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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큰사전'을 다시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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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큰사전'을 다시 생각하며 [창비주간논평] 정부의 사업비 축소에서 보이는 협애함
2014년이면 남북이 함께 편찬한 사전, <겨레말큰사전>이 나올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그렇다. 돌이켜보면 2005년 겨레말큰사전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원회)가 결성되었을 때 우리는 남북이 함께 우리말사전을 편찬한다는 데 흥분했고, 이 사전이 분단 이전과 이후의 우리말을 집대성한 최초의 사전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이렇게 흥분과 기대 속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사전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자못 넉넉했다. 분단 이후 남북이 각자의 규범을 세웠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말을 다듬어온 터라 함께 조사하고 조정하는 일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상했고, 지루하고 지난한 조정과정도 통일을 준비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고은 시인(겨레말큰사전사업회 이사장)에게서 사전편찬 사업이 중단될 위기에 이르렀다는 호소를 들어야 했다. '우리 민족이 함께 쓸 사전 하나 가져봤으면' 하는 소망이 정치상황에 휩쓸려 어그러지는 일이 되풀이되어야 하는 것인지, 시인의 호소를 듣는 마음은 안타깝다 못해 참담하다.

분단된 남과 북, 갈라진 우리말사전

1948년 4월 6일, 서울 YMCA 회관에서 <조선말 큰 사전> 첫째권 간행 축하회가 열렸다. 1929년 민족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결성한 이후 조선어학회사건이라는 모진 탄압을 이겨낸 끝에 해방 조국에서 내놓은 첫번째 결실이었으니 참석자들의 감회는 말로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민족분열의 조짐이 일고 동족상잔의 위기감이 커지던 때, 축하회는 사전 출판을 완수하겠다는 의지와 통일정부 수립의 의지를 다지는 자리로 되었다. 한 참석자는 긴급동의로 '4월 19일부터 평양에서 열릴 남북협상 회의에 참석하는 이들 편에 <조선말 큰 사전> 첫째권을 보내자'고 제안했고,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이를 결의했다. 이날의 결의는 우리 민족이 함께 이루어낸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낼 성과를 남북이 공유해야 함을 확인하는 것이었고, 같은 말, 같은 글자, 같은 사전을 사용하는 민족이 두 국가로 갈라질 수 없음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남과 북에는 단독정부가 들어섰고, 북에서는 1948년 10월 <조선말사전> 편찬사업이 시작되었다. 남에서는 <조선말 큰 사전>을 수정·보완·출판하는 일을 계속해 1957년 30여 년의 대장정을 끝냈지만, '조선어학회 지은 <조선말 큰 사전>'은 '한글학회 지은 <큰 사전>'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 뒤 북에선 <조선말사전> 첫째권이 발간되었다. 일제강점기를 함께 견디며 만들어온 사전이 한국의 국어사전과 조선의 국어사전으로 갈려 나온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온전한 우리말사전'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도 언급되지 않았고, 같은 말을 한 사전에 담아보자는 시도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반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2005년 우리는 한국어와 조선어라는 이름으로는 함의할 수 없는 우리말을 모아보자는 결의를 비로소 목도할 수 있었다. 겨레말큰사전편찬위원회가 결성된 것이다.
▲ 지난 2007년 6월 서울 공덕동 지방재정회관에서 열렸던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개소식. 왼쪽부터 이재정 통일부장관, 고은 이사장, 박용길 장로, 백낙청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이해동 목사. ⓒ뉴시스

<겨레말큰사전>이라는 '사건'

편찬위원회가 그리는 겨레말은 남북의 우리말과 해외동포의 우리말, 분단 이전과 이후의 우리말을 아우른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남과 북의 어휘를 합하는 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말의 지평을 넓히는 장대한 계획이었다. 그동안 사전에 포함하지 못했던 10만 어휘를 새로 발굴한다는 목표는 우리말의 외연을 새롭게 인식시킬 수 있는 일이다. 고은 시인은 "독일은 분단 상황에서도 동서독이 힘을 합쳐 <괴테사전>을 만들었고 중국과 대만은 <양안사전(兩岸辭典)>을 만들어 말의 길을 열어가면서 통일의 순간을 기다렸다"는 말로 <겨레말큰사전>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겨레말큰사전>은 근대 어문개혁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줄기차게 추진해온 우리말사전 만들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업이기도 하다. 분단 극복을 위한 것이기에 앞서 명실상부한 우리말사전을 갖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그 역사적 의미가 <괴테사전>과 <양안사전>보다 깊고도 넓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회에서 의결된 편찬사업비(총지원비 30억 원 중 15억 원)를 지급할 수 없다는 정부의 행태와 사전만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노시인의 절박한 호소를 경제규모 세계 15위 대한민국에서 접해야 하는 사실이 당황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편찬위원회는 20여차례 남북간 협의를 해오면서 사전 편찬의 원칙뿐 아니라 그 세부 내용까지 하나하나 조정해왔다. 그리고 편찬위원들은 지금껏 시도해보지 않았던 일, 남북의 규범을 조정하는 일을 했다. 그 조정 결과가 남북의 언어생활에 당장 적용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편찬위원들은 통일국가의 규범 틀을 제시한다는 마음으로 이 일에 임했을 것이다. 그러니 편찬위원회의 활동은 통일의 시대에 겪어야 할 갈등과 조정과 화해의 과정을 미리 보여준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사전 편찬의 민족사적 의미 외면하는 당국

2007년 4월 초당적 합의로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 편찬사업법'이 만들어진 데에서 우리는 '사전 편찬이야말로 남북관계의 굴곡과 상관없이 통일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적절한 사업'이라는 국민적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올해는 남북관계 등을 고려해서 남북이 함께하는 사업 관련 예산은 줄이고 남쪽 내부적으로 하는 사업 예산은 편성하는 쪽으로 결정한 것"이라는 통일부의 해명에 가슴 답답한 것은 이 사업의 의미를 북한 지원의 틀로 보는 협애함 때문일 것이다.

편찬위원회에서는 남북 국어사전의 성과를 발전적으로 수용한다는 목표 아래 남북 국어사전의 내용을 통합하여 기술해왔다. 그 일이 사전을 기계적으로 합치는 게 아니라면, 이는 사전의 수준을 한단계 높이는 시도가 될 것이다. 분단 이후 발생한 어휘의 의미변화를 포착해 기술하는 일이 사전 기술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그러니 남북 언중의 뇌리에 각인된 의미를 남북의 사전편찬자들이 함께 검토하고 이를 새롭게 기술하는 일은 우리말 어휘에 묻어 있는 세월의 흔적을 확인하고 어휘에 실린 서로의 생각을 섬세하게 들춰내 공유하는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겨레말큰사전>이 통일시대를 살 우리들의 의사소통을 품격있게 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에게 폭넓은 우리말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이 정교해질수록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사전편찬자가 필요한 법, 뜻을 간파하여 기술하는 감각을 익힌 사전편찬자들이 사전의 시작과 끝을 책임질 때 <겨레말큰사전>은 우리말사전 편찬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사전으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업비가 축소되며 그들이 흩어진다는 말이 안타까운 이유이다.

우리말사전은 역사의 고비마다 시대적 사명을 받아 안고 편찬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라는 사명을, 해방 이후엔 국어를 정립하라는 사명을 받았고,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사전의 체재와 내용은 발전을 거듭해왔다. 이제 통일시대를 앞두고 역사는 우리말사전에 다시 사명을 부여했다. 명실상부한 우리말사전으로 거듭날 것을. 그러니 사명을 수행하여 우리말 문화를 새롭게 세우는 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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