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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으로 치닫는 한ㆍ중ㆍ일, '국기'를 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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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으로 치닫는 한ㆍ중ㆍ일, '국기'를 내려라 [이수훈 칼럼] 정치인이 흔들고 언론이 춤춰도 국민은 냉정해야
2012년 여름 동아시아 지역에 또 한번 국기들이 휘날린다. 런던올림픽 경기장에서 휘날리는 국기야 피땀에 대한 보답이자 자긍심의 상징이라 탓할 일이 아니다. 국기를 들고 응원을 하고 선수들이 감격에 겨워 국기를 휘감고 이런 저런 '세리모니'를 한다.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금메달을 딴 선수가 2등 혹은 3등을 한 선수에게 따뜻한 동료애와 위로를 표시해야 마땅하듯이, 자국의 국기가 게양대 한 복판에서 드높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마냥 감격해하고 애국심을 다지는 것은 1등 국민이 보일 마음자세가 못된다. 그런 마음자세는 금메달을 따지 못하는 수많은 다른 국가들에 대한 망각과 무시로 이어질 수 있다. 금방 다른 국가들의 시샘과 미움을 유발할 수도 있다.

동메달을 놓고 벌어진 축구 한일전은 하나의 스포츠 게임이기도 했지만 이 모든 요소들이 총결합된 일전이었다. 승리에 감격한 우리 선수가 '독도 세리머니'를 펼쳤다. 그 선수의 세리머니에도 국기가 등장한다. 이 경기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이 태극기가 선명하게 도색된 독도를 방문한다. "우리 땅"에 대통령이 가는 데 무슨 문제가 되냐는 투의 기세등등한 방문이었다.

일본이 왈칵 뒤집혔다. 얼마전까지 한일군사협력협정을 체결하고자 할 만큼 긴밀했던 한일관계가 일순 날아가버렸다. 일본은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져가기로 했다. 정치인들은 이런 분위기를 틈타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온갖 선동적인 언행을 남발하고 사회적 환경을 거칠게 만든다. 일본과 한국을 가리지 않고 국민들이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너무나 안타깝다.

그릇된 과거를 반성하고 동아시아 공동의 미래를 다짐해야할 2012년 '8.15' 전후에 폭발지경이 연출되는 지점은 한일관계만이 아니다. 동아시아 역내 바다들에 격랑이 인다. 홍콩 시위대가 센카쿠(尖閣, 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를 기습 점령하였다. 두말 할 것 없이 중국 국기를 꽂는다. 마치 사생결단의 전투 끝에 고지를 점령한 군인이 깃발을 꽂듯이. 중일관계가 악화되고 중국에서는 연일 중국 보통 국민들의 반일 시위가 열리고 있다.

▲ 19일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반일 시위 장면. ⓒAP=연합뉴스

중국이 관련된 해양영유권 분쟁은 동중국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중국해상에서도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여러 동남아국가들과 분쟁이 전개되고 있다. 중국이 일본이나 동남아국가들과 벌이는 영토분쟁에는 미국이 은근하게 개입되어 있기도 하다. 갈등의 성격이 복잡한 것이다.

마침 한반도에서는 8월 20일부터 '을지프리덤가디언'이라는 명칭의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과 일본은 문제의 센카쿠 열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괌 인근 해역에서 섬 상륙 훈련을 하고 있다.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에 대해서는 19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 1위원장이 서해상에서 반대 시위를 한 바가 있다. 미일 합동 훈련에 대해서는 중국이 관영 언론을 동원해 "댜오위다오를 겨낭한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군사훈련이 주최측으로서는 안보나 방어의 논리로 정당화되지만, 명시적 대상이 있거나 암묵적 상대가 있기 마련이어서 필시 반작용을 야기한다. 특히 모두가 예민해져 있고 긴장의 수위가 잔뜩 올라가 있는 정세속에서 실시되는 군사훈련은 도발확률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전쟁으로 가보자는 귀결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면 역사적으로 무력주의로 문제가 해결된 사례가 없다. 분쟁이 있고 갈등이 있으면 외교가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다.

여러 분석가들이 지적한 바대로 지금 한국은 주요국들과 최악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남북관계, 한중관계, 한일관계가 그렇고, 한미관계도 보기에 따라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동아시아 주변 환경마저 '신냉전'적이라고들 한다. 이런 정세와 안보환경이 한국의 안보나 국익에 위배된다는 것은 이미 고전적인 명제라서 중언부언이 필요없다. 우리는 남북관계를 비롯,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순탄하고도 협력적으로 가져갈 때 국민의 안위와 국익의 기반이 마련된다. 지금은 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관계들과 포괄적 환경이 만들어져 있다.

