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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는 시인들'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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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는 시인들'의 아버지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39> 나의 스승 후세인 바르구티
신은 신을 창조한다

후세인 바르구티. 그는 내게 시를 가르쳤고, 또 생존도 가르쳤다. 그를 만나기 오래 전부터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의 글과 기지 넘치는 문장과 글 속의 일화들은 '비르 젯' 대학 신입생들의 주된 토론거리였다. 1992년 마침내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 앞에서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이 내게는 완전히 새롭고 정신을 살찌우는 지식이었다. 몇 년 동안 나는 듣고 또 듣기만 했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단지 그의 말을 경청한 덕분에 내가 공부로 보낼 세월을 20년 이상 절약했다고. 그 시절 나는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유대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나는 일개 문학청년이었으며 삶의 경험도 일천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만나면 호의를 보였으며, 나를 존중하고 내가 학비를 마련할 수 있을지 걱정해주었다. 나는 그가 원래 친절한 사람이라서 그런다고만 생각했다. 어느 날 밤 나는 술집에서 실연의 아픔을 술과 망각으로 달래고 있었다. 그가 술집에 들어와 내 테이블에 앉았다. 인사를 나눈 후 나는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으니 모쪼록 솔직히 답해 달라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으며 나는 말을 이었다. 오늘 내가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니, 흥미로운 점이-나 자신조차 흥미를 느낄 만한 점이-하나도 없다. 당신은 왜 내게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는가. 그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신을 창조하는 건 신의 오랜 버릇이지."

인생은 그에게 무엇을 주었나

그 말이 내 정신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친해졌으며 인생, 시, 정치, 문화에 대한 대화도 길고 깊어졌다. 서서히 나는 그가 그 말로 의미했던 바를 깨달아갔다. 또한 서서히 나는 암에 걸린 그가 떠난 후 느낄 비통함을 미리 겪었다.

4년 동안 그는 암과 싸웠고, 나는 그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견디도록 내 정신을 단련시켰다. 마지막 이태 동안에는 나와 이른바 '아버지 없는 시인들'-후세인 바르구티 자신이 이렇게 명명한-은 그가 가르침을 마무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우리 세대 모든 시인과 작가들의 스승이었다.

아버지 없는 시인들의 아버지
▲ '팔레스타인 젊은 예술가 포럼'이 후세인 바르구티에게 헌정한 그의 초상화 ⓒ 키파 판니

전세대의 작가들은 대개 그 이전 문학적 선배들로부터 계승받은 저항의 문학을 했으나, 그는 달랐다. 그는 저항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면서도 문학의 미적 가치를 중시했다. 우리가 어떤 제재로 글을 쓰든 보편적인 인간들을 감동시키는 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그는 가르쳤다. 비르 젯 대학에서 그가 한 열 번의 강연으로부터 새로운 경향의 작가 세대가 솟아났다. 나를 포함한 그들을 비평가들은 그저 젊은 시인들이라고 불렀으나, 후세인 바르구티는 '아버지 없는 시인들'이라고 했다.

임종의 침상에서 그는 내게 말했다. "나는 평범하게 죽을 줄 알고 있었다네. 왜냐하면 살면서는 평범해보지를 못했거든. 인생은 내게 공평했어." 나는 그 말의 뒷부분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역설적으로 외쳤다. "어지간히 공평하군요." 팔레스타인 지성계를 뒤흔든 그 위대한 작가가 적절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던1) 그 때, 문화부 장관의 한 친척은 다리가 부러지자 프랑스 파리로 치료받으러 날아갔다.

그에게 내가 그런 내막을 알리지는 않았으나, 그가 나의 외침에 대해 "인생은 나로부터 가져간 것만큼 내게 주었다네"라고 답하자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인생이 당신에게 도대체 무얼 주었느냐고. 그는 말했다. "너희들 모두." 이제 나는 그의 말뜻을 안다. 그 말은 그가 우리로부터 친구로서의 애정이나 제자가 스승에게 바치는 존경심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보다 높은 차원의 형성'2)이 이루어졌음, 즉 우리들로 인하여 자신의 미적 추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리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그는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다. 그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은 미를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용하며 가장 중요한 지침이다.

로제타스톤의 태양

'로제타스톤3)의 태양'은 그가 내게 준 이름이다. 그가 어떤 이에게 "키파는 몇 년 전에 로제타스톤에 몰입하더니 영 거기서 나오지를 않는다네"하고 걱정스럽게 말했더란다. 그리고 나중에는 내게 직접 충고하기도 했다. "그만
▲ 팔레스타인 벌판의 상처 난 들꽃ⓒ키파 판니

로제타스톤을 잊게. 한 책의 영향 아래 오래 머무르는 건 위험하다네. 세상에는 읽을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네. 그 책을 찢어 버리고 전진하게." 나는 대꾸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로제타스톤을 찢을 때는 더 이상 못 해낼 일이 없을 테니까요."

'그는 예언자처럼 와서 그렇게 갔다. 다른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꿈으로부터. 그는 초월적인 힘이 보내는 하나의 암호였으나 이를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 그는 지구의 거주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러 온 듯했고, 떠날 때가 되었다고 느끼자 떠났다.'(<로제타스톤>에서)

어느 날 그는 병원 주변을 나와 함께 산책하다가 걸음을 멈추고 들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때로 나는 평생 동안 들꽃을 가슴에 품고 영원히 눈을 감기만을 바랐다는 생각이 든다네." 그는 그렇게 눈을 감았으며 자신의 마지막 작품 제목처럼, '아몬드 나무들 사이에' 누워 있다.

필자 주

1)팔레스타인 병원들은 암 같은 질병을 치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2) 후세인 바르구티의 시집 '변태(變態)'의 한 구절.
3)후세인 바르구티의 다른 시집 제목. 본래 로제타스톤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북동쪽 로제타 마을 부근에서 발견된 비문으로, 프톨레마이오스5세(BC 205-180)의 은혜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같은 구절이 이집트어(상형문자와 민용문자-이집트 상형문자 필기체)와 그리스 알파벳의 3가지 필기방식으로 씌어져 상형문자 해독의 계기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www.palbridge.org) 기획·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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