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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일의 파업, 77일 이후의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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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일의 파업, 77일 이후의 트라우마 [노동자에게 파업권을 許하라·③]끝나지 않은 상처 - 파업, 폭력, 그리고 상흔<上>
흔히들 말한다. 노동자의 운명은 회사의 운명과 같이 한다고. 그러나 이 말은 기껏해야 절반의 진실도 말하지 못한다. 노동자의 운명이 회사의 운명과 같을 때는 그 회사가 잘 나갈 때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은, 이 말도 틀렸다. 요즘은 회사가 잘 나가더라도 노동자들을 내쫓는 시대이니까. 하물며 회사가 어려워지면 오죽하겠는가. 노동자 운명이 회사 운명과는 천지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쌍용차 사태를 통해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2009년 5월부터 8월 초까지의 '77일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생존투쟁의 과정이자 트라우마의 과정이라는 이중 과정이었다. 트라우마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말한다. 이 상처는 물리적 상처와는 달리 쉽게 아물지 않고 긴 흔적을 남긴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 중에 병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상흔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 한다. 이것은 심하면 개인의 온전한 건강은 물론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전반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파괴력을 지닌다. 트라우마의 원인은 폭력이다. 폭력은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경제적 폭력, 제도적 폭력, 심리적 폭력, 언어적 폭력 따위를 모두 아우른다.

나중에 한 노동자는 '77일 파업'에 참여했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억울해서 투쟁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잔업 다 하고, 일 있으면 약속 시간도 미루고 잔업 특근 다 하고 해 줄만큼 해 줬다. 남들 소위 말해서 땡땡이 칠 때 그런 것조차 안하고 일했다. 직장이 시키는 거 다 해 왔다. 그랬는데 해고당하니까… 너무 억울한 거다. 나보다 생활, 근태를 개판으로 한 사람들은 살고, 나는 죽으니까 화가 나고 억울했다."(2009. 11. 23. <참세상>)

그렇다.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을 팔아야 먹고살 수 있는 노동자의 운명은 대단히 억울하다. 그래서 분노한다. 그나마 회사가 잘 나가고 잘리지만 않으면 억울함도 분노도 덜하다. 그러나 곧 바닥이 난다. 그래서 싸운다. 내 운명에 가하는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저항은 곧 더 심한 폭력을 부른다. 기업과 국가는 자본의 논리로 움직인다. 돈벌이 논리에 압도당한 사회경제 시스템은 곧 폭력의 백화점이다. 결국은 패배하고 좌절하고 상처받기 쉽다.

쌍용차의 경우 당초 2600여 명을 '정리'하려는 폭력적 계획은 '희망퇴직' 또는 '무급휴직'이라는 자발성을 빙자한 정리해고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수백 명에 대해 '경영상 이유에 의한 정리해고'로 결론이 났다.

결국 실직한 수천 명의 노동자나 파업 참가 노조원들(해고자 192명, 무급휴직자 468명, 희망퇴직자 130명, 비 해고자 중 옥쇄파업에 참여했던 144명 등) 모두 정신적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다. 이들은 "쌍용차 직원 버스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려 더 살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오죽하면 노동부의 과장조차 "근로자들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지 않으면 향후 쌍용차가 회생하는 데 큰 장애가 될 수 있다"라고 했을까.

경제적 공포와 자살

2009년 7월 2일 쌍용차 희망퇴직자 김 모 씨(33세)가 경남 진해 남양동 조선기자재 공사장에 세워놓은 본인의 승용차에서 자살했다. 그는 쌍용자동차 창원공장에서 일했고 회사의 해고계획이 나온 직후인 5월 18일 1차로 '희망퇴직'을 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전날 밤 아파트 대출 문제를 두고 아내와 다툰 뒤 혼자 술을 마셨다.

같이 일했던 동료 박 씨는 "김 씨는 아파트 분양을 받고 대출을 갚지 못해 걱정했다. 희망퇴직 당시 왜 희망퇴직을 했냐고 물었더니 '대출 받은 것을 갚아야 하는데 월급도 안 나오고 해서 희망퇴직 했다'고 답했다. 희망퇴직하면 위로금과 퇴직금이 나오니까 그것을 염두에 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박 씨는 "김 씨는 술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다. 회사에서는 착실하고 일 잘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2009년 초부터 임금체불이 있었고 희망퇴직자는 퇴직금 및 위로금을 약속한 날짜에 지급받지 못했다. '직장을 잃은' 쌍용노동자들은 평균 4378만 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 경제적 폭력이 노동자를 자살로 모는 셈이다.

