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해 되짚어보는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
2015년 11월 22일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김영삼(YS)이 향년 88세를 일기로 운명한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그가 재임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사실을 발표한 지 꼭 18년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다음날인 11월 23일 주요 일간지들은 머리기사를 이렇게 뽑았다.
-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경향신문)
- 「민주화의 巨山 떠나다」(국민일보)
-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동아일보)
- 「민주화 큰 별 지다」(세계일보)
- 「大道無門의 승부사… '巨山' 잠들다」(조선일보)
- 「"통합과 화합" 승부사 YS 마지막 메시지」(중앙일보)
- 「민주화 큰산 떠나다」; 「"독재자 박정희에 가장 강력하게 싸웠던 YS"…트윗에서도 애도」(한겨레)
- 「민주화의 긴 여정 맺다」(한국일보)
국가장(國家葬)으로 치러진 김영삼의 장례는 11월 22~26일까지 5일간 진행됐으며, 영결식은 11월 26일 국회의사당에서 치러진다. 영결식이 끝난 뒤 김 전 대통령의 운구 행렬은 46년간 거주했던 서울 상도동 사저와 대통령 기념도서관을 들렀으며 이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다.
11월 22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조문한 노회찬(전 정의당 대표)은 트위터를 통해 "한 시대의 막이 내리는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양김 시대는 이미 끝났지만 새 시대는 열리지 않는 혼돈의 나날입니다."는 글을 남긴다.
정의당도 이날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고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을 이끈 현대 정치사의 거목"이라며 "대한민국 정치사의 큰 별이 떨어졌다"고 애도한다. 이어 "김 전대통령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도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진영의 한축을 이끌었고, 92년 문민정부 출범 후 군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등 과감한 개혁을 단행해 민주주의를 한층 더 성숙시켰다. 비록 87년 대선의 야권분열과 90년 3당 야합으로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임기말 IMF 구제금융으로 국민들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고인이 남긴 족적은 한국 현대사에 크게 남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1년 뒤인 2016년 11월 22일 오전 노회찬은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한다. 추모식은 유족과 정·관계 주요인사 등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수한 추모위원장의 인사말, 이홍구 전 국무총리의 추모사, 김장환 목사 주관의 종교의식과 추모 영상 상영, 조총 발사와 묵념의 순으로 진행된다. '최순실 게이트'의 여파 속에 위기에 몰린 새누리당 대표인 이정현과 상도동계 출신으로 새누리당 최다선 의원인 서청원은 당초 참석 의사를 밝혔다가 결국 불참한다.
김영삼(金泳三 1927.12.20.~2015.11.22.)은 누구?
중학교 시절부터 대통령의 꿈을 꾼 김영삼은 '타고난 승부사'라는 평가를 듣는다. 승부를 겨뤄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결단을 내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1969년 '40대 기수론' 제창, 유신독재에 맞선 반(反)박정희 투쟁, 1983년 23일 간의 단식농성, 1990년 3당합당, 대통령 임기 동안 '신한국 창조'를 위한 전격적인 개혁조치, 1996년 12월 1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IMF 외환위기…. 그의 결단은 민주주의의 진전과 정치 발전에 디딤돌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1927년 경남 거제에서 출생한 거산(巨山) 김영삼은 1947년 경남고등학교, 195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다. 1951년 1월 국회부의장 장택상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김영삼은 1954년 26세의 최연소자로 거제에서 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된 뒤 5·6·7·8·9·10·13·14대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최다선인 9선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역대 9선 국회의원은 박준규(5,6,7,8,9,10,13,14,15대)와 김종필(6,7,8,9,10,13,14,15,16대) 등 총 3명에 불과하다.
주요 저서로는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1964), <정치는 길고 정권은 짧다>(1967), <40대 기수론>(1971), <나와 내 조국의 진실>(1982), <김영삼 회고록-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3>(2000),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상, 하)>(2001) 등이 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파동과 민주당의 태동, 그리고 김영삼
1954년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파동 사건은 이승만의 노욕이 빚어낸 한국 헌정사의 치부다. 현대사는 그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한다. "사사오입 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위헌적인 개헌이었을 뿐만 아니라. 1인의 종신집권을 보장한 개헌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헌정사상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이 개헌파동으로 손권배·김영삼·김재곤·김재황·김홍식·민관식·성원경·신정호·신태권·이태용·한동석·현석호·황남팔 등 자유당 소장파 의원들이 무더기로 탈당하는 한편, 민국당은 무소속 국회의원들을 규합, '호헌동지회'를 구성함으로써 민주당 창당의 계기를 만들었다."(<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년 9월 10일)
1954년 5월 20일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이 다수를 차지하자, 9월 8일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3선 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을 포함한 개헌안을 제출한다. 하지만 11월 27일에 국회에서 열린 표결의 결과는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으로 헌법개정에 필요한 3분의 2(136석)에 1표가 부족,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부결되었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틀 뒤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인 고로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의 인간이 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 즉 반올림 시에 3분의 2는 135명"이라는 논리를 적용하여 부결 선포를 번복, 개헌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한다.
김영삼은 사사오입 개헌 파동과 관련해 이중 플레이를 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이라는 부제를 붙인 <김영삼 회고록 1>(백산서당, 2000)을 살펴보면, '개헌에 반대표 던지고 자유당 탈당 후 민주당 창당'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 이후 김영삼은 12월 3일 자유당을 탈당, 1955년 민주당창당발기준비위원회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 민주당이 결성되자 민주당에 입당, 민주당 중앙당 청년부장 겸 경남도당 부위원장에 임명된다. 장택상이 정계로 발탁한 인물이자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인 것이 알려지자 민주당 구파의 조병옥과 유진산은 전폭적으로 그를 후원한다.)
※ 참조) "그게 무슨 소린가, 개헌안이 부결되었다니. 이 사람들아, 135표면 개헌안은 통과된 것일세, 돌아가서 통과된 것으로 선포해주기 바라네." 11월 27일 밤 자유당 간부들이 이승만에게 부결 사실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승만은 개헌안이 가결되었다고 말한다. 이승만은 국회 부결 선포 직후 측근 장경근을 통해 서울대 문리대 최윤식 교수(대한수학회 초대 회장, 대한민국 수학자로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음)의 자문을 구하여 사사오입의 논리를 적용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사사오입의 논거를 자문한 사람으로, 국내 최초의 이학박사이자 초대 중앙관상대장을 역임한 천문학자인 인하공대 학장 이원철 박사의 이름이 자유당 윤성순 의원에 의해 거론되기도 했다.)