'신냉전'을 넘어 작금의 동아시아 정세는 19세기말에 비견될 정도로 악질이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영토주의가 결부된 '국기주의'가 횡행한다. 동북아 주요 국가들이 맞이하고 있는 권력교체기와 맞물려 정치인들이 '국기주의'에 편승하여 한층 부추긴다. 이해관계가 같다고 판단하는 언론이 부추긴다. 냉정해야 할 국민들이 이 대열에 같이 선다. 나만 있고 상대방은 없어진다. 수많은 사람들과 시민사회가 나서 오랜 기간에 걸쳐 천신만고 끝에 쌓은 연대의 정신이나 공동체 같은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이제 동아시아 연대나 공동체를 말하는 정치인도 없고 전문가도 찾기 힘들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들,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 전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지도자들의 언행이 잘못되고 있다. 그 결과 협력의 기반이 야금야금 유실되고 있다. 협동보다는 경쟁, 통합보다는 분열, 평화보다는 대결, 외교보다는 무력주의, 공동번영보다는 각자도생, 이런 분위기가 급속히 조성되고 있다. 이 길은 결단코 막아야 할뿐더러 정반대로 되돌려야 한다. 19세기말이 아니라 21세기 고등한 동아시아 문명의 길을 찾아야 한다.

남 탓할 이유가 없다. 우리 국익이 크게 손상되기 때문에 우리가 나서야할 근거도 막대하다. 한국이 잘 하면 여러 양자관계를 개선할 수 있고, 그것들이 어울리면 동아시아 역내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다. 올림픽에서 5등을 할 정도의 국가와 국민이 아닌가?

제일 우선되어야 할 것은 남북관계의 변화다. MB정부로부터 이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내년까지 무작정 손을 놓고 기다리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집권여당 대통령 후보에게 사실상 상당한 권력이 몰리니까 박근혜 후보가 나서서 변화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MB정부에게 최소한의 청소를 하라고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게 없다면 박근혜후보가 제시한 바 있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신뢰'를 보낼 근거가 약해진다.

적절한 환경이 조성되면 북한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황은 근래 들어 부쩍 풍부해지고 있다. 이는 남한의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무척 기대해왔던 점이기에 우리가 선제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지원할 태세를 갖추어야 마땅하다. 금강산 관광 재개는 정부가 약간의 유연성을 발휘한다면 당장 가을부터라도 가능한 일이다. '천안함 사태'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종의 선결조건이라면 국회 차원에서 다루어봄직하다.

아무 전략도 없는 이웃 나라 때리기를 중단해야 한다. 일본이든 중국이든 마찬가지다. 한일관계와 한중관계가 악화되어서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은 털끝만큼도 없다. 한중일 3국은 일종의 운명공동체다. 동아시아 공동의 미래를 만듦에 있어서 3국이 협력하지 않으면 하나도 될 일이 없다. 2008년 이명박정부가 발 벗고 나서서 '한중일3국 정상회의'를 창설시키고, 급기야 서울에 사무국까지 존치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지금 MB대통령이 보이고 있는 언행은 그런 성취를 상쇄시킬 정도로 모순적이다.

긴 호흡으로 보면 한국에서 5년 단임제 대통령은 금새 왔다가 금새 나간다. 이런 저런 사안을 두고 갈등을 빚을 수도 있고 대립각을 세울 수도 있다. 그 결과 국가간 관계가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런 정도는 다음 대통령이 와서 고치면 된다. 그런데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은 국민의 마음이다. 정부 대 정부간 관계보다 중요한 것이 국민 대 국민의 관계다. 이웃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자극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한일관계가 되었건 한중관계가 되었건 관계의 저변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다.

그런 각도에서 시민사회가 냉정을 유지하고 성숙해야 한다. 아무리 정치인들이 흔들고 언론이 덩달아 춤을 춰도 국민들은 냉정해야 한다. 냉정을 잃고 '국기주의'의 대열에 가담하는 순간 이런 저런 불편과 손해가 오기 십상이다. 한일관계가 원만하여 일반 국민에게 대단한 이익이 돌아올 게 별로 없다. 그러나 정반대로 관계가 악화되면 평범한 국민에게 손해가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올 수 있다. 과거 역사가 웅변하듯이 지도자들이 정책실패로 국권을 상실했을 때,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위안부로, 탄광의 광부로 파탄을 겪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힘없는 일반 백성이었다.

동아시아 도처에 휘날리는 깃발을 내려야 한다. '국기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무력대결주의에 안주해서도 안된다. 대신 공동체주의 깃발을 다시 올려야 한다. 동아시아가 되었건 동북아가 되었건 공동체 담론을 새롭게 가동해야 한다. 대결 노선을 폐기하고 평화와 대화 노선으로 교체해야 한다. 한국이 할 수 있고, 한국에게 그렇게 해야 할 가장 절박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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