ⓒ프레시안 자료사진

착실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이어간다. 오늘은 힘들어도 내일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 당대는 힘들어도 자식 세대는 좋아질 것이란 희망으로 참고 살아간다. 그런데 경제 위기 또는 경영 위기가 닥치면 당장의 생계가 위협받는다. 게다가 최소 수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장만한 경우 해마다 집값이 쑥쑥 오르지 않는다면, 또한 달마다 월급이 잘 나오지 않는다면 거액의 대출금을 갚을 길이 없다.

빚은 늘어만 가고 마음의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경제적 공포'가 몸과 마음을 엄습한다. 가족 사이에 갈등이 증가하고 모든 인간관계가 소원해진다. 삶의 희망이 끊긴다. 바로 이것이 착하고 성실한 노동자를 자살로 몰고 가는 메커니즘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돈벌이 시스템은 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게 만든다.

폭력과 상흔

회사는 2009년 5월 8일 2405명에 대한 살생부를 발표했다. 사회안전망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 "해고는 살인"이다. 어쩌면 노동자가 길거리에서 극심한 폭행을 당하는 것보다 회사로부터 해고통지서를 받는 것이 더 가혹한 폭력일지 모른다. 삶의 희망이 갈가리 찢기는 순간일 것이다. 좌절감, 불안감, 무력감, 절망감이 엄습한다.

게다가 생존권을 위해 투쟁에 나서는 순간 경찰과 검찰은 노동자들에게 물리적, 제도적 폭력을 가한다. 자본 측의 재산권과 경영권, 기득권 앞에 노동 측의 생존권과 노동권은 무참히 짓밟힌다. 저항하다가 뇌진탕을 겪은 한 노동자가 말한다.

"진압 될 때 전 조립공장 옥상에서 서 있었어요. 처음에는 경찰이 옥상 위에 올라선 줄 모르고 있었어요.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 고개를 돌렸는데 경찰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어요. 그리곤 갑자기 '꽝' 했어요. 뭐로 어디를 찍었는지 모르겠는데 전 그 자리에 쓰러졌어요. 그 뒤 머리를 쾅쾅 밟혔던 게 기억나요. 그리고 그 다음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저항하는 노동자들은 더 이상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

"옥상에서 체포 되어 내려오는데 한 특공대원이 제게 눈을 부라리며 이렇게 소리 질렀던 게 기억나요. '자식 같은 놈한테 맞으니 좋냐? XX놈아. 너 때문에 내 손가락이 부러졌어'라고 말이죠."

경찰은 노조의 파업 투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과잉진압 논란을 부를 정도로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다. 일상적인 진압봉과 방패, 군홧발 이외에도 5만 볼트의 고압전류를 흘려 상대방을 제압하는 테이저건을 썼고, 또 스티로폼을 녹이는 2급 발암물질 디클로로메탄이 함유된 최루액을 노조원들에게 퍼부었다.

목숨을 뺏기도 하는 다목적발사기도 진압용으로 사용되었다. 해고자 최성국 씨는 11월 9일 구속노동자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통증이 심해서 낮이고 밤이고 거의 잠을 못잡니다. 제일 힘든 것은 하체를 전혀 못 쓴다는 겁니다. 경찰들에게 전신 몰매를 맞아 후유증으로 하체를 쓰지 못하고 목,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경찰들은 제가 기절을 2번이나 했는데도 계속 때렸습니다. 도와주십시오!"(2009. 11. 17. <레디앙>)라며 극심한 심신의 고통을 호소했다.

노동자들은 파업 뒤 경찰 조사 과정에서도 폭력적 경험을 했다. 생존권 투쟁을 한 노동자들을 중죄인 취급하고 욕설을 퍼붓는 것은 기본이었다. 유치장으로 넣겠다거나 무급휴직 대상자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협박도 일삼았다. 경찰 조사를 받은 노동자들은 모두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 쌍용차 파업이 끝난 뒤 "무급휴직에 넣어준다"는 경찰의 감언이설에 속아 거짓 진술을 한 노동자는 자살 시도를 해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처음엔 좋게 말하다가 제가 모른다고 하면 유치장으로 보내겠다고 겁을 줬다. 무급휴직으로 협박한 것은 물론이고……. 경찰관은 '77일 동안 공장안에서 있었던 게 더 힘드냐, 수사 받는 게 더 힘드냐?'라고 물었다. 나는 '수사 받는 게 더 힘들다'라고 했죠. 그게 더 힘들었으니까. 목욕탕에 갔는데 스트레스를 받아 몸무게가 2킬로그램이 줄었더라. 그렇게 시달림을 당하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희망퇴직 쓸 걸, 파업 중간에 나올 걸, 내가 왜 해고자가 되어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나, 차라리 죽어버릴까……. 조사 받는 꿈도 많이 꿨다."