사람들도 언론 보도를 통해 그렇게만 알고 있지만 개헌안 표결은 비밀투표였기에 사실 '가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확실한 것은 이틀 뒤인 11월 29일 그가 사사오입 개헌 '가결 동의안'에 서명했고, 그 동의안에 대한 거수표결에서 찬성했다는 사실이다. 자유당 의원 가운데 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김두한(金斗漢) 한 명뿐이었다. 경남 거제도에서 만 26세의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야심찬 김영삼은 11월 27일 '개헌안 부결 자축연'을 벌인(<김영삼 회고록 1>, 100쪽) 바로 다음날 자유당 의원총회의 '가결 동의안'에 이름을 올린다(김당, 「YS가 사사오입 개헌 반대? 당신이 아는 사실은 틀렸다」, <오마이뉴스>, 2017년 1월 2일).
참고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한 달 여 앞둔 1954년 4월 11일 동아일보는 <2대 민의원 의원 공죄총결산 개관: '제2대 선량 증세진단서'>라는 제목의 만화 한 컷을 싣는다. 당시 국회의원들과 후보자들의 각양각색 행태를 '병증'으로 날카롭게 풍자한 모습이다. 여기에는 결석증, 허언증, 시종무언증, 완력증, 인조인간증(일명 거수증), 다변증, 고집불통증, 사바사바증, 사리사욕증, 등단증, 우국증, 건망증, 원만증, 격분증, 자기선전증, 권력아부증 등 온갖 재미난 증세가 다 모여 있다.
"생각보다 엉터리였습니다. 지금의 국회가 한국정치 56년 역사의 산물이라 생각하면 허망한 느낌이 듭니다." "생각보다 더 국민과 떨어져 있습니다. 국회에선 국민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잘 보이지도 않고요. 국민들은 '지역구'에만 있습니다."
2011년 8월 18일 <'自由人' 인터뷰>에서 노회찬(진보신당 상임고문)은 이렇게 말한다.
현재 한국정치가 많은 국민들에게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불신을 받는 가장 큰 배경은 한국정치가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닌 정치인을 위한 정치라는 것이다. 한국정치가 제구실을 하고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현대적 정당정치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노회찬의 비판과 반성은 이어진다(노회찬, 「촛불시민혁명과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향한 우리의 과제」,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송년시국토론회 자료집>, 2016년 12월 27일).
30년 전인 1987년 민주화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는 좋은 정당정치 체제를 만들지 못했으며, 주권자인 국민들은 기성 정치의 동원 대상, 단순한 구경꾼으로 대상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대다수의 소위 정치 엘리트들은 자기 기득권에 안주했으며, 재벌 대기업들은 자신의 거대한 경제력을 발휘해 정치적 이해를 관철시켜왔습니다. 반면 노동자, 자영업자, 농민 등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대변하는 정치적 의제는 정치에서 배제되거나 무시되거나 미뤄져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책임은 과거와 현재의 기성 정치세력에게 있으며, 제가 속한 진보정당조차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2017년 3월 10일) 1년 뒤인 2018년 2월 정의당 원내대표 노회찬은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을 이렇게 마무리짓는다.
이제 20대 국회의 남은 과제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현실을 타파하고 한반도의 평화실현을 앞당겨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앞두고 있습니다. 기원전(B.C) 역사가 되풀이 될 수 없듯이 Before Candle 즉 촛불이전(B.C) 시절도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20대 국회의원 모두 촛불과 함께 한 시대를 건넜습니다. 촛불이전의 낡은 정치를 반복하지 맙시다. 정치가 스스로 개혁할 때 비로소 나라도 나라답게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회찬은 <우리가 꿈꾸는 나라>(창비, 2018, 86-87쪽; 95쪽)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며, "변화는 정치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촛불 이후 시대인 오늘날의 중요한 과제는 공정, 평등, 평화를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쉽지 않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과제를 풀 수 있을까요? 우선, 정치를 바꿔야 합니다. 불공정한 불법 채용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함도, 한반도의 평화도, 정치가 움직이면 바꿔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면 쿠데타 등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기주장을 관철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치를 통해서만 사회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고 했던 공수처법만 해도 지금 국회에서 통과가 됩니까? 이런 답답한 상황을 개선하려면 정치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정치를 바꾸지 않고서는 촛불 이후 대두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저는 선거제도만 바꿔도 정치에 굉장히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탄핵 이후 협치에 대한 기대를 모았던 20대 국회는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평가를 받는다. 여야를 막론하고 연일 '정쟁'만 반복하는 상황 때문이다. 특정 사안을 두고 정쟁에 나선 정당들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국민을 위한 민생 관련 법안 처리 실적은 '역대 최악' 수준이다. 2019년 9월 현재 법안 본회의 처리율(29.4%)과 의안 본회의 처리율(30.5%)의 경우 민주화 이후 역대 국회 중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리얼미터가 2019년 6월 실시한 '2019년 국가사회기관 신뢰도 조사' 결과 국민의 2.4%만이 국회를 '신뢰할 수 있는 기관'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와 정당은 노회찬이 말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닌 정치인을 위한 정치", "촛불이전의 낡은 정치"의 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김영삼의 '40대 기수론'과 노회찬의 '40대 위기론'
1969년 11월 8일 외교구락부. "71년 제7대 대선 때는 나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우리 당을 승리로 이끌고 거국적인 민주세력을 집결시키는 막중한 작업에 구심점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몇 달 전인 6월 20일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을 가하던 중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하기까지 한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은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대통령 선거 출마선언을 한다. 그 내용은 과거 야당이 나이 많은 후보를 지명한 점을 비판하면서 신민당이 국민에게 활기있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는 '40대 기수'에게 리더십을 넘겨줘야 한다는 것이다.
42살 김영삼의 대통령 후보 출마 선언은 누가 봐도 '야당의 세대교체' 선언이었다. 세대교체를 반대하는 당내 원로를 등에 업은 유진산은 총재가 되자, 곧바로 김영삼의 대통령 후보 출마 선언을 "구상유취(口尙乳臭)한 일"(젖비린내 나는 어린아이가 저지른 터무니없는 일)로 일축한다. 하지만 1970년 1월 24일 김대중이 "박정희 군인정치를 종식하는 지름길은 민주당의 40대 젊은 정치인들이 공정한 당내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길밖에 없다"며 출마 선언을 하고, 박정희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지 8년 만에 해금돼 신민당에 막 입당한 이철승마저 40대 후보론에 가세하며 출마를 선언하자, 신민당 내의 세대교체론은 무시못할 형세로 돌변, 후보지명전은 '40대 기수'의 3파전으로 압축된다. 김대중은 1924년생, 이철승은 1922년생이다.
