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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파독 광부의 삶과 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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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40년 파독 광부의 삶과 애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11/04] 재독 한인 글뤽아우프중앙회 성규환 회장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40년 만에 밟는 기분은 어떤 느낌일까요? 196,70년대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묵묵히 일하며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했던 파독 광산 근로자들이 40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파독 광부들의 모임인 '재독 한인 글뤽아우프중앙회' 성규환 회장을 초대해.. 모처럼 고국을 찾은 소감과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쳐야했던 지난 40년 파독광부들의 삶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재독 한인 글뤽아우프중앙회' 성규환 회장입니다. 성규환 회장은 1977년 파독 근로자로 독일 아헨으로 건너갔으며 2005년부터 파독 광산 근로자들의 모임인 '재독 한인 글뤽아우프중앙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박인규 : 이번에 파독광부 분들이 상당히 여러분 고국땅을 밟으셨는데 어떤 말씀들 하시던가요?

성규환 : 모처럼 고국에 오신 동료들은 저희들이 떠날 때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고국이 발전이 많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많이 변했습니다.

박인규 : 몇 분이나 오셨습니까?

성규환 : 136명 왔습니다.

박인규 : 파독 광부 분들이 단체로 고국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인가요?

성규환 : 처음은 아니고, 2002년 대한적십자 초청으로 한 번 있었습니다.

▲ ⓒ프레시안

박인규 :
제가 듣기로는 파독 강사 분들과 광부 분들이 같이 오신 적은 있지만 광부들만 따로 오신 건 처음이라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해서 이번 행사가 마련됐습니까?

성규환 : 파독광산적립금 약 18억원이 있었는데 정부에서 조금 보조를 하고 총 21억원 중에서 3억원을 책정받아서 고국방문을 하게 됐습니다.

박인규 : 파독광산적립금이라는 건 퇴직금 같은 겁니까?

성규환 : 퇴직금입니다.

박인규 : 처음 가신 게 1963년인가 그런 걸로 기억합니다. 그럼 연세가 많으실 것 같은데 오시고 싶은 분들은 다 오신 겁니까?

성규환 : 80이 넘은 분들도 있습니다. 다 못 왔습니다.

박인규 : 더 오셔야겠네요

성규환 : 더 오게도 해야 되지만 그래도 못 올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박인규 : 파독 광부로 가셨다가 독일에 남아 계신 분들이 몇 분이나 되십니까?

성규환 : 1200명 정도

박인규 : 이번에 지난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한국을 다니셨는데 어디어디 다니셨습니까?

성규환 : 충남 부여, 전주역사박물관, 전남의 광양제철소를 시찰했습니다. 그리고 울산 현대중공업을 산업시찰하고 마지막으로 제주도 민속박물관을 보고 구경하고 돌아왔습니다. 상당히 강행군을 하다 보니 많이들 피로를 느끼는 것 같아요.

박인규 : 여러 곳을 다니시면서 광부 분들이 어디에 가장 감탄하고 놀라시던가요?

성규환 : 한국에 와서 보면서는 광양제철소를 봤을 때 독일에도 제철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큰 제철소가 있다는 걸 봤을 때 그야 말로 흔히들 얘기하는데, 우리나라가 이래서 경제가 성장했구나, 이런 느낌들을 가지고 온 파독광부들은 역대 대통령께서 당신네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경제발전에 초석이 됐다고 말씀들을 많이 했습니다. 참 우리가 조금씩 보탠 돈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됐다는 자부심을 갖는 분들도 있고, 막상 와서 보니 광양제철소나 울산중공업... 그야 말로 어마어마하게 저희들이 생각했던 것 외로 큰 산업을 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마음속으로부터 감회를 갖고 있습니다.

박인규 : 지금 성규환 회장께서 맡으신 데가 재독한인중앙회인데 글뤽아우프인데, 글뤽아우프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성규환 : 광산에서 지하1000미터, 1300미터에서 일하고 올라오니까 아침에 만났을 때나 점심에 만났을 때나 만날 때마다 행운을 빈다는 뜻입니다

박인규 : 이게 일상사회에서도 쓰는 말입니까?

성규환 : 안 씁니다.

박인규 : 광부들끼리 서로 행운을 빈다는 뜻으로 쓰는 특수한 말이군요.

성규환 : 지하에 가서 다치는 일이 많으니까, 만났을 때 오늘 행운을 빈다는 뜻입니다.

박인규 : 언제 만들어진 단쳅니까?

