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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축구, 통일 축구 '얼굴 마담'에서 월드컵 제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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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축구, 통일 축구 '얼굴 마담'에서 월드컵 제패까지 [프레시안 스포츠] 언제까지 일당백 정신으로 세계무대에 도전할 텐가
20년 전 한국 스포츠는 소련 및 동구권의 붕괴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정권 차원에서 남북 스포츠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핵심 사업 중 하나는 1990년 남북 통일 축구대회. 재미있는 건 여기에 여자축구가 포함됐었다는 사실이다.

통일축구의 '얼굴마담' 역할 했던 한국 여자축구

왜 여자축구가 남북한 친선 경기 프로그램에 들어갔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한과 원활한 협상을 위해서였다. 북한은 이미 여자축구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당시 정동성 체육부 장관이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에 여자축구팀을 파견한 것도 이런 포석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여자축구팀을 급조해서인지, 동호인 수준에 머물렀던 한국은 아시안게임에서 북한에 0-7로 대패했지만 통일 축구는 급물살을 탔다. 북한도 여자축구가 통일 축구 대회에 포함된 것에 고무적이었다. 이와 중에 통일 축구의 산파 역할을 했던 박철언의 정치적 입지는 급부상했다. 그는 1990년 12월에 체육청소년부 장관에 취임했다.

하지만 한국 여자축구는 너무 수준이 떨어졌다. 남자 중학교 팀과 경기를 하기에도 버거울 정도였다. 그래서 여자축구는 완전히 통일 축구대회의 '얼굴마담'으로 전락했다. 대회 전 북한 주민들과의 접촉을 염두에 둔 까닭에 미모와 학벌을 갖춘 3명의 여대생을 여자축구 대표팀에 포함시켰다. 북한 관계자는 "못 생긴 것이 무슨 죄인가, 학벌이 모자라는 것이 축구선수의 잘못인가"라며 혀를 찼다. (이영만, 공 하나에 얽힌 10만 가지 사연 中)

▲ 1990년 남북 통일축구 서울대회 당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북측 축구선수들. ⓒ연합뉴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여자축구 경기는 결국 열리지 않았다. "당시 평양의 날씨가 쌀쌀하기도 했고, 여자의 경우 현격한 실력차를 고려한 북측의 배려 때문이었다"는 게 관계 당국의 공식 입장이었다.

통일 축구 열풍이 식자 효용가치가 없어진 여자축구는 '찬밥' 신세가 됐다. 급기야 1991년 신분보장과 코치교체 등을 요구했던 여자 대표팀 선수 9명은 팀에서 제외됐다.

무명 지도자와 차별 받는 여자들이 만든 패자 부활전

그로부터 한국 여자축구는 초고속성장을 했다. 2002년 월드컵 개최 잉여금을 통해 여자축구에 대한 지원이 본격화됐다. 축구를 하고 싶어하는 소녀들에게도 기회가 열린 셈이었다. 과거처럼 육상, 필드하키, 핸드볼 등 다른 종목을 거쳐서 축구를 하는 게 아니라 이들은 처음부터 축구의 기본기를 닦을 수 있었다.

한국 스포츠의 최대 특장점인 철저하게 대표팀 위주로 지원이 이뤄지는 '소수 정예' 시스템도 그대로 여자 축구에 접목됐다. 여기에 이번에 기적을 일군 최덕주 감독처럼 선수시절 빛을 보지 못했지만 열정과 실력을 갖춘 지도자들도 묵묵히 여자축구 발전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던 여자 축구선수들이 흘린 땀은 20세 이하 여자축구 월드컵 3위에 이어 17세 이하 대회에서 우승을 기록한 원동력이었다. 이런 점에서 여자축구의 기적은 과거 한국 여자 스포츠가 걸어온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2만여 명이 동대문 야구장에 모여 국민환영대회를 하게 했던 1967년 세계여자농구 준우승, 1976년 몬트리얼 올림픽 여자배구 동메달과 1988년, 1992년 올림픽 여자 핸드볼 2연패의 성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연습량에서 출발했다. 여성에게 아직 사회적 기회제공이 부족한 불공정 사회에서 그녀들은 고되지만 가장 빠른 방법을 선택했다.

▲ 트리니다드토바고 수도 포트오브 스페인의 해슬리 크로포드 스타디움에서 현지시간 25일 우승을 차지한 U17 여자축구월드컵 한국대표팀의 김다혜가 태극기를 들고 동료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뉴시스

'트로피즘'의 역설과 여자축구의 지속성장

국제대회 성적에만 얽매어 탑다운 방식으로 스포츠를 발전시키는 방식은 '트로피즘(trophyism)'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비인기 종목이지만 효자, 효녀 종목으로 손꼽히는 핸드볼 같은 종목들이 '트로피즘'의 덕을 보기도 했지만 피해를 볼 때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극심한 불균형에서 '트로피즘'의 폐해는 나타났다. 튼튼한 대표팀만으로 최대 10년까지 먹고 살 수는 있겠지만 그 뒤에는 와르르 무너지는 일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중국 여자 축구가 좋은 예다. 중국은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정상급이었던 중국은 뒷걸음질치고 있다. 지원도 줄고, 하부구조도 튼튼하지 않아 세대교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여자 스포츠 유망주들이 냉정하게 축구를 버리기 시작하면서 생긴 일이다.

한국 여자축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기적을 이룬 황금세대가 2015년 여자 월드컵에서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에 쏟는 관심에 반의 반만이라도 여자 축구 하부구조의 심각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 일당백의 정신으로 세계무대에 도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래의 축구 소녀들에게 필요한 건 마음껏 공을 찰 수 있는 무대다. 그게 학교가 됐건, 클럽이 됐건 상관 없다. 그녀들이 설령 축구 선수가 못 된다 해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축구를 통해 즐겁고 건강하게 동료들과 같이 하는 법을 터득하면 된다. 그들 중 일부가 제2의 지소연이나 여민지로 성장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이런 환경에서 '즐기는 축구'와 '창조적 축구'도 나오게 되는 게 아닐까?

지금으로부터 20년 뒤 여자축구가 이런 '지속성장' 모델을 만들었다는 찬사를 듣고 싶다면 정답은 이미 나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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