1970년 9월에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유진산 총재는 결국 자신과 같은 다수파인 김영삼을 후보로 지명했고, 1차투표에서 김영삼은 상당한 차이로 최다득표자가 되었으나(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백지투표가 78표나 나오는 등 과반 득표를 하는 데는 실패한다. 유진산의 행동에 분개한 이철승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김대중에게 투표하라고 권함으로써 2차 결선투표에서는 소수파인 김대중 후보가 지명을 받는다(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큰 뱀'(大蛇)으로 불렸을 정도로 노회한 정략가였던 유진산은 지명대회 이후 내리막을 걷다 1974년 암으로 생을 마감한다. 1970년의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은 한국 정치사에서 새로운 정치풍토를 조성한 역사적 사건이었다(성유보, 「박정희 3선 연임 맞서 DJ·YS '40대 기수론'」, 한겨레, 2014년 2월 19일).
한편 2004년 17대 총선을 마친 뒤 여의도에 입성한 노회찬은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른바 '40대 위기론'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한다(황호택, 「여의도 입성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빨강이든 파랑이든 색깔 진하게 가져야"」, <신동아>, 2004년 6월호).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이라고 한 것은 불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역설적으로 그런 말이 나온 거라 생각해요. 40대는 유혹이 가장 많은 시기입니다. 내가 좋아했던 선배들이 대개 마흔을 넘기면서 인생관이 현실적으로 바뀌더라고요. 그 분들 뒤에서 욕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나는 저렇게 안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후배들한테 얘기했어요. 나를 잘 지켜보라는 뜻에서 40대 위기론을 말한 겁니다.
그 전인 2003년 1월 <Personweb>과의 인터뷰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내가 선배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93년도에 스스로 만든 이론이 있었어요. 93년이면 내 나이가 38인가 그랬는데요. 그때 내가 선배들을 보면서 느낀 게 '40대 위기론'이예요. 멀쩡하게 운동 잘하던 사람도 나이 40이 되면 달라지기 십상이에요. 40이란 나이가 주는 의미가 있잖아요. 뒤돌아보게 되고 또 앞을 보면 얼마 안 남았거든요. 그래서 살아서 할 수 있는 일만 하자고 되는 거죠. 역사의 스케줄이 있고 한 개인의 인생 스케줄이 있는데, 둘을 비교할 수 없는 거라고. 역사의 스케줄은 개인과는 무관하게 얼마나 도도한가요. 근데 개인 스케줄을 역사의 스케줄에 투영을 시켜요. 40이 넘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없다고 보니까 초조해지는 거죠.
사람들이 욕을 많이 하지만, 하나 변호하고 싶은 건, 40살까지만 놓고 보면 장기표나 김문수보다 열심히 산 사람 있냐 이겁니다. 40살까지만 보면 그 사람들한테 배울 게 더 많지 욕할 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보면 나이가 40쯤 되면서 인생 앞뒤 보니깐, 인생스케줄로 역사를 재단하게 된 거죠. 그래서 그 때 나도 40 앞둔 사람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경각심을 갖기 위해 '40대 위기론'을 떠벌리고 다닌 거 같습니다. 내 후배들한테도 "나 곧 40 된다, 나 잘 봐라. 내가 존경하는 선배들 40대 이후에 이렇게 됐다." 그 이야기를 한 지가 엊그제 같은 데 이제 50대에요. (웃음) (「인터뷰: 노회찬–민주노동당 사무총장」, <Personweb>, 2003년 1월 1일)
장기표, 김문수와 관련해 <Personweb> 인터뷰에서 노회찬이 밝힌 에피소드가 있다.
노회찬은 평소 좋아했던 선배 장기표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수시로 면회를 갔다. 당시 노회찬의 주변에는 "장기표는 개량주의자"라는 말이 많았지만 노회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혹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함께 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장기표는 결국 민중당을 해산하고 만다. 그는 "살아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을 일은 안 하겠다"는 말을 했다.
감옥에서 나온 노회찬은 김문수를 만나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당 조직 재건을 강조한다. 그러나 김문수는 노회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 가족한테 죄인이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죄인이 되고 싶지 않다. 운동하면서 성과를 얻었는지 모르지만, 가족들 고생하는 거는 더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겠다. 노회찬 니 얘기 다 옳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그거 다 안 된다. 그러면 오히려 무책임한 거 아니냐? 살아생전에 이룰 수 없는 주장만 계속하고 가족은 가족대로 고생하면 그게 뭐냐? 너는 100을 하겠다고 하는데 나는 2~3개만 하겠다. 그 2~3개만 잘하면 살아있는 민중에게 도움되는 거 아니냐."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84호(윤재설, 「떠나간 사람들: 그들의 말말말」, <진보정치> 84호, 2002년 4월 22일)를 보면 김문수와 관련한 이런 기사가 있다.
"'재야에서 문민정부 개혁을 비판하는 것보다 직접 정권에 참여해 개혁을 완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입당을 하게 됐다.' 서울노동운동연합, 민중당 등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왔던 김문수 의원(한나라당)은 지난 1994년 3월 민자당에 입당하면서 "지금 가장 개혁적인 정치인은 김영삼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김영삼 정부의 '노사관계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동참했다. 3당 합당을 '야합'이라 비난하고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민중당을 결성, 활동해온 이재오 한나라당 총무, 이우재 전 의원 등도 김문수 의원과 함께 민자당에 입당한 후 1996년 총선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노동자,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보다는 야당의 대표적인 '공격수' 역할을 해왔다."
한 우물을 파는 사람에겐 언젠가 보답이 따르게 마련이다. 우리 당도 그렇고 나도 한 우물만 팠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진보정당 운동을 떠나기도 했지만 민주노동당의 우물이 호수처럼 넓어지면 그들도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2004년 <머니투데이>의 박종인 기자는 40대 위기론을 노회찬의 '한 우물 파기'와 관련해 이렇게 설명한다(박종인, 「[인생=역전] 노회찬 김종필 '40대 위기론'(하)」, <머니투데이>, 2004년 5월 10일).
"우물을 판다는 건 그 곳에서 물이 나올 때까지 마른 땅을 파는 걸 의미한다. 물이 나오지 않는 마른 땅. 마른 땅에서 마침내 물이 나오리라는 믿음으로 10년이고 20년이고 30년이고 지속적으로 판다는 걸 의미한다. 한 10년 파다 물이 나오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파는 건 '한 우물 파기'가 아니다. 요컨대 한 우물을 이해하는 요체는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지속성에 있는 게 아니라 '마른 땅에서 물이 나올 것이란 신념을 바꾸지 않는' 데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강렬한 자기 확신. 그 것이 바로 '한 우물'을 가능케 하는 힘인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박종인은 이렇게 말한다.
