학생운동에 투신해 학부를 '5학년'까지 다닌다. 대학 2학년 때인 1965년 9월 8일자 동아일보는 서울대 상대 「군화화형식」의 주동 학생 4명 수배 기사를 싣는데 정운영은 그 가운데 한명으로, 학교 당국으로부터 무기정학 처분을 받는다.

▲ (왼쪽) 군화화형식(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오른쪽) 동아일보(1965년 9월 8일)

왼쪽 사진은 1965년 9월 6일 서울대 상대생이 군화와 최루탄, 경찰봉을 불태우는 장면이다. 민심의 분노에 대학생이 가세한 4·19혁명과 달리 6·3은 학생운동을 통해 민심을 대규모로 결집한 최초의 사건이다. 군화화형식은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 시작해 한일협정 조인반대, 비준저지, 비준무효화운동으로 이어지는 6·3운동의 마지막 시위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60만 군에 대한 모독"이라며 분노한 사건이기도 하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6.3한일회담반대운동」). 1966년 8월 13일 서울 상대 지도교수회는 1년 전 8월 한일협정 비준반대 데모와 관련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정운영 등 3명의 처벌을 해제한다(경향신문 1966년 8월 15일).

▲ 경향신문 1966년 8월 15일
"군에 대한 모독, 박정희의 분노"는 가히 적반하장의 극치라는 점에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5.16쿠데타를 통해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군홧발로 짓밟음으로써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60만 군을 모독한 사람이 바로 박정희 본인이기 때문이다. 2010년 4월 19일 낮 12시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4.19 묘역에서 진행된 진보진영 합동참배식 자리에서 노회찬(진보신당 대표)은 이렇게 말한다.

4월혁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 땅의 민주주의는 그 어떤 경우에도 민중의 피와 눈물로만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왔고 앞으로도 피와 희생으로만 한 걸음이라도 전진할 수 있다는 엄연한 진실이다. 사실 4월혁명이 쟁취한 소중한 민주주의가 군홧발로 짓밟히고 나서 다시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그 결과 6월 항쟁도 있었고 두 번에 걸친 민주정부의 출범도 있었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우리의 과제는 민주주의다.

정운영은 1971년 서울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한국일보 기자생활을 시작한다. 중앙일보 기자를 마지막으로 그는 1981년 벨기에 루벵대(University of Leuven)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한다. 루벵대는 중세 이후 신학의 중심지이자 근대 이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중심지였다. 1982년 정운영은 유럽에서 좌파경제학을 연구한 김수행·박영호와 함께 한신대 경상학부를 만들었으나 1986년 겨울 신학부 중심의 대학운영에 대한 문제제기 등 학내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학장의 조기 퇴진을 요구하다 김수행과 함께 해직된다. 김수행은 1986년 호헌철폐운동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반독재민주화 대오의 단결을 위해' 두 사람이 스스로 사표를 냈다고 설명한다.

▲ (왼쪽) 동아일보 1986년 4월 2일 (오른쪽) 동아일보 1987년 2월 4일

이에 대해 오랜 지인인 손호철(서강대 명예교수, 정치학)은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외로울 때도 많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두 명 있다. 돌아가신 정운영 선생과 지금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계신 김수행 선생이다. 그들은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후 세대에 뿌리를 내리게 한 분들이다. 그 두 분은 소위 민주대학이라고 불리던 한신대학교에 재직하다가, 민중신학으로 유명한 안병무 교수 같은 분들과 학내 문제로 충돌하다가 결국 해직됐다. 그때 그 분들은 '박정희나 전두환하고 싸우다 잘리면 민주투사라도 되지만, 최고의 민주투사한테 잘린 우리는 뭐냐?'라는 얘기를 했다."(<레디앙> 인터뷰, 2012년 1월 14일)

한신대를 떠난 이후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한 정운영은 1999년까지 <한겨레> 비상임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이후 10년 동안 한겨레 '전망대' 칼럼 등을 쓰며 사회적 명성과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는다. 1999년 외환위기의 충격 속에서 한겨레신문사는 긴축경영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정운영은 사표를 썼으며 2000년부터는 중앙일보로 옮겨 '정운영 칼럼'을 집필한다. 1992-93년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마르크스주의의 변화의 계기로 삼자는 동인지 <이론>의 초대 편집위원장으로 정운영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혼란에 빠져 있던 이론 진영의 맏형 역할을 맡기도 한다. 한편 1999년 10월 시작된 MBC '100분토론'의 초대 진행자를 맡아 정운영은 날카로운 질문과 매끄러운 진행으로 토론 프로그램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게 하는 등 토론 문화의 새 장을 여는 데도 크게 기여한다. EBS <정운영의 책으로 읽는 세상>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활동한다. 엄청난 다독가로도 유명했던 정운영의 장서 2만여 권은 고인의 뜻에 따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기증된다.

<광대의 경제학>(1989)에서, 유고집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2006)>와 <정운영 선집 시선>(2015)까지

평소 "경제학은 밥의 크기와 자유의 영역을 확대하는 과제에 보다 충실한 학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해온 정운영은 1989년 주로 신문 등에 기고한 사회 단평들을 모아 엮은 <광대의 경제학>(까치)을 세상에 내놓는다. 「광대에 대하여」란 제목이 붙은 책의 서문에서 그는 학자로서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던 자신의 삶이 가져다 준 글쓰기의 첫 번째 결과물을 내놓으며, '광대'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글쓰기가 놓인 위치와 역할을 돌아보고 또 앞으로 나아갈 길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광대는 때때로 권문(權門)과 벗하고 세가(勢家)와 농하는 '무엄한' 자유를 누리지만 그러나 결국은 그들이 던져주는 동전 꾸러미나 무명조각에 의지해 살아가는 근본을 벗어날 수 없다. (......) 그러나 내가 하는 말 한마디나 내가 쓰는 글 한 줄이 '진정으로' 돈과 권세를 조롱하지 못하고, 동전 몇 닢과 무명 몇 자투리를 구하는 용도로 허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만은 항상 두려움으로 간직하고 있다."

