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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묶는 그물을 찢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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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묶는 그물을 찢어라” 신영복 고전강독<161> 제13강 강의를 마치며-15
8조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통일적으로 설명합니다. “격(格)이란 바로 잡는 것이며 물(物)이란 일(事)이다(格者正也 物者事也)”라고 새롭게 해석합니다. 물(物)의 시비(是非)를 바로 잡는 것은 양지(良知)이고 지식을 넓히는 것은 물(物)을 바로 잡는 데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物)이란 예를 들어 그 뜻이 어버이를 섬기는 데 있다면 ‘어버이 섬기는 일’이 물(物)이라는 것이지요. 이 경우 물(物)의 의미는 오히려 ‘affairs’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8조목 역시 ‘치양지(致良知)’로 귀일(歸一)됩니다. 격물(格物)이 단지 사물(事物)과의 관계(關係)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솥에 쌀을 넣지 않고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이 허황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결과적으로 양명학(陽明學)에서는 ‘格物致知正心誠意修齊治平’이 치양지(致良知) 즉 심(心)으로 통일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세운 다음(先立其乎大者) ‘성(誠)’과 ‘경(敬)’으로 보존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논리입니다. 양명(陽明)은 말합니다. “너를 묶는 그물을 찢어라(決破羅網), 공자(孔子), 육경(六經)도 존숭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물론 심학(心學)은 글자 그대로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심론(心論)에서 긍정적으로 읽어야 할 부분은 바로 ‘주체적(主體的) 실천(實踐)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인식이 실천의 결과물이라면, 그리고 그 실천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목적의식적 행위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신유학에 대한 심학(心學)의 문제제기는 매우 정당한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양명학의 심(心)이 선종불교의 심(心)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강화학파가 무엇보다도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였다는 것에서도 바로 심(心)에 대한 양명학적 의미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신유학과 양명학의 이론적 지양(止揚)과정에서 또 한가지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미시적 관점보다는 거시적 관점을 견지하는 일입니다. 성즉리(性卽理)와 심즉리(心卽理)의 논리적 구조를 천착해 들어가기보다는 신유학과 신유학에 대한 심학의 문제제기라는 일련의 논쟁적 과정을 통하여 사상사(思想史)의 전개과정을 읽는 일이지요.

그것은 사상의 일생(一生)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상의 생성(生成)-발전(發展)-변화(變化) 그리고 소멸(消滅)의 과정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상사의 전개과정에서 사회변화(社會變化)를 읽어내는 일입니다. 사상은 사회변화를 이끌어내고, 다시 사회적 변화를 정착시키고 제도화하는 사상고유의 전개과정을 확인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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