"노회찬이 말한 것처럼 40대가 느끼는 인생의 짐, 예컨대 가족과의 인연, 그리고 생활에의 끈 등이 저를 늘 현실과 타협하게 합니다. 공자는 '군자는 모름지기 40세에 불혹'이라고 말했습니다. 최소한 흔들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저는 받아들입니다. 20, 30대에 저는 '그게 뭐 힘든 일이냐'고 '40 불혹'을 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막상 40대가 돼 보니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불혹'은 정말 도달하기 힘든 경지라는 걸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혹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그들과 고민을 나누고 싶다는 심정에서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부디 노회찬이 '40대 불혹'을 넘어 '50대 지천명' '60대 이순' 등의 길에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
1979년 YH사건, 김영삼과 노회찬
YH사건은 1979년 8월 국내 최대의 가발수출업체로 급성장한 YH무역 여성노동자 170여명이 회사운영 정상화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 4층 강당에서 농성을 벌이게 되고 이를 공권력이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게 된 사건을 말한다.
YH무역 사태가 국회에서 정치문제화되는 등 국내외의 도전에 직면하여 극도로 긴장해 있던 박정희 정권은 8월 11일 새벽 2시 이른바 '101호 작전'을 개시, 경찰 1천여 명이 신민당사에 난입, 농성노동자들을 강제해산시키고 신민당 의원 및 취재기자들을 무차별 폭행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사하고 1백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직후 신민당 의원들이 '8·11폭거'를 규탄, 18일간의 항의농성에 돌입한 데 이어, 종교계·언론인·자유실천문인협의회·해직교수협의회·민주청년협의회 등 여러 민주화운동세력이 반유신투쟁에 나선다. YH사건은 명실공히 노동자에서 보수야당에 이르는 범민주세력의 공동전선을 형성시키는 계기가 된다.
YH사건으로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직무를 정지당한다. 곧이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 지지를 철회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이유로, 9월 22일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소속 국회의원 160명 전원의 이름으로 국회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징계동의안'을 제출한다. 징계사유는 "국회의원 김영삼은 국회법 제26조에 의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을 일탈하여 국헌을 위배하고 국가안위와 국리민복(을 현저히 저해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을 모독하여 국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국회법 제157조에 의해 징계를 요구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0월 4일 김영삼은 헌정 사상 유일무이한 의원직 강제 제명을 당한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유명한 명언은 이때 나온 것이다. 의원직 제명은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과 경남 지역의 여론을 크게 악화시키면서 부마항쟁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YH사건과 진보정당'과 관련해 노회찬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한국정당실록 60년>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인터뷰 전문 ①」, <폴리뉴스>, 2009년 5월 4일).
특히 1980년대에는 70년대와 80년대의 진보정당이 어떻게 명맥을 유지했는가. 대표적인 사례 중에 하나가 통일사회당입니다. 통일사회당이 서울역 부근에 빌딩옥상에 있는 그런 옥탑방이 정당사무실이었습니다. 책상 한두 개밖에 놓을 수 없는 그런 좁은 사무실이 당시 대한민국 거의 유일한 진보정당의 현주소였고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은 1979년 이른바 박정희 정권의 시대를 막을 내리게 만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이른바 YH여공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가고 그것을 경찰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끌려나오게 만들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그 YH여공들이 처음에 농성하러 들어가려고 했던 곳은 신민당이 아니었습니다. 아니었고 바로 그 당시에 우리나라 유일한 노동자들이니까 진보정당에 가서 농성을 하면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이렇게 해서 통일사회당에 가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알아보니까 통일사회당이라는 데가 그렇게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긴급히 점거농성 장소를 갖다가 변경해서 김영삼씨의 신민당 당사로 들어가게 됐던 겁니다.
만일에 그때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있었다면 그 YH여공들은 제가 직접 YH 당시 점거농성을 했던 분들로부터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있었다면 당연히 진보정당에 가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는 거죠. 어찌 보면 웃지 못할 이 사례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짓밟히면서 제대로 된 진보정당도 없고 그에 따라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할 그런 제대로 된 어떤 정치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암울했던 그 시기의 어떤 특징을 말해주고 있는 거 아니냐 이리 생각됩니다.
23일간의 김영삼 단식농성, 30일간의 노회찬 단식농성
단식투쟁, 단식농성은 특정 사안의 관철 등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단식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비폭력 저항 방식이다.
기록으로 보면 민주화투쟁의 역사에서 단식투쟁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1964년 서울대 문리대생의 한일회담 반대투쟁 과정에서다. 5월 30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농성에 들어가고, 이는 6·3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학생회장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간다. 이후 6월 14일 서울대 법대생 200여 명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각 대학으로 파급되어간다.
23일간(1983.5.18.~6.9)의 김영삼 단식농성
"나를 감금할 수는 있어도 내가 걸으려는 민주화의 길, 내의 양심과 마음은 전두환이 뺐을 수 없다."(「[스페셜 칼럼 D] 잊혀져 가는 민주화의 새벽 … 타고난 승부사 YS를 추억하다」, 중앙일보, 2015년 11월 22일). 가택 연금한 전두환의 군부통치에 맞서면서 김영삼이 한 발언이다.
1980년 '5월 광주' 이후 전두환 정권에 의해 2년 동안 가택연금되어 정치활동을 못하고 있던 김영삼(전 신민당 총재)은 1983년 5월 18일 '5·18 광주민중항쟁' 3주기를 계기로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민주화 5개항'을 내걸고 무기한 단식에 돌입한다. '민주화 5개항'은 민주정치를 위해 투쟁하다가 구속된 인사의 전원석방, 정치활동 규제자 전면해금, 해직교수와 근로자 및 제적 학생의 복직 복교 복권, 언론자유 보장,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이었다. 단식은 5월 25일 경찰에 의해 서울대 병원으로 강제로 옮겨지고, 6월 9일 오전 지지자 30여 명의 요구로 중단할 때까지 23일 동안 계속된다.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단식을 중단했지만, 이 단식투쟁은 민주화투쟁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계기가 된다. 김대중은 미국에서 비상대책위를 꾸려 전폭적인 '한·미 민주세력' 연대투쟁에 나선다.
이후 김영삼은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직을 맡았고, 신한민주당 창당(1985.1.18.)을 주도한다. 12대 총선을 불과 20여 일 앞두고 창당된 신한민주당이 인기를 모으자 전두환은 3월로 잡아도 되는 선거 일자를 엄동설한인 2월 12일로 정하면서까지 야당 견제에 나설 정도였다. 신한민주당은 '선명 야당'을 기치로 내걸고 돌풍을 일으키며 1985년 2월 12일 12대 총선에서 제1 야당이 된다. 이후 김영삼은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 총재가 되고 12월 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 김대중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고 2위로 낙선한다.
