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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주자의 건축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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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주자의 건축의지 신영복 고전강독<159> 제13강 강의를 마치며-13
‘중용’ 제1장의 다음 구절들은 성(性), 도(道), 교(敎)를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에도 삼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천명의 보편성 즉 리(理)의 법칙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법칙성이 다음에 나오는 중(中)입니다. 미발(未發)의 상태(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이지만 근본(根本)을 점(占)하고 있는 본체론적(本體論的)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발(發)하여 중절(中節)을 이룰 때 그것을 화(和)라고 하는 것입니다(發而皆中節 謂之和).

성(性)과 도(道)가 중(中)의 개념이며 교(敎)는 절도에 맞게 노력하는 화(和)를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사회적 질서 즉 예악형정에 어긋나지 않고 절도가 맞는 경우를 화(和)라는 것이지요.

화(和)가 비록 봉건적 질서와 합치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주자는 확실하게 사회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용(庸)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용(庸)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 즉 봉건제도와 유교도덕에 의하여 규범화된 일상(日常)을 의미합니다. 일상적 용(用)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중용지도(中庸之道)’가 세계의 근본이며 세계의 보편적 ‘도리’(道理)라는 것은 유가의 도덕적 규범을 ‘理’(天理)로 선언하여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객관적 원리로 규정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중(中)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며 화(和)는 천하의 달도(達道)가 되는 것입니다(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나는 여기서 ‘천하’(天下)라는 어휘에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자가 ‘중용’에서 강조하려고 한 것이 ‘천지’(天地)라는 자연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천하’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천하(天下)는 사회적 개념입니다. 주자의 학문적 동기가 사회질서를 다시 새우려는 건축의지에 있었다고 했습니다만 우리는 주자의 그러한 입장을 ‘중용’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자의 정신세계는 철저하리만큼 사회적 모티브가 중심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철학이 중화주의를 자처하던 중국에 문화적 충격으로 나타난 것도 부정할 수 없으며 중국의 사상사에서 결과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심화하는 계기를 준 것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당면의 사회적 과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이 주자의 체계입니다. 그것을 철학적 범주의 확대로 해석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에 더하여 그 자체로서 관념론적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송대 신유학은 노불(老佛)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해이해진 사회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당대의 지적 실천과정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 7백년동안 중국사회는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사회적 모델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확립된 패러다임에 의하여 재건된 중국사회는 명대(明代) 276년, 청대(淸代) 267년 동안 중국 사회를 관통하는 '초안정(超安定)시스템’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서구 근대사회에 의하여 그것이 다시 한번 도전 받을 때까지 주자가 세운 도통(道統)이 사회원리로서 굳건히 그 지위를 이어갔던 것이지요. 중국의 유학사상은 이처럼 송대의 새로운 재편과 중흥을 거쳐 대단히 안정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바로 그 견고하고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대응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견고한 구조는 변화에 대한 무지(無知)와 지체(遲滯)로 이어지고 당연히 19세기말의 근대질서의 도전을 맞아 힘겨운 대응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송대 신유학에 대하여 물론 많은 이론(異論)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로 북방 이적(夷狄)과의 싸움에서 계속하여 실패하는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시선이 내부를 향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송대 신유학의 계기를 찾아보려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종의 자기반성이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점은 오히려 불교적 성찰과 상통하는 것으로 그런 점에서 불교의 영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당나라 이후 과거제도가 정착되고 관료제도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중국의 전통적 정치이상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자신감이 유학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상적 기조를 학문적으로 대성시킨 사람이 바로 주자(朱子)였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신유학은 13세기까지 중국이 경험하였던 정치사회적 성취와 지적유산(知的遺産)이 학문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발전의 일반적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단히 성공적인 것으로서 서구근대사상에 의하여 치명적인 충격을 받을 때까지 중국사상과 중국사회 구조의 견고한 토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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