"첫 날은 '부모님 앞에서 맹세할 수 있냐'라며 자기가 부모님을 데리고 올 테니까 그 앞에서 조사를 받자고 했다. 가뜩이나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서 마음이 안 좋았는데 미치겠더라. 다음번에 주소를 찍고, 차 시동까지 걸며 계속 협박하더라. 그때 '가지 말자'라고 했는데 눈물이 나더라. 정말 비참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얘기 똑바로 해라. 안 그러면 감옥에 간다'라며 또 조사를 시작했다. 집에는 경찰조사를 받으러 간다고 말도 못했다. 77일 동안 집에서는 (공장 밖으로) 나오라고 계속 말했는데 나는 끝까지 있었다. 잘 됐으면 해서……. 경찰서까지 간 거 알면 부모님의 상심이 너무 클 것 같았다. 조사받고 집에 갔는데 부모들은 표정이 안 좋은 게……."(2009. 11. 23. <참세상>)

노동자와 노조는 파업 과정에서 '재산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경제적 폭력까지 당한다. 천문학적 '손배 가압류'가 그것이다. 일례로 2009년 10월 7일 경기경찰청은 쌍용차 옥쇄파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관 부상, 장비 손괴 등 피해 명분으로 치료비 1640여만 원, 물적 피해 20억3800여만 원, 위자료 2억800만 원 등 총 22억6200여만 원의 손해배상을 법원에 신청했다. 법원은 가압류를 일부 승인했다. 쌍용차 노조원 67명은 각 1000만 원씩 총 6억7000만 원의 임금채권에 대해 가압류를 당했다. 또 3개 단체 101명 중 주택이 있는 22명에게는 1인당 1000만원씩 총 2억2000만 원의 부동산 가압류가 결정됐다.

나아가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회사나 동료, 정부로부터의 깊은 배신감으로 심리적 폭력을 경험하기도 한다. 2009년 8월 6일 노사 합의 이후에도 약속 사항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노조 분열 및 파괴 공작이 진행되었고 민형사상 고발도 취하되지 않았다. 쌍용차노조(새 위원장 김규한)는 민주노총을 탈퇴하고 11월 2일 회사의 경영정상화와 고용안정을 위해 일체의 쟁의행위를 하지 않기로 선언했다.

노조는 평택시청에서 '노·사·민·정 한마음 협약식'을 열고 "잘못된 노사문화를 청산하겠다"라며 사실상의 '무분규 선언'을 했다. 동시에 회사는 파업 농성에 참여했던 비 해고자 144명에 대해 '불법 파업 참가'를 이유로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 사이는 원자화, 고립화, 대적화했다. 산 자와 죽은 자, 비정규직과 정규직, 농성 참가자와 방관자, 회사 편과 노조 편, 온건파와 투쟁파 사이에 내부 분열이 심해졌다.

노동부는 10월 26일 쌍용 해고자 2178명 중 434명에 해당하는 19.8퍼센트가 재취업에 성공했다고 했지만 재취업 통계엔 인력시장, 대리운전, 주유소 비정규직 등에서 일자리를 찾은 이들이 다수다. 게다가 상당수의 노동자들에게 '쌍용차 출신'이라는 것이 '낙인'이 되어 재취업에 방해가 된다.

해고자 K 씨(38세)는 파업농성보다는 명예퇴직을 선택한 뒤 2009년 6월 말 동료 2명과 함께 대구의 한 자동차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면접을 봤다. K씨는 자동차 기술을 갖고 있었기에 실무 담당자도 꽤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K씨는 낙방했다. 면접을 끝내고 출근 날짜까지 잡은 상태에서 갑자기 '무기한 채용 연기'라는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쌍용차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K씨는 지인을 통해 '윗선에서 쌍용차 파업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상흔의 결과 - 복합적 스트레스(PTSD)

<트라우마>를 쓴 J. 허먼에 따르면, 가정 폭력이나 전쟁, 정치 탄압 등 심대한 폭력의 경험은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에 깊은 상흔(트라우마)을 남긴다. 이 상흔은 두려움이나 무력감을 동반하는데, 이것은 엄청난 고통이다. 사람들은 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스트레스 증상을 드러낸다. 과민반응, 악몽재현, 감각동결, 의식변형, 관계장애 등이 대표적이다. 이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 한다.