30일간(2011.7.13.~8.11.)의 노회찬 단식농성
2010년 12월 20일부터 2011년 11월 10일까지 1년 가까이 한진중공업의 대규모 정리해고에 반발해 파업과 시위로 맞선 이른바 '한진중공업 사태'가 지속된다. 이 사태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생산직 1158명의 3분의 1이 넘는 400명을 정리해고하면서 시작됐다. 노동조합은 2010년 12월 28일부터 정리해고 전면 철회를 주장하며 농성을 벌였고, 2011년 1월 6일부터는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내의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에 돌입, 11월 10일까지 309일간 지속한다. 6월 11일에는 이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희망버스'가 모여 들었는데, 희망버스를 통한 대중적 캠페인은 총 다섯 차례 진행된다.
2011년 8월 5일 단식농성 중에 SBS 시사토론('한진중공업 사태와 희망버스 논란')에 출연한 노회찬은 "용역 대신 노동자 월급 주면 안 됩니까?"라고 일갈하면서, '노동자가 물리력을 쓰고 법을 지키지 않으니 용역을 쓴다'는 데 대해 "그럼 법 안 지키니까 주먹질하겠다는 거냐?"라고 말한다. 이어서 "청문회 하려고 국회에서 국민이 (조남호) 부르는데 해외로 나가 있어라 하는 전경련과 경총의 입장은 마치 '불법업소 단속 나가니까 셔터 내리고 도망가라는 것과 같다'."고 질타한다.
방송을 보던 한 시청자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린다. "@bombaram24: sbs 시사토론에서 노회찬 상임고문의 말을 듣다보니 '아름답다.'는 말만 나온다. 철저한 자료조사, 팩트를 바탕으로 한 설득력있는 주장, 개성있는 유머, 양심있는 희생...V라인이 된 턱선의 섹시함까지. 파이팅을 외쳐본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단식농성 30일째인 8월 11일 노회찬은 단식농성을 건강악화와 각계의 요청으로 중단한다.
3당합당: 1990년 민주자유당(민자당) 김영삼과 2011년 통합진보당(통진당) 노회찬
1990년 1월 21일, 당시 집권 여당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과 제2야당 통일민주당(약칭 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의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내각제 개헌 등을 조건으로 통합에 합의, 1월 22일 3당 합당 선언 기자회견을 갖고 2월 9일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다. 노태우는 "역사의 사명", 김종필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말한다. 1월 23일 통일민주당 정무회의와 의원총회 합동회에서 김영삼은 "얼마나 고뇌했는지 모른다"고 심경을 토로하고, "집권당 간판을 내리게 만든 것은 구국의 차원에서 내린 위대한 결단"이라고 자화자찬한다.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약칭 민자당)이 출범하고 김영삼은 대표최고위원이 된다. 이른바 '고뇌에 찬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내각제 개헌 밀약이 있었음이 추후에 폭로된다.
사흘 뒤인 12월 9일 오후 노회찬은 통합진보당 공동대변인으로 국회 정론관에서 마이크를 잡는다.
안녕하십니까. 노회찬입니다. 오늘 서울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지난 여름 새끼손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인 게 있어서 아 드디어 첫사랑을 만날 수 있겠구나 했는데 오늘 통합진보당 공동대변인으로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진보정당운동을 하면서 여러 직책을 거쳤지만 대변인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대변인을 언젠가는 꼭 한번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설레고 한편으로는 대단히 기쁩니다.
노회찬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여러 심경과 입장을 밝히는데, 그의 유머에 기자들 사이에 박장대소가 터지기도 했다(장윤선, 「'마이크' 잡은 노회찬 "내가 좀 망가져도 괜찮다"-통합진보당 첫 대표단 회의...공동대변인에 노회찬 깜짝 선임」, <오마이뉴스>, 2011년 12월 9일).
- 독일 녹색당 요시카 피셔 대표도 대변인 출신입니다. 유시민 대표가 농반진반으로 대변인을 해보라고 해서 생각해봤는데 정말 그렇게 해도 되겠다 싶어 대변인직을 수락했습니다.
- 좀 낯설더라도 내가 좀 망가진다는 생각으로 적극 임할 것입니다. 내년 통합진보당은 전시상황이기 때문에 선거에 도움이 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당의 입장을 적극 대변할 생각입니다. 그동안 진보당의 감동과 스토리가 부족했는데 앞으로는 그 감동과 스토리를 만들어내겠습니다. 총선 준비는 물론 정책과 관련해서도 새로운 변화를 만들겠습니다.
- 당에 긴장과 활력을 주기 위해서는 하방 해서 일선으로 내려가 더 낮은 직책에서도 일할 수 있어야 진보당입니다.
- 마치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고등학교에 입학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다시 청바지를 입고 시작하는 기분이라 앞으로 내 정치생명이 무척 길 것이라는 기대도 가져봅니다.
2012년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은 지역구 7석, 비례대표 6석으로 총 13석을 얻어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에 이어 원내 제3당이 된다. 그러나 총선 직후 비례대표 경선 과정의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고, 이로 인한 내부 갈등과 숱한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해 9월 국민참여당계와 진보신당계, 민주노동당의 인천연합계가 탈당함으로써 약 10개월 만에 분당되기에 이른다. 탈당의 흐름은 2012년 10월 21일 <진보정의당> 창당으로 이어졌고, 노회찬과 함께 조준호(전 민주노총 위원장)를 공동대표로 선출한다. 진보정의당 창당 당시 당의 19대 국회 국회의원은 노회찬(서울 노원구 병), 심상정(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갑), 강동원(남원 순창), 김제남(비례대표), 박원석(비례대표), 서기호(비례대표), 정진후(비례대표) 등 7명이었다. (※ 참고로 통합진보당은 2014년 12월 19일 헌정사상 최초로 헌법재판소의 위헌정당 결정에 따라 해산된다.)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와 노회찬의 '역사바로세우기'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김영삼은 이렇게 선언한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민주주의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오늘부터 정부가 달라지고 정치가 달라질 것이며, 변화와 개혁을 통해 살아 있는 안정이 이 땅에 자리잡을 것입니다." 김영삼은 부정부패 척결, 경제회복, 국가기강 확립을 3대 당면과제로 제시하면서 '신한국 창조'를 자신의 국정지표로 제시한다.
제14대 대통령으로 32년간의 권위주의 군부시대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던 김영삼은 한때 '개혁의 아이콘'으로 불릴 정도로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한다. 검찰 사정과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등 정치개혁을 필두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을 통한 군의 문민화 작업에 앞장섰고,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수수 폭로 및 구속, 대통령 긴급 재정경제명령 16호로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등 핵심적인 개혁을 통해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는다. 집권 1년차에는 90%라는 놀라운 지지를 받으며 대한민국 인기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네. 그것을 고민을 많이 해 봤는데, 심지어는 노태우 정부도 남북관계 개선에 큰 역할을 했다거나 심지어 전두환 정부도 과외를 없앴다거나 김영삼 정부 같은 경우에도 하나회 군부를 정치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킨다거나, 또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고 하는 그런 업적들이 여야를 떠나서 집권 한 당들은 크든 적든 간에 하나씩 남기지 않았는가, 이렇게 보여 집니다. 그런데 현 정부가 과연 뭘 남겼는가, 사실 저는 한 가지라도 있으면 칭찬을 하고 싶은데 아직까지 발견을 전 못한 상황입니다.