2006년 9월 정운영의 1주기에 맞춰 유고집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웅진지식하우스)가 출간된다. 서문을 쓴 고인의 둘째딸 정유신씨는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결국은 아버지가 언제나 돌아가고야 마는 '인간적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라고 요약한다. 그의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칼럼집인 이 책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다방면의 글들이 실려 있으며, 핵심을 명료하게 짚어주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매우 폭넓고 다양하다. 칼럼 하나하나에 깃들인 다양하고 폭넓은 비유와 분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논리정연한 말솜씨는 부러움과 함께 지적 자극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2016년 10주기를 앞두고 그의 글들이 또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다. <광대의 경제학> 이후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까지 총 9권의 칼럼집에서 "지은이의 사상을 잘 반영하면서도 여전히 시의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글들을 가려 뽑은" <정운영 선집 시선>이다. 고인과 절친했던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가 10주기에 맞춰 쓴 장문의 추도사(「영생하는 영혼의 소유자」)와, 그의 대학 학과 선배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신영복 교수의 추천사가 붙은 <시선> 역시 고인의 평생 화두라 할 '인간적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곧 "더 나은 삶과 더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이야기들이다(한겨레, 2015년 9월 18일).
조정래는 "정 형은 사람의 사람다운 세상을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길을 택했고, 한 번 택한 그 길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이 세상의 빛이고자 했습니다. 그 선택의 삶을 한평생 살고 떠난 정 형이 남겨놓은 것은 전세 아파트라는 가난이었습니다. 정 형의 삶이 그토록 고달프고 외로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이 안 될 것입니다. 위 수술 이후에 줄곧 병앓이를 해왔다는 사실도, 당신이 몇 번씩 입원 퇴원을 거듭하면서도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하고 마지막 길을 떠난 것처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큰 키에 깃 올린 바바리코트가 잘 어울렸던 그 멋진 모습이 화장터에서 백골 한 줌으로 변해 나오는 것을 보고서는 정 형이 영영 떠났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벌써 10주기라니, 세월의 허망감 앞에서 잠시 망연해집니다. 세상은 산 사람들의 것이고 죽은 사람은 금세금세 잊히게 마련인데 정형은 10년이 지났는데도 사회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고 추도한다. 신영복의 추천사는 이렇다. "때로는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을 생환하며, 때로는 고고한 철학적 사유의 세계로 비상하며, 때로는 정치경제의 집요한 욕망을 과녁으로 삼아, 그의 시선이 착목했던 곳을 다시 한 번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그를 일찍 떠나보내고 마음 아파했던 독자들이 그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정운영이 가슴 속에 늘 새기고 있던 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진보'가 그런 표현 중 하나다. 칼럼에서 약자를 변호하고 강자를 질타한 이유다. 감원 선풍에 가슴 졸이는 가장의 처지를 위로했고(162-164쪽), 마녀사냥의 희생자로 몰린 소설 <태백산맥>을 옹호했다(322-324쪽). 늦게 가는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세계화, 패권 국가의 이중 잣대(116-119쪽), 386세대의 포퓰리즘적 정치행태(212-215쪽)도 통렬하게 비판했다. 남북문제는 쌀 몇 섬과 돈 몇 푼을 따질 일이 아니라며, 이산가족 상봉조차 못하는 양쪽 지도자들의 옹졸함을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179~189쪽). (김영욱, 「[책 속으로] 떠난 지 10년…다시 만나는 정운영」, 중앙일보, 2015년 9월 19일).

▲<광대의 경제학>,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시선>

정운영과 노회찬과 한겨레신문

1988년 5월 15일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모여 국민주 모금 형태로 이뤄진 한겨레신문의 창간은 우리 언론사에 일대 쾌거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책임'과 '공정'과 '소통'을 표방한 한겨레신문은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편집위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하였고, 종합일간지 최초로 창간 당시부터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도입한다.

▲ <한겨레신문> 창간호
정운영은 한겨레에서 1988년부터 1999년까지 일한다. 창간 초기 한겨레 1면의 대표 상품이었던 '한겨레 논단'은 칼럼을 1면에 배치한 시도 자체가 파격이었으며 글도 빼어났다. 한겨레는 사내 논설위원을 최소화하는 대신에 한국사회에서 손꼽히는 글쟁이들을 논설위원으로 모셨는데 리영희(국제와 정치), 최일남(문학과 문화), 김금수(노동), 정운영(경제), 조영래(법조), 최장집(정치) 등이 초대 논설위원을 맡았다. 사내에서는 김종철, 신홍범이 초대 논설위원을, 권근술 편집이사가 논설간사를 맡았다.
'경제전망대'에서 '전망대'로 다시 '정운영 에세이'로 문패를 바꿔가며 창간 때부터 10여 년 동안 쉼없이 경제담론을 생산한 정운영의 칼럼은 팽팽한 장력(張力, tension)이 돋보이는 글로 인기를 끌었다. 윤기 흐르는 문장과 삐딱한 눈으로 중심부를 헤집어내는 내공은 칼럼의 전범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르크스 경제학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지론은 한치의 빈틈없는 사유로 녹아들었다. 글의 결은 기운 흔적이 전혀 없을 정도로 정치했다(「모두가 침묵할 때, 그들의 외침이 세상을 깨웠습니다-[한겨레 창간 20돌] 세상을 바꾼 20년」, 한겨레, 2008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에 노회찬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89년 12월 26일자 「'인노련 재건' 3명 구속」 기사로, 인민노련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가입 혐의로 권우철과 함께 구속됐다는 내용이다. 노회찬은 1989년 12월 23일 체포되어 다음날인 12월 25일 구속,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를 거쳐 1992년 4월 1일 청주교도소에서 출소한다.

▲한겨레, 1989년 12월 26일자
2011년 3월 3일 한겨레 이인우 기자는 한겨레신문 창간 때부터 주주로 참여한 노회찬을 인터뷰하기 위해 노원구 상계동에 위치한 마들연구소를 방문한다. 한겨레 지면을 통해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는 이러했다(「[한겨레가 만난 사람]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 한겨레, 2011년 3월 14일).
-정치가로서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꼽으라면?
"얼굴 말고는 단점이 뭐 있나?(웃음) 농담이다.(지난 선거 때 상대 후보가 젊은 미남형이어서 얼굴 때문에 졌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들었다.) 장점이라면 친화력? 아무리 골수 한나라당 지지자라도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없다. 일반적으로 보수우익단체로 알려진 보훈 5단체와도 잘 지낸다. 그분들 중에는 내 자원봉사를 자청해주시는 분들도 계시니."
-내년 선거는 노회찬 개인으로도 매우 중요한 이벤트다.
"지금 진보진영이 내게 부여한 사명은 서울에서 진보정당 최초의 지역구 의석을 확보하라는 것이다. 그 소명을 꼭 달성하고 싶다. 청년시절부터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내가 가졌던 꿈은 대부분 현실로 이뤄졌다. 그것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꾸는 꿈도 머지않은 장래에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전쟁 걱정이 없는 나라, 학력과 신분으로 차별받지 않는 나라, 일자리가 많은 나라, 애 낳고 기르는데 불편함이 없는 나라, 병원 가는데 걱정이 없는 나라, 온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아는 나라… 이런 나라가 현실에서 꼭 불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과거의 내 소망이 다 이뤄졌듯이 내 살아생전에 이뤄지는 것을 보고 싶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빠를지도 모른다."
(…)
-꼭 당선되길 바라며, 우문 하나 더 하겠다. 내년 대선에서 어떤 후보가 야권을 대표할 만할까?
"? (…)"
-민주당의 잠룡들, 민노당의 이정희씨, 국민참여당의 유시민씨, 기타 정치권 밖의 젊은 기수들….
"그건 앞으로 국민과 당원들이 결정할 문제이지, 이 자리에서 내가 뭐…."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 말 하고 나중에 엄청 후회할지 모르겠다'며 그는 입을 열었다. 엉뚱한 질문을 한다는 투의 난감한 표정이 어느새 특유의 정치적 감각을 되찾은 듯 꿈 많은 소년의 홍안으로 바뀌더니, 목소리의 톤이 살짝 높아졌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을 떠나 한 사람의 진보적인 자유시민으로서, 한국에서 제대로 된 진보정당 하나 키워보려고 20년을 노심초사해온 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으로서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구도는 참여당 같은 자유주의 정파가 집권 여당을 하고, 내가 속한 진보정당이 제1야당이 돼 한국 정치판을 한번 멋지게 휘저어보는 것이다. 물론 그다음은 우리가 집권당이 돼 '내가 꿈꾸는 나라'를 만들어보고 싶다. 어떤 분들이 트위터에 '언젠가 노회찬이하고 유시민이가 큰 판에서 한판 붙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로서는 불감청 고소원이다. 하하."

