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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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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넘어'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25> '시간으로부터의 망명'
팔레스타인 안과 밖의 변화를 제일 먼저 감지하는 것은 내 작은 시계이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손목에서 시계는 매초 째깍거리며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을 순간을 카운트다운 한다. 비행기 바퀴가 닿는 순간 나는 시간을 팔레스타인 현지 시각으로 맞추고, 시계는 더할 나위 없이 친숙하게 그 시간을 따라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내가 팔레스타인에서 나오자마자 시계는 비행기 바퀴가 외지에 닿음으로써 끝나고 마는 팔레스타인 현지 시각과 분리되기 싫어 마지못해 맥없이 간다.

고작 시계 갖고 내가 과장되게 말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내 시계는 아주 작아서 시간을 어떻게 알아보느냐고 놀라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시계의 비밀스러운 능력을 실감할 기회가 없었다면, 나 역시 이렇게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당시에도 교과 과정은 이스라엘 검열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검열 당국은 아랍어 교과서에 여러 아랍 나라의 글들을 싣도록 허가했지만 단 하나 제외한 나라가 있으니 팔레스타인이었다. 당국은 팔레스타인 글에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을 일깨울 만한 언급이나 암시가 담겨 있을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문학은 불법적인 것으로, 또는 심지어 포르노처럼 금기로 여겨졌다. 오직 단편 한 편, '사미라 아잠'의 <시계와 인간>만이 교과서에 실렸는데, 검열 당국이 '무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 '제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서 이스라엘 점령 당국의 입국 허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타이시르 바트니지 Taysir Batniji

1963년 발표된 이 단편은 첫 직장에 처음으로 출근하게 된 젊은이의 이야기다. 출근 전 날 젊은이는 다음날 일터로 가는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새벽 네 시에 자명종이 울리도록 시계를 맞춰 놓는다. 다음날 새벽 자명종이 그치자마자,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젊은이가 문을 열어보니 일면식도 없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누구냐고 물을 새도 없이 등을 돌려 가버렸다. 젊은이는 자신이 제 시간에 일어났는지 확인하려고 회사에서 그 노인을 고용한 줄만 알았다. 그 뒤로 같은 일이 매일 반복되어, 젊은이는 아예 자명종 시계를 맞춰놓지 않았다. 몇 달 뒤에야 젊은이는 그 노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한 동료가 말해주기를 그 노인은 새벽에 출근해야만 하는 모든 이들을 깨우러 다닌다고 했다. 노인은 사람들이 늦잠 자다 기차를 놓쳐서 자기 아들 같은 운명이 되지 않도록, 어서 일어나라고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의 아들은 어느 날 새벽 기차역에 늦게 도착했고 기차는 막 출발한 참이었다. 그는 달리는 기차 문에 매달렸으나 불행히도 손이 미끄러져, 기차 바퀴에 무참히 깔려버렸다.

얼핏 보기에 이 이야기는 단순하고 '문제 없어' 보일 것이다. 특히 검열관으로 눈으로 보면. 그러나 실제로는 이 짧은 글이 내가 오늘날까지 읽은 그 어떤 글보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나의 의식을 날카롭게 벼려놓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직장에 출근하려고 기차역에 가서 기차를 타는 그런 시절이 있었단 말인가? 기차역이 있었단 말이지? 경적을 울리는 기차가 있었다고? 팔레스타인에도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그러면 그런 건 지금 다 어디로 사라졌고, 왜 사라졌을까?

이 글은 정상적이고 평범한 모든 것에 대한 깊은 동경을 내 영혼에 새겼으며, 나는 우리가 1948년 이래 내몰린 소외되고 열등한 삶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시계와 시계가 내게 보여준 새 지평, 존재의 양식이 다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내 작은 시계는 계승했다. 내 시계는 정확함이 우선인 스위스 시계가 아니라 '아잠'의 단편에 나오는 노인과 닮았다. 삶을 보다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인이 인간에서 시계로 변했듯이, 내 시계는 시계에서 인간으로 변하기로 결심했다.

팔레스타인에서 내 시계는 종종 멈춘다. 돌연 혼수상태에 빠져 시간을 알리지 못한다. 먼저 번 팔레스타인에 갔을 때, 나는 늘 그렇듯이 비행기 바퀴가 공항 활주로에 닿는 순간 시간을 현지 시각에 맞추었다. 그때가 오후 1시 50분이었다. 나는 여권에 입국 허가 도장을 받으러갔다. 여행자는 별로 많지 않았고 내가 선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나는 내 여권을 이스라엘 여자 공무원에게 건네었고 그녀는 내 여권을 샅샅이 살펴보며 시간을 질질 끌었다. 난데없이 경찰, 보안요원, 특수요원으로 보이는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나타나 나를 줄에서 끌어냈으며, 한도 끝도 없는 심문과 조사가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는 으레 온갖 일이 다 벌어진다. 내 인생의 가장 사소한 것까지 캐묻는 소모적인 심문과 소지품에 대한 철저한 검사. 나는 어떤 방에 끌려가 몸수색도 당했다. 그리고 한 여자가 내 신발과 허리띠를 엑스레이로 검사하려고 들고 가고, 다른 여자는 내 옆에 머물렀다. 그 여자는 손에 내 시계를 쥐고 있다가 그것을 골똘히, 주의를 온통 기울여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몇 분 후에 그녀는 자기 시계를 보고 다시 내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자기 시계를, 다시 내 시계를. 첫 번째 여자가 내 나머지 짐을 들고 돌아오자, 그녀는 내 시계가 이상하다고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내 시계는 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시계에 따르자면 오 분 더 지났는데, 내 시계에 따르자면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그들은 보안대장을 호출했으며 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아무 혐의 없이 풀려났으나, 시계가 멈추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해보니 저녁 9시였다. 그런데도 내 시계는 여전히 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도 내 시계는 나를 위로하려고 그 모든 조사와 지연이 단 일 분도 걸리지 않은 것처럼 굴었을 것이다.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또는 다만 내 인생에서 강탈당한 시간, 나를 모욕하고 좌절시키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그 시간 동안 가기를 거부했을 수도 있다. 고통의 시간을 뭉그러뜨리려는 책략, 일종의 시간 지체.

이렇게 가끔 팔레스타인 안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지만, 내 시계는 팔레스타인 밖에서는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일초도 늦지 않고 사실 약간 빠르다. 시간의 궤도를 놓쳐버린 그 시점에 도달하려는 것처럼, 마치 낯선 외지의 시간을 자기에게서 털어버리려는 것처럼. 일초, 일초, 팔레스타인의 시간을 따라잡으려는 것처럼.

그러므로 내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 팔레스타인 시간과 같든지 7시간 차이가 나든지 상관없이, 시계는 시간으로부터 망명했다는 의미에서 한결같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 시계는 나를 시간 너머로 던져 버린다.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기획·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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