성규환 : 1973년도 10월에 만들어졌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 얘기를 해보죠. 63년도부터 가셨다고 했는데 그때부터 언제까지 파독광부들이 파견됐고 총 몇 명이나 가셨습니까?

성규환 : 63년도 11월부터 77년도 10월까지 파독했는데 총 인원은 7936명입니다.

박인규 : 8천명 가까이 가셨군요. 간호사 분들도 많이 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성규환 : 네. 간호사 분들은 65년도부터 나왔습니다. 간호사 분들은 1031명이

박인규 : 제가 어떤 언론보도를 보니 간호사 분들은 정식 기능을 가진 직업인이고 광부로 가신 분들은 산업연수생이다. 광부로 가신 분들이 좀 어려웠다는 보도도 있던데요.

성규환 : 맞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광부라고 했을 때 최하, 마지막 직업으로들 생각했는데... 인생막장. 독일에 간 파독 광부 일진은 약 45%가 학부 출신입니다. 대학 졸업한. 이러면서도 우리나라 경제가 어렵고 그 당시 일자리도 없고, 마지막 직장이다. 우리나라 경제를 위하고 살기 위해서 그야 말로 힘든 각오를 갖고 광부로 가게 됐습니다.

박인규 : 한국보다 훨씬 더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으니 가자. 성회장님은 언제 가셨습니까?

성규환 : 저는 77년도에 갔습니다.

박인규 : 맨 끝에 가셨군요. 그땐 무슨 일을 하시다가 가신 거예요?

성규환 : 저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른 사업을 하면서도 그 당시에는 한국에 아무 사업이라도 안정성이 없을 때입니다. 운수사업을 하다가 실패하고 파독광부로 가면 목숨에는 위험이 있지만 우선 부모, 형제, 자식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각오를 갖고

박인규 : 한국에서 그 당시 통상적으로 받는 임금과 비교하면 얼마나 많았습니까?

성규환 : 통상적 임금에 비하면 한 5배

박인규 : 그렇다 하더라도 그때 이미 결혼도 하셨고 70년대에 머나먼 객지에 혼자 나가시는 게 힘든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성규환 : 저뿐 아니라 다들 힘든 결정을 하고 사실 갔습니다. 그러면서 고국을 떠난 마음은 더 아프고 보내는 분도 마음이 아프고 김포공항에서 그야 말로 울음의 작별을 하고 다들 떠났습니다.

박인규 : 가셔서 대개 근무연한이 3년으로 돼서 3년 동안 일하셨다던데 어떤 일을 하신 겁니까?

성규환 : 약 90%는 최막장에서

박인규 : 거기서도 3D업종인가요?

성규환 : 지하 1000미터 이하, 온도가 30도 이상입니다. 막장에 일하러 갈 때 물 5리터를 갖고 내려갑니다. 이 물을 다 마시고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오줌 한 번 안 눌 정도로 물을 다 마십니다. 지난 세월이니까 그러는데 막장에 들어가서 울기도 많이 했을 겁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우리 한국 인력들은 체질이 안 맞아서. 유럽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모든 기구니까 우리가 만지기에 힘에 너무 부쳤어요. 크고 무겁고. 그래서 하루에 장화 한 3번 정도는 물을 비워야 됩니다. 옷을 입지 않고 옷을 벗고 작업합니다.

박인규 : 7900명이 가셨는데 그 중에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분도 꽤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규환 : 광산에서 죽은 분은 18명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쳐서 몇 년 더 살다 죽은 분은 상당히 많습니다.

박인규 : 막장에서 일하시다 보면 진폐증 이런 것도 걸리신다던데

성규환 : 다는 아니지만 그런 영향을 받은 분도 많죠.

박인규 : 말하자면 그 당시 독일 사람들이 3D업종이니까 일을 안 하려고 하니까 요즘 우리나라처럼 터키나 한국에서 광부를 데려온 거 아닙니까. 그때 같이 일하시다 보면 독일사람들과의 인종차별이랄까 이런 건 못 느끼셨습니까?

▲ ⓒ프레시안

성규환 :
없다곤 할 수 없었지만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물론 언어도 잘 안 통하고 우리들이 힘이 부치니까 그 사람들이 봤을 때 힘도 없으면서 왜 일하러 왔느냐... 이런 대우는 때로 받고 일했죠.

박인규 : 원래 가실 때는 3년 근무하기로 하고 가셨는데 대개 돌아오신 분들 많습니까 남으신 분들이 많습니까?