ⓒ노회찬 전 의원 트위터

2013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 창간 25돌 축하 글과 함께 한 장의 사진을 트위터에 올린다.
팔순 노모께서 종이상자로 직접 만든 신문받이함입니다. 매일 새벽 가장 먼저 읽으시는 어머니께선 신문이 차가운 시멘트바닥에 던져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다. 한겨레신문 창간25돌 축하드립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독재자 히틀러'를 통한 만남

1988년 9월 27일자 한겨레신문 [정운영 칼럼]에 실린 글의 제목은 「찰리 채플린의 '현대' 경제학」이다. 정운영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1936년 당시의 미국을 무대로 해서 만들어졌지만, 그 '현대'를 오늘까지 그대로 연장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고 말한다. 경제에서 시간은 돈이고, 돈은 시간을 수탈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러므로 노동력이 상품으로 등장하는 사회에서, 즉 몸뚱이 하나로 벌어먹어야 하는 사회에서 얼마를 일하고 얼마를 쉬느냐는 문제는 노동자에게는 생존의 조건으로 환산되지만, 그것을 고용하는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오직 얼마를 벌어 주고 얼마를 잃게 하느냐는 화폐의 수량으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감옥에는 적어도 실업이 없어서 안심할 만했으나 드디어 어느 날 감옥으로부터의 '해고'가 결정되자, 우리의 엉큼한 듯 어수룩한 주인공 찰리는 이 부당한(?) 처사를 한사코 거부한다. 직장이 없는 노동자에게는 감옥만이 자유롭다는 이 통렬한 야유에 물론 모두가 박수를 친 것은 아니었다. 나치 독일의 선전상 파울 괴벨스는 엉뚱하게도 표절을 이유로 이 영화를 고발했고, 그리고 미국 자본주의는 그 '불온한' 제작자 채플린에게 분노와 앙심의 칼을 갈기 시작했다. 분명히 채플린은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었지만, 허스트 계열의 신문이나 후일 매카시즘의 선동자들은 굳이 그것을 '적색'으로 보려고 했다. 그래서 채플린은 미국을 떠났고 그의 영화는 극장을 떠나야 했다. 물론 그것은 미국만의 극장이었다.

2009년 11월 <씨네21>을 통해 노회찬(진보신당 대표)을 만난 영화감독 장항준은 "대표님께서 지금까지 보신 영화 중에 가장 좋았던 영화 세 편을 꼽는다면요?" 라는 질문을 던진다. 노회찬의 답은 이러했다. "<모던 타임즈>를 우선으로 꼽고 싶어요.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워낭소리>. 세 번째는 <로큰롤 인생>이라는 다큐멘터리영화. 다큐멘터리는 스토리를 강제하기가 쉽지 않은데 아주 절묘하게 스토리가 만들어졌고, 메시지 자체도 강렬하더라고요. 근간에 본 영화 중에서는 제일 좋았어요."

※ 참조) 한편 <진보의 파수꾼>에서는 "두고두고 생각나는 영화는 무엇이고, 배우로는 누가 있습니까?" 라는 정운영의 질문에, 노회찬은 "감옥에서 본 탈옥 영화 <빠삐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희랍인 조르바>의 앤서니 퀸을 매력적인 배우로 생각합니다."라고 답하기도 한다.

▲ 찰리 채플린 영화 '모던 타임즈' 포스터


2018년 7월 24일 '말러의 인간적 독서'의 트위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노회찬은 찰리 채플린 같은 사람이었다. 늘 유머러스했지만 항상 슬픔을 말하며, 정치가 기득권의 행복에 봉사할 때 약자는 기본적인 삶도 갖지 못함을 애처롭게 말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채플린의 말처럼. 노회찬은 우스운 정치의 고통을 열연한 정치인이었다."

찰리 채플린은 무성영화 <모던 타임즈>에 이어 첫 유성영화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 1940)>를 세상에 내놓는다. <위대한 독재자>는 히틀러를 모델로 독재의 폐해를 그린 작품이다. 찰리 채플린이 제작·각본·감독·주연을 도맡았고, 1인 2역(독재자와 이발사)으로 영화를 이끌어 간다. 이 작품은 각종 창작물에서 자주 시도되는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데,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독재자가 된 이발사, 위대한 독재자의 연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실상 특별히 다른 줄거리가 있다기보다는 당시 서슬 퍼렇던 히틀러를 소재로 직접적인 조롱과 팬터마임(pantomime, 몸짓과 표정으로 내용 전달)을 탁월하게 결합했다는 점에서 특히 유명한 작품이다. (오랫동안 채플린의 팬이었던 히틀러가 이 영화를 몰래 연속으로 두 번 봤다는 얘기도 있다.)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와 <위대한 독재자> 때문에 1950년대 미국 매카시즘의 표적이 되어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

정운영의 책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까치, 1990)는 「히틀러와 채플린의 연대를 마감하며」라는 글로 마무리된다. 이 글은 정운영 스스로 '반성의 연대'라고 규정했던 1980년대를 마감하는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의 국회 증언을 앞두고 작성된 것이다. 그에게 찰리 채플린은 "가슴 시린 '해학'으로 인류의 고통을 잠시나마 덜어주었던 배우"였고, 히틀러는 "이글거리는 '광기'로 한때 인류를 재앙으로 몰아넣었던 독재자"이자 '1980년대의 전두환'이었다.
"…'핏빛 5월'의 그 선열한 절규는, 바로 피를 불러왔던 장본인이 오늘 오후 텔레비전 앞에서 어떻게 교묘한 연기로 증언하고 그래서 그 공모자들이 얼마나 신명나게 안도의 축배를 터뜨린다고 하더라도, 80년대의 광기가 역사에 남긴 철저한 각인으로 쉽게 지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청산은 결코 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운영이 <위대한 독재자>의 채플린과 히틀러를 통해 전두환과 '5월 광주'를 호명했다면, 2017년 7월 25일 <교통방송>(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히틀러와 박정희의 유신을 함께 등장시킨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장님이 망해서 월급을 떼인 적도 있지만 사장님이 같이 살아야 저도 산다는 생각으로 노동청에 고발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이런 어떤 공동체 의식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는 이언주(국민의당 국회의원)의 발언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 것이다.

"제가 이 발언을 듣고 섬뜩했던 것은 뭐냐면, 이게 바로 유신입니다. 이게 바로 전체주의에요. 강자가 공동체를 위해서 약자에게 양보한다. 이렇게 돼야 말이 되는 건데 약자한테 공동체를 위해서 약자가 강자한테 양보하라. 북한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노동삼권 유보하자. 이런 얘기들 있잖아요. 이게 크고 작게 우리에게 민족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개인이 희생해야 된다라는 그런 어떤 법칙처럼 관철되고 있는 거거든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가정폭력 정도는 눈감아야지', '우리 회사 기업 이미지를 위해서 직장 내 성폭력, 그냥 묻어두고 가야지. 그런 것 가지고 무슨 경찰서 들락거리냐. 넌 공동체 의식이 없는 거야.' 조폭문화가 딱 이런 거잖아요. 조직을 위해서 너는 엎드려, 당해. 이런 것들이, 이게 나중에 가면 히틀러까지 가는 거죠. 우리는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고 이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을 드나들었던 건데. 이런 것이 마치 굉장히 자연스러운. 쥐들이여 고양이 생각도 해 주자…."