또 신체화 증상으로 우울증, 신경질, 심장병, 불면증, 두통, 소화 장애, 변비, 두드러기 등이 나타난다. 일례로 "해고는 살인"이라며 77일 간 투쟁에 핵심으로 참여했던 R씨는 공권력의 진압 작전으로 인한 후유증을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지금도 귀가 멍해질 때가 있다. 자다가도 잠꼬대를 하고 큰 소리를 치는 조합원들도 있다. 저번에는 비가 오는 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비옷을 입고 (투쟁하기 위해) 나가려고 한 기억도 있다."(2009. 11. 6. <참세상>)라 고 했다.

그렇다면 77일간의 파업에 열심히 참여한 노동자들은 전반적으로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까? "쌍용차 노동자 가운데 42.8퍼센트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고 71퍼센트가 심리 상담이 필요한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전국금속노동조합이 2009년 9월 14일 발표한 '2차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다.

42.8퍼센트의 PTSD수치는 성적 희롱이나 폭력이 많은 서비스 노동자(6.7퍼센트)나 인명 사고를 자주 경험하는 열차 기관사(6.5퍼센트)보다 6~7배나 높은 수치였다. PTSD를 앓는 사람은 환청 등의 지각 이상이나 공황발작을 경험할 수도 있고 공격적 성향, 충동조절 장애, 우울증, 약물 남용 등 연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우울증도 심각해졌다. 정상 수준의 우울증상을 보인 사람은 위의 전체 조사 대상의 7퍼센트로 1차 조사(6월)보다 7퍼센트포인트 감소했다. 그러나 중등도 우울증상과 고도 우울증상을 보인 비율은 파업이 끝난 뒤 더 늘었다. 전체 응답자 중 30.1퍼센트가 중등도 우울증상을, 41.0퍼센트가 고도 우울증상을 겪고 있어 71.1퍼센트가 심리 상담이 필요한 수준이다. 파업이 한창이던 6월에 실시한 1차 조사보다 무려 16퍼센트나 높아진 셈이다. 특히 그 가운데 당장 치료가 필요한 '고도 우울증상'은 미군 폭격장 근처에 있던 매향리 주민보다 5배 이상 많았다.

특히 파업으로 인해 빚이 늘어난 사람일수록, 회사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린 사람일수록, 노사합의가 이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는 사람일수록 정신건강이 악화했음이 경험적으로도 확인됐다. 일례로 파업 기간 중 빚이 늘어난 사람 가운데는 무려 43.8퍼센트가 고도 우울증을, 30.8퍼센트가 중등도 우울증을, PTSD는 56.1퍼센트가 겪고 있었다.

반면 파업 기간 채무증가가 없었던 사람 중엔 고도 우울증은 25퍼센트, 중증도 우울증은 27.5퍼센트였고, PTSD도 35.3퍼센트로 채무 증가자 집단에 비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낮았다. 또, 파업 기간 중 회사의 회유와 협박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는 집단과 없는 집단의 경우, 'PTSD' 유병율은 각각 45퍼센트와 60퍼센트였다. 나아가 노사합의 이행 여부에 대한 강한 불안감을 가진 집단이나 파업 후 동료나 이웃과의 관계가 매우 나빠진 집단의 경우 유독 PTSD 유병율이 높았다.

노사합의 이행에 대해 '너무 불안하다'라고 대답한 사람 가운데 무려 63.2퍼센트가 이 질환을 갖고 있었고, '약간 불안하다'라고 한 응답층에서는 21.7퍼센트, '별로 불안하지 않다'라고 응답한 집단에서는 36.4퍼센트가 PTSD를 보였다. 또, 동료와의 관계가 '매우 악화된' 집단에서는 69.1퍼센트가 PTSD를, 83.1퍼센트가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상을 겪고 있었다. 이웃과의 관계가 '매우 악화된' 집단에서는 각각 69.6퍼센트, 83.3퍼센트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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