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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영웅' 박지성의 은퇴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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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영웅' 박지성의 은퇴를 보며 [프레시안 스포츠] 이치로와 박지성의 공통점
지난 2004년 이치로가 메이저리그의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다. 아사히 신문은 이치로가 왜 일본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지 해설을 내놨다.

"일본 언론은 이치로보다 나중에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마쓰이 히데키에게 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마쓰이는 고교시절부터 주목 받는 인기선수였으며 드래프트 1위로 요미우리에 입단했기 때문이다.

반면 이치로는 오릭스라는 인기 없는 구단에 입단했고, 변칙 폼 때문에 구단 수뇌부로부터 미움까지 받았다. 한 쪽은 문자 그대로 엘리트이며 다른 한 쪽은 밑바닥부터 착실히 성공했다는 느낌이다. 이게 다수의 샐러리맨으로 이뤄진 (일본의) 서민계층이 이치로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연합뉴스

명지대 테니스부로 입학한 박지성

일본 사회가 이치로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한국이 박지성에 감동하는 이유와 엇비슷하다. 박지성은 고교시절 무명 선수였다. 어느 대학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K리그도 그를 외면했다. 프로팀 연습생 테스트에 참가했지만 너무 호리호리한 그의 별 볼일 없는 체격조건 때문에 선택 받지 못했다.

그를 살린 건 명지대 김희태 감독. 김 감독은 축구부 인원이 다 차서 박지성을 마침 자리가 남아 있는 테니스부로 받아 들여야 했다. 간신히 축구를 계속하게 된 박지성은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던 허정무 감독에게 픽업됐다. 이후 그의 인생을 바꾼 2002년 월드컵에 참가할 수 있었고, 한국의 16강행을 결정짓는 골을 성공시켰다.

팀을 위한 희생, 그를 무시했던 유럽 팬들도 감동시킨 원동력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으로 떠난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때만 해도 박지성은 이천수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히딩크 감독은 왜 박지성을 네덜란드로 데려갔을까? 그의 성실성 때문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에게 '지금처럼만 성장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하지만 박지성에게 에인트호벤 홈구장은 지옥이었다. 홈 팬들은 유럽무대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던 박지성을 향해 야유를 퍼붓고, 심지어 맥주를 담는 종이컵도 던졌다. 히딩크 감독도 이를 알고, 박지성을 홈 경기가 아닌 원정경기에만 기용해야 했다.(박지성, <더 큰 나를 위해 나를 버리다>(중앙Books))

에인트호벤 팬들이 박지성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은 그의 희생적 플레이 때문이었다. 공격 포인트로는 기록되지 않는 그의 부지런한 움직임이 결국 팀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이탈리아의 강호 AC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경기에서 환상적인 골을 폭발시켰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명장 알렉스 퍼거슨은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본 건 사실 골 자체가 아니었다. 퍼거슨은 골을 만들기까지 그가 보여 준 재빠른 움직임에 반했다. 사실 그가 남아공 월드컵 그리스 경기에서 넣은 골도 민첩하면서도 영리한 그의 이런 움직임에서 나왔다.

박지성은 최고의 클럽 맨유에서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맨유 팬들은 박지성을 '마케팅용'으로 영입했다고 투덜댔다. 국내에서도 주전과 벤치멤버 사이를 오가 던 그에게 '골 욕심'을 내야 한다고 압박했다.

박지성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 메시와 같은 환상적인 드리블 돌파나 차범근의 스피드, 혹은 골 결정력이 있었다면 그는 금새 맨유의 영웅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지성은 그런 스타일의 선수가 아니었고, 맨유도 그에게 그걸 바란 게 아니었다. 맨유는 팀이 끊임없이 경기를 지배하기 위해 '두 개의 심장' 박지성의 부지런함이 필요했고, 그는 이 주문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박지성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이름없는 영웅(Unsung hero)'이라는 별명은 이렇게 완성됐다.

한국 축구 전설 차범근도 경험 못한 박지성의 '이중생활'

한국 축구는 차범근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는 1970년대에 이미 한국 축구의 아이콘이었고,축구의 본고장 유럽에 최초로 이름을 남긴 한국 선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지성과 같이 클럽팀과 대표팀을 오가는 고달픈 '이중생활'은 거의 하지 않았다.

사실 한국 축구는 1982년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서독 분데스리가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차범근을 데려오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차범근의 소속구단 프랑크푸르트와의 사전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꿈을 이루지 못했다. 유럽을 호령하던 차범근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직전에야 찬반 논란 속에 가까스로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반면 박지성은 맨유에서 뛰면서 자주 한국과 영국을 드나들어야 했다.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있었던 2009년에는 11번이나 대표팀 경기에 차출됐다. 2003년과 2007년 두 차례나 큰 무릎 수술을 받았던 박지성에게 분명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2007년 대표팀 경기를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가 치른 블랙번 경기에서 무릎을 다쳐 수술을 받았다.

박지성은 1월 31일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도 "부상이 없었으면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지성은 지난 아시안컵 대회에서 이란, 일본과의 연속되는 연장접전을 치르면서 무릎에 무리가 와 3,4위 전에 결장했다. 그래서 "박지성 같은 스타는 A매치에 경기 중요도에 따라 선별적으로 불렀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뒤늦은 후회까지 나왔다.

차두리는 대표팀 은퇴를 앞둔 박지성에게 보낸 공개 편지에서 박지성표 축구를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너(박지성)는 분명 가장 빠르지도 않아. 그렇다고 가장 큰 것도 아니야. 힘이 가장 센 것도 아니고. 하지만 너는 최고야." 이제 한국 축구에서 '캡틴 박'은 추억이 됐지만 그는 축구에서 평범한 선수가 골 없이도 최고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누구나 '지성(至誠)'을 다하면 결국 그의 이름처럼 '지혜로운 별(智星)'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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