MBC <100분토론> : '1대 진행자' 정운영과 '최다출연자' 노회찬

'젊은 토론, 대담한 주제 선정,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토론'을 표방하며 지난 1999년 10월 21일 '무엇이 언론개혁인가'를 주제로 첫 방송을 시작한 MBC <100분토론>. '매주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와 현안을 토론 주제로 선정하고 있는 <100분토론>은 소통이 부족한 한국사회에 새로운 공론장을 마련하는 등 공영방송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는 호평을 받는다.
은 정운영과 노회찬 두 사람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정운영은 <100분토론>의 초대 진행자(1999.10~2000.6)였다. 김서중(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은 "다른 방송사의 토론 프로그램과는 달리, <100분토론>은 현안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논쟁을 부각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민주적, 합의적으로 의견을 전달할 수 없는 구조라면 핵심적인 논쟁이 벌어지지 못할 가능성이 큰 데, 그럼에도 <100분토론>은 실제 다뤄야 할 다양한 의견을 전했다"고 평가한다. 이어 "<100분토론>이 대표 토론 프로그램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진행자의 역할이 컸다"며 "정운영, 유시민, 손석희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회자들은 주제에 대한 장악력이 높았기에 토론을 잘 이끌어 낼 수 있었고, <100분토론>이 우리나라 대표 토론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덧붙인다(<미디어스>, 2009년 11월 19일).


▲ MBC <100분 토론> 사회자로서의 정운영

정운영의 후임은 시사평론가 유시민이었다. 당시 전격적인 진행자 교체 배경에 대해 MBC는 "정운영씨가 아카데믹하고 계량적인 진행으로 프로그램을 잘 이끌었지만 라이브(생방송) 토론 프로의 역동성을 살리는 데는 연령적인 한계가 있어 좀더 젊은 진행자를 3개월전부터 물색해 왔다. 유시민씨는 신문 등에 많은 칼럼을 기고하며 논리적 능력을 입증했고 순발력·적응력 등 방송진행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어 캐스팅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정운영의 진행으로 프로가 시작된 지 8개월밖에 지나지 않았고, MBC 스스로 "네티즌들 사이에 '정백토'로 불리며 토론프로 사상 최고 시청률을 올리는 등 토론문화에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한 바도 있어 뭔가 석연치 않은 진행자 교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운영은 "군자교절불출악성(君子交絶不出惡聲·군자는 남과 절교를 한 뒤에도 그 사람의 악평을 하지 않는다)"이라며 자신의 퇴진 이유에 대해 말을 아꼈다.

역대 MBC <100분토론>의 진행자와 진행기간을 보면 아래와 같다.

▲ <100분 토론> 역대 진행자 명단

2004년 1월 9일 오후 7시 문화방송 본사 회의실. 노회찬은 '언론노조 중앙집행위 및 민주언론실천위 합동수련회'에서 '17대 총선과 노동조합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을 한다. "9시 뉴스에서 매일 10초씩 나오면 민주노동당은 10명 당선된다. 1년 내내 30초씩 나오면 30명 당선되고 120초 나오면 120명 당선된다. MBC 100분토론은 지난 6개월 간 한 번도 민주노동당의 출연을 허용하지 않았다."

1주일 후인 2004년 1월 15일 , '노회찬 어록'의 탄생이 시작된 날이다.
"50년 동안 정치를 끌어온 분들, 지금 말이죠, 학교에서 학생들이 이 정도로 학생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유기정학 내지 무기정학입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 국민들이 보기에는 유기정학 내지 무기정학감이에요. 그러면 이번 선거 다 안 나와야 합니다. 한 4년 동안 유기정학 당해야 돼요. 그런데 왜 자꾸 나오려고 그래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판갈이를 해야 된다, 이런 얘기입니다."

'노회찬의 어록'은 3월 20일 KBS 심야토론(「급변하는 민심 어떻게 볼 것인가」)을 계기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4월 3일 KBS 심야토론(「17대 총선 국민의 선택을 묻는다」)에서 정점에 달한다. 3월 20일을 기점으로 민주노동당은 '바람'을 타기 시작, 차분히 축적되던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급등세로 전환한다. 3월 20일 이후 인터넷에 '노회찬 어록'이 유행하고, 이런 현상이 거의 모든 방송사 시사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민주노동당 지지율 향상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된다.

"50년 묵은 정치 이제는 갈아엎어야 합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서 고기 삼겹살 구워 먹으면 판이 시꺼매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사실 지금 한국의 야당은 다 죽었습니다. 죽은 게 아니라 다 자살했습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3월 20일)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불법대선자금 많이 받은 순으로 발언도 많이 하는 겁니까?" "산천어·열목어가 갑자기 나타났다고 자랑인데, 이들도 3급수·4급수에서는 돌연변이가 아닌 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차떼기 야당, 탄핵 야당, 냉전야당, 지역주의 야당, 이런 야당들은 이제 좀 물러서야 됩니다. 이제 역할이 거의 다 끝났거든요. 면허가 정지가 아니라 다 취소되는 상태에요 지금 상태가. 물론 개중엔 장롱면허도 있는 것 같은데…." (4월 3일)

MBC <100분 토론>에 32회를 출연하며 최다 출연 타이틀 보유자인 노회찬은 동갑내기 손석희와 함께 2000년대 한국사회 TV토론 문화를 선도한다. 이명박 정부의 MBC장악 시나리오에 의해 쫓겨나게 된 손석희의 2009년 마지막 <100분토론>에 참석한 노회찬은 자칫 무거워질 수 있었던 마지막 방송에서도 특유의 웃음을 놓치지 않는다. "(제가) 발언이 길지도 않은데 (손석희 진행자가) 자르고 그래서…. 개인적인 소원이 제가 사회를 보고 손 교수님을 토론자로 앉혀서, 가차 없이(웃음)…. 그게 제 소원이었는데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정철운, 「손석희와 노회찬」, <미디어오늘>, 2018년 7월 25일).

▲ 2009년 11월 당시 방송화면 갈무리

'언론인' 정운영과 '언론인' 노회찬

진보 경제학자 정운영에게 '언론인'이라는 타이틀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기자 출신이자, 명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날린 한겨레와 중앙일보의 논설위원, MBC 100분토론 초대 진행자 등의 경력과 함께, 언론인클럽 언론상 신문칼럼상(1996), 논평비평부문 삼성언론상(1999) 수상 등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노회찬의 경우 노동운동가, 진보정치가로서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언론인으로서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원회) 시절인 1993년 5월 18일 노회찬은 한국 사회 노동계 최초의 노동 일간지이자 유일한 노동전문일간지인 <매일노동뉴스>를 창간해 2003년 9월까지 10년간 대표 및 발행인을 맡는다(※ 매일노동뉴스의 PC통신망 배포는 1992년 7월 18일부터 시작). 정운영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을 지내면서 빚을 많이 지게 되는데 IMF 외환위기 때는 이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다고 털어놓는다(<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92-93쪽).

초대 편집국장을 맡은 김태균의 회고에 따르면, 지면 발간과 관련해 진정추 내부의 반대가 컸는데, 그때 노회찬이 가능성을 보고 해 보라고 해서 어렵게 성사되었다고 한다. "진정추가 일간지 창간에 반대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매일노동뉴스 출발은 어려움 그 자체였다. 노회찬 당시 대표와 직원, 지국장들의 헌신에 기초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을 인쇄하면 고속버스에 실어 보냈고 새벽에 지국장들이 터미널에서 받아 직접 배달했다. 조승수 전 의원도 매일노동뉴스를 배달하던 지국장 중 한 명이었다."(연윤정 기자, 「[매일노동뉴스 초대 발행인 노회찬을 떠나보내며] 나무에서 숲이 되기까지 함께한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매일노동뉴스>, 2018년 7월 30일).

