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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건너가야 할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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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건너가야 할 삶이다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38>
오늘 날씨는 비가 올 확률이 90퍼센트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비가 조금씩 먼 구름 속에 떠서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고 내 낡은 프린트기에선 당신의 글이 조금씩 인쇄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흘러나오는 종이를 바라보며 나는 그것들을 내가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모래알들이 이쪽으로 밀려오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프린트기는 트랙터처럼 덜덜거리며 내가 가본 적 없는 작은 지구(地球)들을 종이 위에 실어 이곳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어린 시절을 보내곤 했을, 당신이 연인의 손을 잡고 휘파람을 불며 걸었을, 당신이 눈을 감고 지나가야 했던 그 골목들을 상상해봅니다. 그 보이지 않는 세목을 향해 당신의 언어는 내게 달려왔던 것입니다. 나는 바닥에 종이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히 손바닥으로 그것을 받아냅니다. 종이는 아직 따뜻하고 섬세하며 단아합니다. 새벽의 따뜻한 피가 묻은 달걀들처럼. 지금 나는 책상에 앉아 내 기후로 당신의 글을 읽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시차에 대해서 잠시 생각합니다. 당신의 글에선 마른 모래냄새가 서걱거리고 당신이 하얀 여백에 내려놓은 문장은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문장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요? 당신은 글쓰기란 마치 단어와 단어사이에 수많은 침묵이 놓일 수 있어야 한다는 듯이 글을 써내려갑니다. 나는 당신이 언어에 배치한 침묵의 오고감(五苦感)으로 인해 잠시 당황하고 아련했습니다. 어떤 새보다도 인간의 상상력은 높이 날 수 있다고 우리는 자주 말해 왔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의 나라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문장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과 나의 사이에 있는 거리이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여행입니다. 여행은 누구에게나 침묵의 연습이며 우리는 둘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리에서 자주 서성거린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이스라엘 작가 아모즈 오즈의 소설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지상의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언어들을 찾아야 한다는 듯이 자신의 나라에 새로운 언어들을 이주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언어들을 자신의 소설제목인 <블랙박스>로 불렀습니다. 추락을 겪어야만 알 수 있는 진실. 우리의 생에도 그런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눈물이 난다고 그는 써내려갔습니다. 우리의 생이 진실이라 겨우 부를 수 있었던 것들은 그런 시간의 여독을 견뎌야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곳은 내겐 아직 너무나 아득하고 가장 아득한 곳까지 나는 멀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말하는 희망인가요? 나는 우리가 이 생 위에 언어로 이름 붙이고 있는 것들은 시차들에 다름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언어들은 우리의 몸에서 내려온 작은 시차들이고 언어는 그 시차들을 견디며 스스로의 주술에서 풀려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가 언어로 희망할 수 있는 것들을 삶이라고 부르면 시시해집니다. 죄의 바깥에 삶이 있고 언어의 바깥에 우리가 도모할 수 없는 영혼이 있다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른다고 해도 우리는 어떤 경계에서도 처벌받지 않습니다. 당신이 말한 <불가능한 여행>은 그런 것이 아닌가요?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인식으로는 파악하지 못하는 공기의 실체에서 숨쉬고 있으며 그 공기를 견디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벽도 공기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은 그것을 수렴하고 우리는 부를 수 없는 언어로 그 예술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글을 보고나서 다시 한 편의 영화를 떠올립니다. 예전에 나는 친구와 함께 월세값을 털어 독립영화 한 편을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영화는 예산의 부족으로 결국 상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인형의 유령>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인형의 유령은 무엇인가요? 나는 인간은 모두 자신이 만든 하나의 시간에 다름 아니고, 그 시간의 유령들은 인간일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인형의 유령에 불과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에게 그것은 다른 곳을 건너가기 위해 반드시 견뎌야 하는 시차였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지금 당신도 자신이 견디고 있는 시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집니다. 시차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건너가야 할 삶이고 삶은 끊임없이 시차를 건너가는 여행일지 모릅니다. 나는 당신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을 우연히 어딘가에서 만난다고 해도 기억해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때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시차에 대해서 조금만 애연해지기를. 오늘은 그래도 비가 올 확률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그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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