1993년 5월 13일 김영삼은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담화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면서도 '진상규명은 훗날의 역사에 맡기자'고 제안한다.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 정부입니다. (…) 저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과 그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문제를 놓고 많은 고뇌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러나 진상규명은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잡고 정당한 평가를 받자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진상규명과 관련하여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습니다. 진실은 역사 속에서 반드시 밝혀지고 만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 참조) 법원종합청사 417호 형사대법정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417호 형사대법정은 말 그대로 역사의 현장이다. 최고의 권력을 누리다 수사를 받았던 '거물'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전직 대통령으로는 전두환·노태우 재판 이후 21년 만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판을 받았다. 417호 대법정은 서울중앙지법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3층 높이의 천장에 방청석은 150석이다. 재판관 3명이 앉는 법대의 너비가 10m나 된다. 검사석과 피고인석에는 6명이 앉을 수 있는 길이의 긴 책상이 배치돼 있다.
그동안 이 법정에 선 인물의 면면은 화려하다. 아버지의 힘을 등에 업고 권세를 누렸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가 이곳을 거쳐 갔다. 1996년 8월 26일엔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고 기업들로부터 수천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았다.
두 전직 대통령이 당시 하늘색 반팔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선 모습은 국민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턱을 치켜들고 "기업인들로부터 수천억원을 받아 관리한 것은 사실이나 특혜와 무관하다"고 진술한 전 전 대통령의 모습이 국민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고개를 떨구고 재판에 임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이 손을 굳게 잡고 '동지애'를 보인 장면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중앙일보, 2017년 5월 24일)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헌정을 문란하게 한 행위는 성공 여부를 떠나 처벌돼야 한다는 교훈과 함께, 정경유착을 통한 검은 돈은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인식을 온 국민에게 심어준다. 그러나 김영삼의 임기 말인 1997년 12월 22일 국민 대화합을 이유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해 관련자 모두를 특별사면해 석방, 이들에 대한 처벌은 유야무야로 끝난다.
특별사면 조치 두 달여 전인 1997년 10월 7일 권영길과 노회찬 등의 <국민승리21>은 '전두환·노태우 사면 반대 범국민 서명운동' 발대식을 갖는다.
전두환, 노태우 전직대통령 사면 반대 범국민 서명운동국민의사 거스리는 정략적 전노사면 절대 반대한다.
불법적인 국권찬탈과 국민억압, 수천명의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킨 전두환, 노태우 전직대통령은 마침내 국민의 심판을 받고 구속되어 법정에서 형을 받음으로써 광주민중항쟁의 진실규명등 민족정기 회복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그럼에도 최근 정부여당과 야당 대통령 후보들은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보수층의 표를 의식하며 전두환, 노태우 전직대통령의 사면을 운운하고 있다. 전,노 사면문제는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국민들의 진정한 의사를 무시하는 여,야의 대통령 후보들의 사면 주장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 국민의사 거스리는 정략적 전노사면 절대 반대한다.
- 참회없이 용서없다. 진정한 사죄없는 전노사면 반대한다.
- 전노사면 찬성하는 여야정당 각성하라!
- 양심수를 가둬놓고 전노사면 왠말이냐!
- 전노사면 어림없다. 잘못된 악습, 법, 제도 즉각 청산하라!
※ 참조) 1997년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 21' 권영길 대통령 후보 정책공약자료집 <21세기형 민주진보사회를 향한 한국사회 대개조 플랜>을 보면 '전‧노사면 절대 반대, 전‧노사면 부추키는 정치권의 정략정치 반대' 항목에서 이런 주장을 펼친다.
◆ 올바른 과거청산과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해, 그리고 후손에게 욕되지 않은 역사를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전‧노에 대한 사면이나 형집행정지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 무고한 양민을 집단학살하는 등 인류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른 자와의 화해란 어떠한 이유로도 있을 수 없다. 전‧노씨의 사면에 대해 절대 반대하는 것은 진실과 정의와 자유의 이름으로 역사의 정기를 바로 세워 21세기 선진정치로 나아가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 따라서 사법부의 선고형량만큼의 형을 살게끔 해야 한다. 여기에는 '선 반성, 후 사면'이나 '선 양심수 전면 석방, 후 사면 논의' 등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죄에 대한 개인적 반성이나 양심수 전면 석방은 사면문제와는 별개의 사안이기 때문이다.
2017년 4월 3일, 5.18광주항쟁 유혈 진압의 주범인 <전두환 회고록 1, 2, 3>이 출간된다. 골자는 두 가지다. "광주 사태는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이다", "나는 광주 사태의 희생자이다." 이 책은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거짓 내용을 담아 법원으로부터 판매 및 배포 금지되기에 이른다. 전두환의 이런 '망언'에 대해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훈창은 이렇게 비판한다.
"30년이 지나도 아픔이 가실 수 없는 유가족과 피해 생존자들에 대한 무례함을 넘어선 공격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두에 대한 조롱이다.…전두환의 주장에 동조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집단은 실재한다. 그 집단의 유력 인사들 중 일부는 전두환·노태우의 정권을 만들고 유지해온 부역자이다.…전두환과 그 세력은 절대 반성하지도 사죄하지도 않는다. 공식적인 정부 보고서조차 만들지 못하고 왜곡당하는 위태로운 역사는, 정치적 화합이라는 명목으로 단행되는 불처벌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훈창, 「전두환 회고록과 박근혜 사면: [인권으로 읽는 세상]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 2017년 4월 8일).
평소 정권의 공과 사를 숨김없이 밝히는 것이야말로 '역사바로세우기'의 첫 걸음이라는 데에 뜻을 두었던 노회찬. 그 결과로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일빛, 1997)과 개정판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일빛, 2004)이 탄생하게 된다.
노회찬은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공개하는 것 앞에 어떤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고, 덕분에 조선왕조 500년사 속에서 건져낸 놀랍고 진기한 삽화들은 예의 쉽고 친근하고 속 시원한 그의 어투 덕에 더 재미난 역사 모음집으로 탄생한다. 매 에피소드마다 오늘의 현실과 비교하는 촌철살인의 촌평이 곁들여지는데, 시의적절한 해설은 그의 입담과 기지만큼이나 단연 돋보인다. 1997년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제목으로 첫 출간되던 당시 CD롬을 활용한 출판 시장의 개막을 알리며 화제를 모았고, 2004년판에서는 현행 제도와 법률에 맞춰 수정보완함으로써 당시와 달라진 우리의 현주소를 읽게 한다(<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출판사 서평).