노회찬은 <매일노동뉴스>의 편집방향으로 '자주적·민주적 노동운동의 발전에 부합하는 것'과 '합리적 노사관계의 정착'이라는 두 가지를 꼽는다. "상호 실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노사의 대립을 인정하고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노회찬의 합리적 노사관계이며, "노·사·정 각 부문의 빠르고 풍부한 정보의 제공을 통해 노사 양쪽이 서로 상대방을 정확하게 이해할 때 노동운동의 과학화와 합리적 노사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매일노동뉴스>는 1996년 11월 25일부터 노사 관련 정보를 하이텔‧데이컴‧나우누리 3대 통신망에 동시에 올려 새롭게 발돋움한다(한겨레, 1996년 11월 25일).

1996년 4월 25일 <매일노동뉴스>(발행인 노회찬) 지령 1,000호 발행 기념 리셉션이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된다. 조남홍(한국경영자총협회 상근부회장) 김호진(고려대 노동대학원장) 박인상(한국노총 위원장) 김근태(국민회의 부총재) 진념(노동부 장관) 박형규(목사, 정치개혁시민연합 상임공동대표) 장을병(민주당 공동대표, 국회의원) 권영길(민주노총 위원장) 등이 참석해서 축하해준다.


▲ <매일노동뉴스> 지령 1000호 기념식

<매일노동뉴스>가 제대로 주목을 받은 시점은 1998년 5월 창간 5주년 및 지령 1500호가 나오던 시점이다. '노동부 장관이 매일 아침 가장 먼저 펼쳐보는 신문은?'이라는 질문에 노회찬은 "매일노동뉴스일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양대 노총위원장을 비롯해, 노조 관계자들, 심지어 노동담당 기자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고 그는 자부한다.
당시 노회찬은 한 인터뷰에서 "80년대 노동운동 현장에서 헌신했던 사람들이 새로운 정세 속에서 노사관계 발전에 기여하고자 만든 것이 매일노동뉴스입니다. 그 운동의 정신과 열정이 없었다면 오늘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고 있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했다는 것이 신뢰를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5년 전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것처럼 우리는 앞으로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갈 것입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한겨레21> 208호, 1998년 5월 21일). 그는 또 다른 인터뷰에서 "노사문제 해결의 관건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기업주는 노동자를 생산의 도구로만 여길 게 아니라 동반자로서 협력을 요청하면 합리적 대안을 찾는 게 어렵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1999년 11월 11일 고려대 노동대학원이 창립 5주년을 기념해 매일경제신문사와 공동으로 제정한 '제1회 노동문화상'에 <매일노동뉴스>(발행인 노회찬)는 노동언론 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2001년 6월 8일 창간 8주년 기념식에서 노회찬은 이런 말을 남긴다. "노사관계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면서 매일노동뉴스 창간 8주년을 축하하고 관심을 보내 준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앞으로 매일노동뉴스는 '민주주의의 진전'이란 시대적 과제를 진전시키는 데 매진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분명히 해 나갈 것이다."
2009년 1월 5일 노회찬은 매일노동뉴스 지령 4000호 기념식 및 <현장을 가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이렇게 회고한다. "신문을 창간할 당시 나중에 경영이 어려워져도 매일 나올 수 있도록 '매일'이라는 글자를 꼭 넣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매일노동뉴스가 나무에서 숲이 되기까지 많은 관계자와 독자의 애정이 있었다."
2012년 5월 18일 매일노동뉴스 스무 번째 생일맞이 겸 전·현직 임직원 방담회 자리에서 노회찬은 "초창기 어려운 조건 속에서 매일노동뉴스를 이끈 사람들의 열정과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매일노동뉴스도 없었을 것이다. 매일노동뉴스를 떠난 지 10년이 됐지만 몸만 떠났을 뿐 마음은 늘 가까이 있었다. 매일노동뉴스가 더 큰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진다. 나도 있는 힘, 없는 힘 다해서 돕겠다"는 뜻을 피력한다.

▲노회찬 전 의원이 당시 트위터에 올린 사진
2012년 10월 31일 노회찬은 자신의 트위터에 매일노동뉴스 창립 20주년 기념식 사진을 올리며 "매일노동뉴스 창립 20주년 지령 5천호 기념식이 프레스센터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창간을 주도하고 당시부터 발행인을 10년간 맡아온 사람으로서 감개가 무량합니다.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라고 매체에 애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진 속 "노동, 세상을 꽃피우는 힘"이라는 글귀는 신영복 선생이 2012년 매일노동뉴스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써 주신 휘호다.


"노회찬 대표는 매일노동뉴스를 떠나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도 언론인터뷰나 방송프로그램에 나갈 때 자신의 프로필 3개 안에 꼭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을 넣었습니다. 그만큼 매일노동뉴스를 아끼는 마음이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18년 7월 23일 저녁. 빈소가 마련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모인 노회찬 매일노동뉴스 대표시절 직원들 자리에서 나온 얘기다.

<매일노동뉴스>는 고인의 영결식이 열린 7월 27일자 신문에 고인을 애도하는 광고를 게재한다. 그의 후배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매일노동뉴스를 만든 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던, '10년간 매일노동뉴스를 경영하며 마신 소주가 3천병, 맥주는 1만병 가까이 되지 않을까 싶다'던 노회찬 매일노동뉴스 초대 대표. 당신의 노고, 의지, 꿈 잊지 않겠습니다. 매일노동뉴스 임직원 일동"


▲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제1회 노동문화상 노동언론부문 <매일노동뉴스>(1999년 11월 11일); 전국금융산업노조(위원장 이용득) 감사패 <매일노동뉴스> 대표 노회찬 수상(2000년 11월 22일 ); 전국언론노조(위원장 최문순) 시상 특별상 <매일노동뉴스>(2000년 11월 24일); 민주언론상 특별상 활동부문(2018년 11월 23일); 매일노동뉴스 임직원 일동 감사패(2003년 12월 19일 )
'진보논객의 맏형' 정운영,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을 만나다

2004년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는 정운영 경기대 교수가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과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만나 노회찬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본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랜덤하우스중앙, 2004)을 내놓는다. 출판사 측이 '사람과 사람'이란 이름으로 기획한 인물 인터뷰 시리즈 첫 번째 책이다. 노 의원은 책에서 첼로 켜던 소년에서 유신반대 삐라를 뿌리는 운동권 학생과 노동 투사를 거쳐 원내 진출에 성공해 진보 정치의 선봉에 서기까지 파란만장한 과정을 특유의 촌철살인의 입담을 섞어가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노회찬 "빨간색이되 우아한 빨간색이고 싶다"」, <매일노동뉴스> 2014년 12월 14일).
책의 서문격인 「세월이 그대를 희롱할지라도」에서 정운영은 노회찬에 대해 '생활과 운동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자 '엄청난 집념의 사나이'라고 말한다. 의연히 '외길 30년'을 버텨온 데 대해 정운영은 "운동이 영화(榮華)를 겨냥한 수단이 아니고, 생활이 운동을 방해하지 않아서 오늘이 가능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그는 여러 모로 스타가 되었다. 밖에서 거는 기대가 엄청 무겁고, 우리 역시 인터뷰를 신청하고 두 달을 기다릴 만큼 그 자신이 바쁘기도 했다. 그래서 전하는 객소리거니와 스타는 '스스로 타락한' 사람이라는 경고를 가끔 떠올리면 좋겠다. 세월이 진보를 희롱하더라도 진보의 파수꾼이 되어 그 희롱을 잠재우기" 바란다는 말로 맺는다.

