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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 주도한 '스폰서 올림픽'의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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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 주도한 '스폰서 올림픽'의 재앙 [프레시안 스포츠] 일본의 감추고 싶은 역사를 보면…
평창이 2018년 동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한국은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대회를 모두 개최하는 속칭 '스포츠 그랜드슬램' 달성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세계에서 여섯 번 째지만 그 기간만 따지면 세계 최고다. 한국은 30년이란 짧은 기간에 이 모든 대회를 석권했다. 일본보다 빠른 초고속 그랜드슬램이다.

하지만 한국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위업에는 그 화려한 빛만큼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한다. 나가노 동계 올림픽 유치 이후 국제 스포츠 외교무대에서 힘을 잃은 일본의 경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올림픽 박물관 건립기금 대가로 따낸 나가노 올림픽

일본 스포츠 역사에서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치욕적인 대회다. 메달 순위 14위에 그쳐서다. 4위를 차지한 한국이 자극제가 됐다. 일본 스포츠는 큰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듬 해 일본 체육협회로부터 일본 올림픽위원회를 분리했다. 이 변화의 핵심적 이유는 기업들로부터 확실하게 후원을 받아서 떨어진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오른 사람은 스스미 요시아키. 그는 프린스 호텔체인과 프로야구단 세이부 라이온즈를 거느리고 있는 세이부 그룹의 총수였다. 특히 부동산 개발로 돈을 버는 수완이 뛰어난 그는 한 때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로부터 세계 최고 부자로 뽑히기도 한 인물이다.

일본 스키연맹 회장이기도 했던 그의 목표는 동계 올림픽을 일본에서 1972년 삿포로에 이어 한 번 더 유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1991년 동계 올림픽 선정을 앞두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거부할 수 없는 미끼를 던졌다. 굴지의 일본 기업들이 올림픽 박물관 건립기금을 내놓겠다는 제안이었다. 박물관 건립은 당시 IOC 위원장이었던 사마란치의 꿈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올림픽 유치를 위해 나가노에 호의적인 40여 명의 IOC 위원에게 1인 당 1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접대비를 썼다.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면 외국 선수들의 여비를 다 지불하겠다고까지 공약을 했다. 물론 그가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이 돈을 쓸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회사가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 필요한 경기장 일부를 지었고 그의 리조트도 올림픽 특수를 누렸다.

▲ 6일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강원도 평창이 선정됐음을 알리는 자크 로케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AP=연합뉴스

나가노 이후 실패만 거듭한 일본

그런데 일본에서의 세 번째 올림픽은 재앙이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불경기로 나가노 경제가 침체되자 '빚잔치'가 시작됐다. 또 다른 재앙은 스포츠 외교무대에서 일어났다. 1999년 터진 솔트 레이크 스캔들이 불을 질렀다. 무려 24명의 IOC 위원들이 동계 올림픽 유치를 대가로 솔트 레이크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았다는 충격적 사실이 공개되면서 나가노에 대한 시선도 곱지 못했다. 재벌의 로비로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던 일본에 대한 반감은 IOC 내부에서 급속히 확산됐다. '이제 일본은 할 만큼 했으니 너무 나서지 말라'는 암묵적인 신호이기도 했다.

일본은 지난 1996년 한국과의 2002 월드컵 공동개최안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 들였다. 아주 일찍부터 치밀하게 준비했고 승리를 자신했던 일본에 공동개최는 사실상 유치 실패였기 때문이다. 월드컵 개최가 확정되는 순간 정몽준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이 환하게 미소를 보인 것과 달리 석고상처럼 굳어 있던 일본 대표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 줬다.

2001년에도 오사카는 고배를 마셨다. 상대는 중국 최초의 올림픽을 꿈꾸던 베이징. 오사카는 1차 투표에서 떨어졌고, 베이징은 2008년 올림픽의 주인공이 됐다.

일본은 오사카의 실패를 교훈 삼아 2009년 '간판도시' 도쿄를 2016년 올림픽 후보지로 내세웠지만 2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이미 1964년에 올림픽을 개최했던 도쿄와 달리 최종 투표까지 갔던 리우 데 자네이루와 마드리드는 모두 첫 올림픽 도전이었다.