2004년 12월 12일 노회찬은 <난중일기>에 「단절되지 않은 역사의 보복을 체험한다」는 글을 올린다.
1979년 12월 13일 오전.
104번 버스를 타고 국군 보안사령부로 향했다.
착검을 한 M16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3미터 간격으로 보안사 담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장갑차 몇 대는 언제라도 발포할 태세로 대기 중이었다. 간밤에 한강대교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무장병력끼리 유혈충돌이 있었고 그 진원지는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는 보안사라는 소문은 거의 사실로 보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12.12사태>로 불려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12.12사태>로 전두환 군사독재체제는 사실상 시작되었다. 보안사령관이 직속상관인 계엄사령관과 국방장관을 체포하면서 발생한 이 사태로 제 5공화국은 실질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12.12사태>의 주모자들은 군부내 박정희의 친위세력으로 길러져온 <하나회>장교들이었다. 이들이 12.12 하극상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박정희 시해범인 김재규에 대해 온정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12.12사태>를 통해 찬탈한 권력 곧 전두환 군사독재체제는 박정희 유신체제의 정신적, 정치적 계승자였다.
지난 10월 법사위 국정감사를 마치면서 느낀 것은 <대통령만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만 보면 분명히 노무현정부인데 각료들을 보면 김대중, 김영삼 심지어는 노태우정부의 체취가 혼재되어 있었고, 밑으로 내려가면 제 5공화국, 제4공화국의 잔재가 굳건히 남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불의에 대한 단절이 없었던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정권교체>라는 명분으로 단절 대신 타협과 야합으로 이어 온 권력교체의 비극이 낳은 결과이다.
<이철우의원 간첩조작 사건>에서 우리는 유신잔당, 5공잔당이 국가 권력의 상층에 여전히 잔존해 있는 모습을 본다. 신유신세력, 신 5공집단이 재생산되는 현장을 목격한다. 단절되지 않은 역사의 보복을 체험한다. 현역의원이 간첩으로 암약하고 있다고 <폭로>한 이 사건의 폭력성은 최근 모 지역에서 발생한 <집단 성폭행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간첩암약설에 이은 한나라당 지도부의 태도 역시 집단성폭행 사건 가해자의 부모들이 피해자에게 <잘 사나보자>고 협박하고, 사건수사 경찰경찰관이 <너희들이 꼬리치며 좋아서 찾아간 것 아니냐 내 고향이 이 지역인데 너희들이 이 지역 물 다 흐려놨다>며 윽박지른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12.12사태>의 주동자들은 1995년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내란죄와 반란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하던 유신잔당, 5공 잔당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대한민국 국회 법사위를 점거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신새벽도 노동의 새벽도 아직은 오지 않았다.
사실 역사바로세우기는 노회찬의 국회의원직을 앗아간 <삼성X파일 사건>과 관련해서도 진행되어야 마땅하다. 2005년 7월 24일 노회찬의 <난중일기>(「역사에는 시효가 없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른바 엑스파일이라 불리는 옛 안기부 도청 녹취록 전문을 읽으면서도 똑같은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풍문으로만 들었던 얘기들, 설마 하면서 듣고 카더라 하면서 옮기던 야사(野史)들이 국가안전기획부의 사관(史官)들에 의해 정사(历史)의 기초가 될 사초(史草)로 기록되어 있었다.
문제의 테이프 관련 당사자들이 낸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하여 서울 남부지법의 판사는 도청테이프의 원음을 공개하거나 그 내용을 자막으로 보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결정은 테이프도 듣지 않고 녹취록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려진 잘못된 판단이다. 만일 그 판사가 97년 9월 9일의 도청테이프를 직접 듣고 이에 대한 두 개의 녹취록과 10월 7일, 4월 7일 자의 또다른 녹취록까지 모두 읽었다면 이런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
따라서 지금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할 일은 도청테이프의 원음 공개와 녹취록 전문 공개이다. … 국민들이 그 내용을 온전히 제대로 알고 있어야 이 사건 관련자들에 의한 왜곡을 막을 수 있다. 역사에는 시효가 없다. 50년, 60년 전의 과거사도 제대로 된 <청산>을 위한 첫걸음으로 <진상규명>에 나서지 않는가? 남부지법 판사는 테이프 원음 공개시 1건당 5천만원식 물리겠다고 했다. 법원이 이 결정을 유지한다면 우리는 1건 당 5천만원씩 내더라도 알 것은 알아야 한다. 문화방송이 돈이 없다면 국민모금을 해서라도 진상이 공개되도록 해야 한다.
노회찬이 의원직을 박탈당한 다음날인 2013년 2월 15일 '노회찬 대표 안기부 X파일 유죄 선고 대법원 규탄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의 기자회견문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 모든 사실은 하나로 모아진다. 대법원은 삼성과 거대언론 그리고 검찰의 유착을 폭로한 노회찬 대표를 죄인으로 만들고, 재벌 언론 검찰에 대한 도전의 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본보기를 만들려 했을 뿐이다. 대법원이 이번 판결로 안기부 X파일 사건이 종료되었다고 본다면 이는 오산이다. 역사의 법정·상식의 법정에 시효는 없다. 먼 훗날 세워질 그 법정에서 재벌과 권력의 손을 들어준 대법원의 부끄러운 판결 또한 분명 심판 받게 될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이제 국민 속으로 들어가 노회찬 대표의 무죄를 입증할 것이다. 삼성 X파일의 사건의 실체를 끝까지 밝혀 과연 누가 죄인인지를 세상 앞에 드러내고, 재벌-권력 유착의 뿌리를 끊어 낼 것이다. 정의를 바라는 국민의 곁에 의로운 일을 행한 노회찬 대표를 반드시 되돌려 놓을 것이다."
3년 뒤인 2016년 4월 20대 총선에서 노회찬은 경남 창원 성산구에 출마, 3선 국회의원으로 돌아온다. 역사의 법정, 상식의 법정에서 노회찬은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에 보관돼 있던, 노회찬이 공개한 1개의 테이프 외에 277개 테이프의 내용은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모두 공개되어야 한다.
IMF 외환위기 사태 : 김영삼과 노회찬
정권 말기인 1997년 1월 한보철강으로 시작된 도미노식 대기업 부도 사태와 차남 김현철의 국정 개입 등 일련의 사건으로 김영삼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고, 무엇보다 집권 말기 IMF 구제금융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엄청난 국민적 비판 속에서 임기를 마감한다. 'IMF 외환위기'는 김영삼에 대한 평가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것 중 하나로, 대통령 재임 중이던 1997년 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된 초유의 사태를 가리킨다. 약 4년 뒤인 2001년 8월에 일단락된 IMF사태는 김영삼의 대표적인 과오로 언급되며 퇴임 뒤에도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닌다.