'밖에서 보던 국회와 안에서 느끼는 국회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특별히 어떤 면에서 그렇께 느끼는가'라는 정운영의 물음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 "생각보다 엉터리였습니다. 지금의 국회가 한국정치 56년 역사의 산물이라 생각하면 허망한 느낌이 듭니다." "생각보다 더 국민과 떨어져 있습니다. 국회에선 국민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잘 보이지도 않고요. 국민들은 '지역구'에만 있습니다."(17쪽)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17대, 19대, 20대 국회에서 3선 국회의원 노회찬은 활발한 의정활동을 전개한다. "현실정치는 현실의 국민과 소통하고, 그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지지를 얻고, 참여를 도모하는 것"임을 강조한 노회찬의 의정활동은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현실을 누리는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이었고, 사회 약자들의 현실을 정치의제로 만드는 것이었다. 노회찬의 정치적 삶은 '연대'라는 한 마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그는 여성, 노동자, 철거민 등 사회적 약자들의 '동반자'이자 '호민관'이었다. 이들과 함께 비를 맞고, 또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꾼 정치가였다(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007-008쪽).

한편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스타' 관련 인터뷰 내용 가운데는 이런 구영식의 질문과 노회찬의 답변이 있었다.
- (질문) "김어준 총수는 노 대표를 '원조 진보스타'라고 평가했는데, '스타'라는 평가는 어떤가?
(답변) 작고한 정운영 선생이 2004년도에 어떤 출판사의 부탁으로 저를 찾아와서 인터뷰해서 책을 낸 적이 있다. 그때 정운영 선생이 쓴 책의 서문을 보면 스타는 스스로 타락하는 사람이다라면서 노회찬은 스타지만 스스로 타락하지 말라고 아주 따끔한 충고의 말씀을 해주었다. 그 얘기를 저는 늘 기억하고 있다. 워낙 진보진영이 대중 속에 친화력을 갖는 경우가 좀 적으니까 '스타'라는 평가가 나온 것으로 본다. 앞으로 그런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또 그런 사람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제 임무 중 하나다.
- (질문) "진보정당에도 대중스타와 같은 사람들이 필요한 것인가?"
(답변) 필요하다. 원래 스타는 진보정당이 더 많아야 한다. 그래야 진보정당도 잘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것을 부정적으로 보아왔던 측면이 있다. 대중에게 인정받는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가 기를 쓰고 매달릴 대목이기도 하다.

2015년 9월 24일 노회찬은 트위터 글과 사진으로 정운영을 불러낸다.
오늘은 정운영 선생이 향년 62세로 돌아가신지 만10년이 되는 날이다.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해마다 줄어들겠지만 진보논객의 맏형으로, 경제학자로, 100분토론 첫 사회자로 큰 울림, 깊은 발자국을 남기신 분이다. 4.19 다음 세대의 학생운동가였고 학원민주화에 앞장서다 해직교수가 되셨다. 80년대부터 강단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쳤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논설위원으로 참여하고, 주요 일간지의 명칼럼리스트와 MBC 100분토론 초대 사회자 등 신문, 방송의 대표적 진보논객으로 늘 시대의 맨 앞에 서오셨다.
어제 10주기 추모식에선 장사익이 '봄날은 간다'를 불렀고, 신영복 선생이 제호를 쓰고 조정래 선생이 긴 추도사를 붙인 고인의 선집이 헌정되었다. 선집에 수록된 연보를 읽다보니 정운영 선생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내신 책이 바로 선생께서 직접 나를 인터뷰해서 만든 <정운영이 만난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이다. 무슨 만용으로 이 책 출간에 응했는지 참으로 민망하고 부끄럽다. 당시 인터뷰 자리에 동석해서 박경리 토지에 대해 얘길 함께 나누었던 사모님이 11년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반겨주신다.
봄날은 가지만 늘 다시 돌아온다.


▲ <시선>,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10주기 직후 김상조(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이런 글을 남긴다.
"며칠 전 10주기를 맞은 고 정운영 선생의 칼럼 선집 <시선>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때마침 그 근처에서는 노동개혁(개악) 저지를 위한 민주노총의 총파업 결의 집회가 진행되었다. 훤칠한 키에 잘 어울리는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교실 안에서 담배를 피워 문 채 '내가 <자본론>을 들고 종로에 간 까닭은…'이라며 강의를 시작하던 정운영 선생에 대한 기억이 아득한데,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생존권 보장을 외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그치지 않고 있다. '인간적 세상'을 향한 선생의 꿈은 정녕 꿈이던가."(경향신문, 2015년 9월 30일)

진보정당과 정운영, 그리고 노회찬

정운영은 현실 정치 참여는 아니었지만, 글을 통해 가짜가 아닌 '진짜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줄곧 역설하면서 응원을 보낸다. 92년 대선, 97년 대선, 2004년 총선 등 정운영이 응원을 보낸 진보정당의 역사는 노회찬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동안 정치라는 화상에게 하도 많이 속아왔기에 흔히 우리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으리라는 체념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대선 경쟁에 나선 상위 주자들의 인물이나 그들이 내건 공약에서, 비록 다시 한 번 '그 밥에 그 나물'이란 느낌이 지워지지 않더라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선거판만을 바라보지 말고 여태껏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다질 필요가 있다. 체육관에 거수기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갓, 뒤로 갓' 하며 집권자를 뽑던 시대에 비하면, 그래도 투표할 자유나마 누리게 된 현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 고마움은 물론 시너를 끼얹어 몸을 불사르고, 지붕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던 그 처절한 항거들의 소산이다. 그것은 결코 먼 옛날의 전설과 신화가 아니라 바로 5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우리의 얘기이다. 그렇다면 그 투쟁의 성과를 지키고 가꾸는 일은 정녕 우리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 체육관 선거로 돌아가는 위험을 겁내서가 아니라, 그 체육관 선거를 몰아낸 항거와 투쟁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라도 이 선거를 잘 치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 「투표는 해야겠는데」 중에서(1992년 12월 17일; <시선>에 수록)

