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가 한국계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우려됐던 한국인들에 대한 보복행위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이는 조승희를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라고 여기는 미국 사회의 '성숙한' 인식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와는 별개로 조승희가 8살에 미국으로 건너간 후 현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15년간 외톨이로 지내게 된 데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구조 때문이었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조승희 사건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한인 사회가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사건이 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소수민족 차별 분위기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조승희가 또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다음은 미국 사회의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 한국계 미국인인 재클린 김이 미국의 진보적 웹사이트 '커먼드림스'에 28일 기고한 글이다.( )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클린 김은 한 번의 실수로 미국 주류사회에서 '왕따'를 당했던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며 조승희의 심리를 분석했다.
그는 "조승희가 아무리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더라도 주변 상황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그같은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주변적 조건을 설명했다. <편집자>
치유의 의지
23세의 조승희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8살 때부터 미국에서 살아왔다. 버지니아 공대 졸업반인 그는 5명의 룸메이트와 함께 기숙사에서 살았지만 조승희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 룸메이트는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조승희가 의자에 앉아서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가끔 봤다"고 말했다. 한 학생은 "조승희와 같은 고등학교를 갔는데 '10달러를 주면 조승희가 말을 할까?'라는 농담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다른 룸메이트는 "별 말을 하지 않는 친구였다. 영어를 잘 못해서 그런다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고 후 있었던 언론 보도에서 조승희를 개인적으로 아는 친구라고 나섰던 학교 동료는 아무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조승희의 고립은 인종주의나 인종주의적인 일을 겪는 데 따른 심리적인 경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필자가 직접 미국에서 겪었던 고립의 경험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우리 가족이 백인 중상류층이 많이 살고 있는 디트로이트 교외의 한 지역으로 이사를 간 적이 있었다. 나와 내 자매들에게 있어 그것은 어울려야 할 학교와 친구와 계층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했고 우리 모두는 어려움을 겪었다. 새로 전학한 중학교에서 특별한 존재로 취급받으면서 나는 많은 친구들을 빨리 사귀었지만, 바로 그때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퍼졌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친구들로부터 배제됐고 그후 2년 동안 조롱의 대상이 됐다. 내 사물함의 안팎에는 증오에 찬 말이 빼곡이 써졌고 교실, 식당, 체육관 어디에도 같이 마주보거나 앉아서 이야기할 친구들이 없어졌다. 다른 세계로 날아가 버려 존재를 상실한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런 사정을 얘기하려 했으나 어머니는 내 말을 무시했다. 어머니는 일에 치여 있어서 아이들의 일상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때부터 나는 위축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거나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해 접촉을 피했다.
현실 속에 있는 인종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같은 배제의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네들은 잘못됐어. 하지만 결코 고치지는 못할 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그 때부터 나는 집에 머무르기 시작했고 학교를 두려워했다. 대신 TV에 코를 박고 살았고 앞머리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먹을 것, 특히 사탕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식당과 체육관에서 나와 함께 할 사람들을 찾았지만 이런 상황이 언제든지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조승희는 출석을 부를 때 '예'라고 답하지 않았다. 그는 출석부에 사인하면서 물음표를 써 넣었고 '물음표 소년'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F학점을 주겠다는 협박을 받자 큰 소리를 책을 읽으며 반항했고, '중국으로 가버려라'는 조롱과 모멸을 받았다. 유머와 조롱은 처음에는 듣는 이로 하여금 다른 느낌을 받도록 하지만 결국 그는 감정과 행동에서 정상이 아닌 사람이 됐다.
조승희가 13살에 쓴 '리처드 맥비프'라는 희곡에서 주인공인 존은 거의 모든 말에서 '강간당했다'는 말을 썼다. 피고인이자 존의 의붓아버지이고 귀머거리인 맥비프는 존에게 다가와 성적인 접촉을 강요했다. 마침내 존은 먹을 것으로 의붓아버지를 공격했고 그 때문에 엄청난 보복을 당했다. 존은 자신을 강간한 의붓아버지와 싸우고 저항했으며 마침내 의붓아버지를 죽이고 만다.
조승희는 방송국에 보낸 비디오에서 "당신에게는 오늘과 같은 일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천억번 있었다. 그러나 당신을 결국 피를 보고 싶어했고, 나를 궁지로 몰아붙였으며, 나는 단 한가지의 선택밖에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CNN은 조승희가 자신과의 대화를 원하지 않았던 한 소녀에게 보낸 글에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유명한 발코니 장면이 나온다고 전했다. 조승희는 누군가와의 소통을 원했지만 쌀쌀맞은 반응만 얻어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소년소녀들이 조승희와 같은 상황에 얼마나 많이 처했었을까?
나는 우리가 조승희를 외국인이었을 뿐이라고 여긴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이들과 대화의 기회를 갖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조승희가 아무리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더라도 주변에서 아무런 자극이 없었다면 분노를 그토록 크게 키웠을 리 없다. 자폐증의 가능성이 커진 것은 그의 주변인들 때문이었지만 그는 희곡을 썼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완전한 고립 속에 갈 곳 없는 이의 목소리로 울려퍼졌다.
자신에 대한 동정심이 없다고 느낀 조승희는 32명의 무고한 생명에게 어떤 동정심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최종 응징을 자기 스스로 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지금 하나의 사회로서 우리의 의도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런 상황을 치유하기 원한다면 다음과 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 내면에 있는 것들을 비춰보며 세상의 모든 행위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환경만 갖춰진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가 마지막, 그 무시무시한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우리가 그의 내면의 이야기, 그가 처했던 고립과 고통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런 고통에 빠져 있을 다른 누군가와 의식적으로, 그리고 뚜렷한 동정심을 가지고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되길 원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치유를 위한 가장 위대한 도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럴 의지가 있다면 그 시작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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