2016년 6월 9일 노회찬은 위기 탈출의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20년 전의 IMF 위기를 호명해낸다.
배가 침몰하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 이에 대응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타이타닉호 방식이고, 하나는 세월호 방식입니다. 타이타닉호 방식은 위기에 처한 배에서 어린이, 여성, 노약자, 사회적 약자부터 먼저 구출하는 방식입니다. 잘 알고 있다시피 세월호에서는 거꾸로가 됐습니다. 선장부터 먼저 탈출했습니다. 무고한 어린 학생들은 구조되지도 못한 채 희생됐습니다. (…) 저는 구조조정할 때는 인력감축 위주로 가고, 또 인력감축에 있어서도 가장 대접을 못받아왔던, 차별을 받아왔던 사회적 약자부터 먼저 당하는 그런 세월호 방식, 이 기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그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약자부터 희생하는 이른바 강자를 살려서 강자가 나중에 손해 보는 약자까지 다 구한다는 그 낙수효과 이론은 세계적으로 이제 폐기처분되어가고 있는데, 유일하게 이 대한민국 땅에서는 그 낙수효과 이론에 근거해서 여전히 정부의 시책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토론회가 IMF 대응에 대한 반성으로써,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에서 그 결과로 이뤄진 사회양극화와 자영업자의 대폭증가 등 여러 사회적 병리현상을 이제 극복하고 치유하는 새로운 전환점의 시책이 모색되는 자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김영삼의 좌우명, 노회찬의 좌우명
늘 가까이 두고 스스로 경계하거나 가르침으로 삼는 말을 뜻하는 좌우명(座右銘)이라는 말은 후한(後漢)의 학자 최원(崔瑗)에서 시작되었다. 자리(座)의 오른쪽(右)에 일생의 지침이 될 좋은 글을 '쇠붙이에 새겨 놓고(銘)' 생활의 거울로 삼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역대 대통령 중에 자신의 좌우명을 가장 확실하게 각인시켜 준 사람은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과 함께 '대도무문' 김영삼이다. 송나라 혜개 스님의 화두에서 유래한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문구는 문맥상 '큰 깨달음이란 특별한 길이 없다'로 풀이해야 하지만, 김영삼은 '큰일을 하는 사람은 거칠 것이 없다'는 의미로 썼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일부에서는 김영삼의 좌우명을 '大盜無門'(큰 도둑에겐 문이 없다)이라는 말로 비꼬게 된다.
역대 대통령의 선호하는 좌우명을 보면, 이승만과 윤보선은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 박정희는 '명지보국'(明知報國 가난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밝은 지혜로 뜻을 펼치겠다), 최규하는 '범희무익 유근유공'(凡戱無益 惟勤有功 놀기만 하면 아무런 이득이 없고 오직 부지런해야 공을 이룰 수 있다), 노태우는 '참·용·기'(참자, 용서하자, 기다리자), 김대중은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과 함께,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노무현은 '자신에겐 엄하고 타인에겐 너그럽게', '대붕역풍비 생어역수영'(大鵬逆風飛 生魚逆水泳)을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가훈이 '정직과 성실'인 이명박은 '달리면서 쉬자'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좌우명을 마음에 새겼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바르고 현명하게 살자'를 좌우명으로 삼은 박근혜가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은 '애국애족'(愛國愛族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다)과, '정도정치'(正道政治 국가 주권자가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바른 길을 간다)'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명박과 박근혜의 사례는 좌우명이 한 사람의 삶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는지를 거꾸로 알게 해준다.
노회찬은 한겨레의 '2007대선 유권자와 함께 하는 경선후보 검증'에서 자신의 좌우명은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맙시다"라고 밝힌다(한겨레 2007년 9월 4일). 브라질 대통령으로 당선된 룰라의 선거 캠페인 구호이기도 하다. 룰라는 "행복해지기를 두려워 말라! 그 동안 우리 국민들은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역설한다.
2004년 4월 3일 <KBS심야토론> '17대 총선 국민의 선택을 묻는다'에 출연한 노회찬은 마무리 발언을 이렇게 한다.
한나라당이 1번이고, 민주당이 2번이고, 열린우리당이 3번입니다.
민주노동당은 12번입니다. 1번과 2번이 망친 나라를 12번이 살리겠습니다.
(…) 우리 유권자가 잘 판단한다면은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특히 민주노동당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권자 여러분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2016년 20대 총선 경남 창원 성산에 출마한 노회찬은 3월 20일 '세계 행복의 날'을 맞이해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3월 20일(내일)은 UN이 정한 '세계 행복의 날'입니다.
'세계 행복의 날'을 맞이하여 노회찬은 행복을 위한 작은 캠페인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3월 20일 하루만이라도 잃어버린 웃음과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취지입니다. 각자 행복을 느끼게 하는 지인, 반려동물 그리고 사물 등을 사진으로 찍어 서로의 행복을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장의 사진에 담긴 '결정적 순간'이 우리 모두를 미소 짓게 할 수 있습니다.
※ 참여하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①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주변의 지인, 반려동물, 그리고 사물 등을 스마트폰으로 자유롭게 촬영하고, ② 사진에 해시태그 '#행복데이'를 달아 각자의 SNS에 공유해주세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함께 나누는 작은 실천을 통해 행복으로 동맹을 맺읍시다."
- 함께맞는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자신은 항상 낮은 곳에 둡니다. 그리고 결코 다투는 법이 없기 때문에 또한 허물이 없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이 물과 같다고 하는 까닭입니다."
2016년 2월 1일 20대 총선 창원 성산 출마 기자회견문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물은 흐르면서 점점 낮은 곳으로 자리하고 낮아질수록 차츰 모여서 갑니다. 산을 만나면 휘감아 돌고 언덕을 만나면 채워서 넘고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어 떨어지면서 끝내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물, 바다로 모입니다. 진보정치가 상선약수의 정신으로 민중의 바다로 나아가도록….
2016년 1월 10일 노회찬이 트윗에 올린 신영복의 시화로 글을 맺는다.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
이 말은 밤하늘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은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위로(慰勞)입니다.
몸이 차가울수록 정신(理念)은 더욱 맑아지고
길이 험할수록 함께 걸어갈 길벗을 더욱 그리워합니다.
맑은 정신(意志)과 따뜻한 우정(爱情)이야말로
숱한 고뇌(苦惱)와 끝없는 방황(孤独)에도 불구(不拘)하고
그 먼 길을 함께하는 따뜻한 위로(慰勞)이고
격려(激勵)이기 때문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