1997년 대선을 앞두고 10월 31일 전국 39개 대학 160명의 교수가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의 대통령후보 정책자문교수단을 결성하자, 한겨레 논설위원 정운영은 「최소한의 무장」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쓴다. 당시 심경을 정운영은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이 행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하고도 복잡하다. 먼저 대학과 정계 등 여러 곳에서 등에처럼 귀찮고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거사'에 나선 용기이다. 글쎄 가만히 있으면 장차 대통령의 전화를 받거나 대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들이 혹시 이번 일로 그 영광을 스스로 차버린 것이나 아닌지 옆에서 보자니 안타까운 생각마저 든다. 한층 복잡한 이유로는 질식할 것만 같은 기성 정치판에 다소나마 숨통을 터주고, 연줄과 권력에 따른 이합집산이 아닌 정책 차별화로 선거에 임하려는 자세가 반갑기 때문이다.…오늘 지더라도 내일 이기는 지혜가 필요하다면, 그 씨앗을 심으려는 정책자문교수단의 결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차기 대통령의 식단이 칼국수가 될지 수제비가 될지 알 수는 없으나, 국민승리21의 후보가 적어도 그 식탁에 초대받을 만큼의 표를 모아야 한다. 그것은 현 정권한테 무참하게 짓밟힌 진보의 수모와 핍박을 씻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낼 숙제이다. 다시 그것은 다음 정권에게 힘을 과시하기 위한―적어도 괄시받지 않기 위한―절박한 대비이며 최소한의 '무장'이기도 하다."(한겨레 1997년 11월 4일).
사표 논리에 젖어 '될 사람' 찍는데 익숙했던 유권자들에게 진보정당으로 가는 표는 헛된 표로 인식된다. 정운영은 진보정당에게 던지는 표가 결코 헛된 표가 아니며 앞으로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린 진보 정치에 힘을 실어주는 소중한 표임을 역설한 것이다. 1997년 12월 18일 15대 대선에서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출신인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는 306,026표(1.2%)를 득표한다. 1997년 5월 당시 민주노총 가입 노동조합 수는 1,147개이며, 조합원 수는 525,325명이었다.

중앙일보 2004년 4월 14일 27면 <정운영 중앙시평> 「진보를 해방하라」에서는 "이 시대 진보 세력의 책무는 가짜 진보로부터 진짜 진보를 구출하고 회수하는 일이다. 국회 입성을 계기로 민주노동당이 그 숙제를 해낼지는 두고 볼 일"이라고 말한다. 민주노동당을 찍으면 사표가 된다는 유시민 의원의 발언을 겨냥해 "사표(死票) 걱정과 전술적 고려는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을 가로막는 함정이었다"라고 논평하면서 이렇게 마무리한다.
"어차피 안 될 후보라면 그를 찍어 내 표를 죽이기 아깝다는 유권자의 정서를 탓하기 어렵다. 정당 투표로 그 고민은 이번 총선에서 제법 해소될 듯하다. 그리고 '더 미운' 정당과 '덜 미운' 정당이 싸울 때, 진보정당을 찍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미운 정당을 돕게 되는 수가 있다. 그래서 진보정당 대신 덜 미운 정당을 찍는 전술적 선택이 진보 진영의 불문율이자 시대의 양심으로 비쳤었다. 그런데 그렇게 밀어주고 얻은 것이 무엇인가? 이 모양, 이 꼬라지의 정치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인정을 볼모로-덫으로-지역주의 독버섯이 자라고 사부들의 선동주의가 판쳤다. 이제 그 과거를 정리하고 진보를 해방시키자!"

정운영의 '훼절' 논란과 노회찬의 '정치 외도' 시비

2000년 '열린 보수'를 자처한 중앙일보로 옮겨 '정운영 칼럼'을 집필할 당시, 그의 글이 '훼절'(毁節)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진보지식인으로서의 지조를 깨뜨렸다는 것이다. "외국자본이 국내 산업과 금융의 중추회사들을 사실상 차례로 장악해 나가고 있는 현실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재벌에 대한 출자 제한을 풀어주고 금융 계열사 의결권을 인정하는 방법을 통해 이를 저지하자"는 주장을 펼친 「나라 위해 우리 변절합시다」(2004년 12월 8일 <중앙시평>), "진보세력의 '부패한 행위'로 인해 '좌경 협심증'에 걸렸다"고 쓴 「반동의 반동은 반동을 부른다」(2004년 7월 28일 <중앙시평>), "언론시장 점유율 제한은 웃자란 신문을 자르려는 시도"라고 평가절하한 「우수마발이 다 개혁은 아니다」(2004년 10월 26일 <중앙시평>) 등이 그것이다. 평소 정운영의 학자로서의 신조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도 엇갈린다.
윤소영은 "386세대를 비롯해 이른바 민주화 세력에 대한 서운함이 말년에는 굉장히 깊었다. 오해의 소지가 많은 칼럼을 쓴 것은 학문적 판단 외에도 그런 정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신영복은 "정 선생이 <중앙일보>에 썼던 글은 그 신문사 상황에서 활자화하기 힘든, 비판적이고 좋은 글이었다. 하나의 글보다는 전체적·거시적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가 조정래는 칼럼을 아예 읽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부러 안 읽었지. 실존적 사정 때문에 그 곳에 갔는데, 마음에 안 드는 글을 읽으면 내가 괴롭잖아? 그게 우정이 아닐까 싶었어." 정운영의 부인은 이런 논란과 시비에 대해 대꾸하지 않고 다만 한 마디 말을 남긴다. "그 분한테는 한겨레에서 중앙으로 옮긴 게 아주아주 큰 일이었어요…." (안수찬, 「정.운.영, 우리시대 논객을 위한 비망록」, 한겨레, 2005년 10월 14일)

노회찬의 '정치 외도' 시비를 불러일으킨 일은 노회찬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진보정치연합이 개혁신당과의 제휴를 추진하면서였다. 직접적인 계기는 1995년 10월 9일 노회찬이 '개혁적 국민정당'(약칭 개혁신당) 주비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12월 2일 개혁신당이 강서을 조직책으로 노회찬을 선임하면서 시작된다.


※ 참조) 당시 개혁신당 창당주비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공동주비위원장(장을병 전 성균관대 총장, 홍성우 변호사). △사무총장 겸 임시대변인(시민운동의 '간판스타'인 서경석 목사). △기획위원(작가 김홍신, 옛 민중당 그룹의 장기표, 박인제, 성유보, 참여연대 운영위원장인 이삼열 숭실대 교수, 장두환, 장신규 젊은연대 공동대표). 하경근 전 중앙대 총장 △주비위원(강기종, 김성식, 김영관, 김영진, 노회찬, 서상섭, 송덕빈, 신무룡, 신형식, 양재헌, 오호근, 이재경, 이찬욱, 최윤) (「'개혁적 국민정당' 창당주비위 발족 안팎 1인 보스정치 극복 최대과제 설정」, 한겨레, 1995년 10월 10일; 「개혁신당 창당 선언」, 동아일보 1995년 10월 10일)

개혁신당은 총선을 앞두고 이기택의 이른바 '꼬마 민주당'(1995년 9월 5일 창당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은 민주당 잔류세력)과 통합, 12월 21일 '통합민주당'이 된다. 당무위원은 민주당 쪽에서 36명, 개혁신당 쪽에서 19명이 맡는데 12월 23일 확정된 당무위원 명단 55명은 다음과 같다: 이기택 원기 장을병 홍성우 이부영 장경우 하경근 강창성 김정길 제정구 이철 서경석 강수림 강희찬 김말룡 김원웅 김종완 김형광 노무현 박계동 박석무 박일 양문희 이규택 이동근 신진욱 유용근 유인태 이동근 원혜영 장기욱 장준익 정기호 정정훈 조중연 최욱철 하근수 홍기훈 홍영기 황의성 장기표 곽일훈 성유보 곽영훈 이삼열 김홍신 장두환 오현주 송덕빈 송창달 이태호 노회찬 서상섭 박인제 장신규 (한겨레, 1995년 12월 24일).