다시 도쿄가 2020년 올림픽에 도전한다고 해도 승산은 적다. 우선 옆 나라인 한국의 평창에서 2018년 동계 올림픽을 한다는 점이 부담스럽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일본은 탐욕스러운 유치 후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특정 기업체를 위해 올림픽 하려는 게 아니다"

이번 평창 올림픽 유치 성공에는 재계의 역할이 컸다. 이건희 IOC 위원(삼성전자 회장), 조양호 유치위원장(한진그룹 회장)과 박용성 대한체육회 회장(두산 중공업 회장)은 다른 국가 IOC 위원들을 대상으로 열성적인 유치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맨주먹으로 바덴바덴 기적을 일군 정주영 회장의 저돌적 방식에다 국제적 감각과 세련미를 가미시켰다. 조양호 위원장이 프리젠테이션에서 좌중을 웃긴 한 마디가 이를 단적으로 반영한다. "뮌헨과 안시의 행운을 빈다. 다만 너무 (표를) 많이 주지는 말아달라."

하지만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삼성전자는 세계조정연맹과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했지만 불필요한 오해를 샀다. 연맹 회장인 데니스 오스왈드가 투표권을 가진 스위스 IOC 위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스왈드 위원은 일찌감치 투표 불참을 선언했다. 영국의 IOC 위원인 앤 공주의 딸 자라 필립스가 2012년 런던 올림픽 공식후원사인 삼성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도 문제가 됐다.

대한항공도 국제빙상연맹과 스폰서십 계약을 하려고 했다. 빙상은 동계 올림픽의 핵심종목이기도 했지만 연맹 회장인 친콴타도 IOC 위원이라 '매표행위'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스폰서십 체결은 올림픽 후보지 선정 투표 이후로 미뤄야 했다.

이런 이유로 안시의 유치위원장은 개최지 선정 투표 전 "우리는 기업체나 국가에 트로피를 주기 위해 올림픽을 유치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평창의 유치활동을 비꼬았다. 물론 이는 평창의 경쟁자였던 안시의 흑색선전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흘려버릴 수 있는 말도 아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평창 유치를 위해 탈세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이건희 위원을 특별사면 했고, 그가 IOC의 '톱 스폰서'인 삼성전자의 회장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한국이 또 '스폰서 논란' 일으키면…

한국인 특유의 끈기와 인내를 평창의 세 번째 도전과 연결시킨 프리젠테이션 전략은 적중했다. 그런데 '끈기와 인내'라는 두 단어는 이제부터 한국 스포츠 외교가 깊게 새겨야 할 말이 됐다. 국제적 스포츠 이벤트를 또 개최하기 위해 상당 기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성급한 도전은 실패를 부른다. 2002년 월드컵 기억이 채 가시지 않았던 지난 해 너무 빨리 월드컵에 노크했다가 실패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지금 같아서는 아닐 것 같지만 올림픽이나 월드컵 개최의 꿈은 또 싹트기 마련이다. 실제로 평창이 이번에도 실패했다면 부산이 하계 올림픽에 출사표를 던질 예정이었다.

언젠가 또 올림픽에 도전할 때는 뭐가 달라져야 할까? 아마도 재벌 일변도의 올림픽 유치에서 벗어나는 게 필요하다. 올림픽 유치를 하려는 모든 국가는 기업의 후원을 받지만 한국처럼 복수의 기업인이 유치전의 주연배우로 나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른 나라 기업가들은 대부분 무대 뒤에서 힘을 보탠다. 평창과 경쟁한 뮌헨의 대표적 후원기업인 BMW도 엄청난 돈을 썼고 올림픽 유치를 위한 전략적 아이디어도 제공했지만 결코 무대에 오르지는 않았다.

IOC는 올림픽의 '돈줄' 역할을 하는 기업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기업이 올림픽 유치전의 주인공이 되는 건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돈으로 올림픽을 사고 판다'는 비난 때문이다. 특히 IOC 윤리규정이 대폭 강화된 솔트 레이크 스캔들 이후에는 더 그렇다.

1980년대부터 대다수 스포츠 협회의 회장을 도맡아 가며 스포츠에 전폭적 투자를 해 온 재벌이 없었다면 한국의 스포츠 그랜드슬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1981년 바덴바덴 때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 풀 가동한 한국식 스포츠 외교 모델은 이제 달라져야 한다. 향후에도 이번처럼 기업이 전면에 나서 '스폰서 논란'을 일으키면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휩쓴 한국에 대한 국제적 견제 심리까지 생각하면 더 우려되는 대목이다.

나가노 올림픽 이후 일본이 국제 스포츠계의 '동방필패(東方必敗)'로 전락한 사실은 우리에겐 반면교사다. 스스미 회장의 통 큰 로비는 IOC가 감추고 싶은 역사가 됐고, 일본은 아직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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