노회찬이 당무위원으로 이름을 올릴 당시 "이미 진보정치연합의 개혁신당 참가 전술은 실패로 드러나고 있었으며 총선 전에 거의 대부분 통합민주당에서 철수"를 한다(<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117쪽). 1996년 3월 15일 노회찬은 예상치 못하게 사면복권이 안돼 민주당 공천에서 제외되고, 총선에 출마하지 못하게 된다.

▲ 한겨레 1996년 3월 3일(왼쪽), 동아일보 1996년 3월 16일

당시 전후 사정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밝힌다.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치연합은 정치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직 구성원의 대부분이 민중당을 경험했던 상태라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총선용으로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였고요. 진보정치연합한테 1996년 총선은 진보정당 재창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역 정치 활동의 기반을 견고히 하는 정도의 훈련이었습니다. 마침 제도 정치권의 반3김 세력, 일부 재야, 시민 단체들의 개혁신당 논의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개혁신당과의 제휴를 총선을 위한 '선거연합'으로 규정했습니다. 진보정치연합 대의원대회는 1996년 총선 방침으로 개혁신당 참가를 결정했습니다. 단 1996년 4월. 제15대 총선이 끝나면 개혁신당에서 철수하여 진보정당운동에 매진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개혁신당 참가는 진보정당 추진세력들을 보존하고 장기적으로 재창당에 대비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복권, 미공천 등 여러 사정으로 단 1명만이 개혁신당 후보로 출마함으로서 이 전술은 실패했습니다.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116쪽)

정운영이 "전술적 실패라고 둘러댈 수도 있을지 모르나 결국 '외도'를 한 셈인데, 그 경험을 통해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무엇이겠냐?"는 질문을 던지자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
운동의 순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외도'지요. 그러나 순결하고 순수한 외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은 결과를 갖고 평가해야 합니다. 이 전술이 성공했다면 결코 외도라는 평가가 나오지 않겠지요. 배운 것이 있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정치는 철학과 세계관이 같은 사람끼리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117-118쪽)

"진보의 도덕"과 "진보의 파수꾼"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비아북, 2014)의 공저자인 구영식 기자(<오마이뉴스> 정치부)는 노회찬이 떠난 며칠 뒤인 2018년 7월 30일 <한겨레21>(1223호)에 「노회찬이 뻔뻔할 수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다.
"그는 유서에서 드루킹 쪽으로부터 4천만원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고 고개를 숙였다. '잘못이 크고 무겁다'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대목에서는 그가 자신을 얼마나 엄격하게 대하는지가 잘 느껴진다.
필자가 그에게 '진보는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진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성, 현실적 힘이다'라고 일갈했다. 진보에 도덕이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지만 도덕은 진보정당이 추구할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런데 진보세력의 도덕적 결함에는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엄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억울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것도 하나의 현실이니까 인정해야 한다. 부정이나 비리의 경우 진보세력에는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쪽도 저쪽도 돈봉투를 받았으면 똑같은 죄인데 이쪽에서 받으면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억울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높은 것을 요구하니까 그에 맞춰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가 여느 정치인들처럼 뻔뻔할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됐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활동해온 한 동지는 장례식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돈 받은 사실을 유서에는 쓸 수 있을지언정 주변 사람들에게는 직접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이다.'"

정운영과의 인터뷰에서 "빨간색이되 우아한 빨간색이 되고 싶다"는 노회찬(<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2004, 142쪽). 경향신문 정제혁 기자는 정운영을 호명해내면서, 「권력에 맞서고 정치 유쾌하게 풀어낸 '진보의 파수꾼'」(2018년 7월 24일)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기사를 썼다.
"그는 한때 확신에 찬 사회주의자였고, 제도 정치권에 발을 내디딘 후에도 견결한 진보주의자로 살았다. 무엇보다 사회주의와 진보의 가치를 시민과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역할 줄 아는 희귀한 정치인이었다. '자각한 소수'의 난삽하고 현학적인 개념 운동, 체제에 맞선 강퍅하고 성마른 얼굴로 표상되던 진보는 그에 이르러 비로소 교양과 품위, 여유와 유머 따위, 그러니까 사람들이 서구의 세련된 사회주의자들에게서나 보던 최상급의 정치적 품격과도 공명한다는 사실을 새삼 보여주었다.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칼럼니스트였던 고 정운영 교수는 이런 노 원내대표를 '진보의 파수꾼'이라고 불렀다."

노회찬은 정운영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의 자질'로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대로 세상을 바꾸기 위한 힘을 기르는 능력"이라고 말한다(<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177쪽).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세상을 바꾸고자 노력하고 싸웠다. 그러다가 책이 나온 지 14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2018년 7월의 어느날, 가던 길을 갑자기 멈추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14년 전인 2005년 9월 24일 오늘 61세로 정운영이 떠났을 때 누군가 이렇게 추도했다. "그는 떠났으나…그를 따르는 수많은 후배와 후학들의 머리와 마음 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누군가의 머리와 마음 속에 아직 살아 있을 정운영은 <시선>에서, 봄에는 "자유를 위한 비상과 혁명의 고독을 차마 시인의 노래로만 끝낼 것인가? 화려한 축제에 가린, 잔인한 잉태의 역설, 그것이야말로 봄이 간직한 비밀"(266쪽), 가을에는 "굳이 알프스 산자락의 티롤 역참이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유리빛 황혼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인 것을"(327쪽)이라고 읊고 있다. (「[책 속으로] 떠난 지 10년 … 다시 만나는 정운영」, 중앙일보, 2015년 9월 19일)

정운영과 노회찬, 두 사람 모두 존경한 신영복은 봄과 가을을 이렇게 노래한다.
봄이 제일 먼저 오는 곳은 사람들이 가꾸는 / 꽃뜰이 아니라 바람 부는 들판입니다. / 봄은 들판의 이름없는 잡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 재로 뿌릴 줄 안다 / 천년을 두고오는 봄의 언덕에 /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 사과 한 알 둘로 쪼개 / 나눠 가질 줄 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225-226쪽)에서 신영복은 가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을에 흔히 사람들은 낙엽을 긁어모아 불사르고 그 재를 뿌리짬에 묻어줍니다.
이것은 새로운 나무의 식목이 아니라 이미 있는 나무를 북돋우는 시비(施肥)입니다.
가을의 사색도 이와 같아서 그것은 새로운 것을 획득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다짐하고 챙기는 '약속의 이행'입니다.
이 평범한 일상의 약속들이 다짐되고 이행된 다음, 나중에야 비로소 욕심이 충족되더라도 되는 것이 응당한 순서이리라 생각됩니다.
가을에 갖는 우리들의 공허한 마음이란 기실 조급한 욕심이 만들어놓은 엉뚱한 것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신영복
"봄날은 가지만 늘 다시 돌아온다."(2015년 9월 24일 노회찬 트위터)는 노회찬의 말처럼, 이제 시간이 좀 지나면 "가을을 앞세우고 겨울이 남하하고 있(는)"(2004년 9월 1일 <노회찬의 난중일기>) 것을 보게 되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겨울이 군림하던 산하에 봄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동백나무 꽃망울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고 매화나무 가지에는 이슬처럼 봄이 탱글탱글 맺혔습니다"(2018년 3월 3일 노회찬 트위터)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흐르는 것이 강물뿐이랴 세월도 어둠도 겨울도 결국 흘러가는 것, 봄이 얼어붙은 대지를 빗방울처럼 적시며 다가오듯"(2010년 2월 8일 노회찬 트위터) '봄처럼 다가오는 희망'을 함께 맞이할 수 있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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