성규환 : 돌아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한 4천몇백명은 돌아오고, 그 외 한 2천 명 정도는 제3국으로 많이 나갔습니다. 미국, 캐나다... 현재 있는 분들은 약 1200명

박인규 : 이 분들 중에 아직도 광부로 일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성규환 : 광산에 일하는 건 너무 힘들어서 나이 50에 정년퇴직을 합니다. 그래서 2004년도에 마지막 광부로 우리 한국분들은 없습니다. 그때까지 광산에서일한 분들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다른 일을 하는 분들이 많죠.

박인규 : 제가 듣기로 간호사로 가신 한국분들하고 광부로 가신 분들이 결혼하신 경우도 많다고 하던데요...

성규환 : 조금 있죠. 1200명 중에서 60% 정도는 간호원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한 40%는 한국에서 결혼했던 분들이니까 부인을 초청했죠.

박인규 : 성회장님은 부인을 초청하신 거죠? 독일에 70년대에 가신 건 경제적으로 나은 생활을 해보자 해서 가신 건데 지금까지 사셨어요. 독일에 남으신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으십니까?

성규환 : 많이 후회하죠. 경제적으로도 도움도 안 됐지만... 지금 왔을 때 보면. 돈을 벌어서 그 당시는 우리 경제가 어려웠을 때니까 다들 송금을 하고 그 후 몇 개월씩 체류하면서 체류가 안 되고 불법체류를 하면서 힘들었고. 그 후 자제분들도 있고 하니까 어려서 현상유지만 한 거지 저축이나 이런 건 없었는데. 왜 후회하느냐, 그 후 우리 대한민국은 경제가 성장하고 지금은 독일보다 우리 한국에서 받는 월급들이 더 많았다는 거죠

박인규 : 그럼 말하자면 오히려 한국에 남아서 일하는 게 경제적으로 더 유리할 수도 있었다

성규환 : 한국에 남아서 그만치 어려운 일을 했으면 더 나아질 수 있었을 거 아니냐는 분들이 많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 간호사가 광부로 가신 분들이 송금한 게 1억5천만달러 된다. 지금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 당시 귀한 외화였다고 하시던데요. 조국을 위해서는 봉사하셨지만 개인적으론...

성규환 : 없죠

박인규 : 그런데 만약 3년 근무를 끝내시고 한국으로 오실 수도 있었을 텐데 광부로 남은 건 거기서 뭔가 기회를 잡아보시기 위해서 아니었습니까?

성규환 : 기회를 잡으려고 한 게 아니라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경제는 안 좋았고 더 벌어서 한국 가자, 3년 더 벌어서 가자, 그리고 또 한 3년 더 벌어서 가자 이랬던 것이 결국 오늘까지 못 오게 된 이유입니다. 지금 한 10년 전부터 귀국 못한다. 독일에서 살아야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박인규 :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가야지, 그런 분들이 많았군요.

성규환 : 그리고 저 같은 경우는 아직도 한국 여권을 갖고 있습니다. 왜. 한국에 가서 살아야 되니까

박인규 : 성회장님도 지금도 기회가 닿는다면 고국에 돌아오고 싶으신가요?

성규환 : 그렇습니다.

박인규 : 그런데 오시기 어려운 사정이 있으신가요

성규환 : 저희들이 독일에 가서 근무한 기간이 짧기 때문에 연금이 얼마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 연금 가지고 와서 한국에서 살 수가 없어요. 물론 거기도 비싸지만 거기는 보험제도는 잘돼 있지만... 한국 와서는 보험제도가 안 돼 있으니까 저희들이 보험료 내고... 남은 우리 인생은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인데 이런 게 상당히 어렵습니다.

박인규 : 독일 남아계신 분들 상당수는 고국에 오고 싶지만 와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경제적인 뒷받침이 안 된다. 그래서 못 오시는 거군요. 지금 독일에 1200명의 광부가 계신다는데 가장 젊으신 분은 얼마나 되십니까?

성규환 : 많으면 80넘은 분들, 젊은 사람은 55세

박인규 : 거의 노년층이라고 해야 되겠네요. 고국에 오시고 싶은 분들을 모시는 게 좋을 텐데 대책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독일에 남아계신 파독 광부들이 한 1200명 되시고 연세가 55세에서 80세라고 하셨는데 그 분들이 독일에서 삶은 편안하게 보내고 계신가요?

성규환 : 편안하다기보다, 향수를 많이 느끼고 있죠. 고향... 그것이 자제분들은 독일에 있으나마, 저희들은 고국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어서 향수를 많이

박인규 : 경제적으로는 어떠십니까?

성규환 : 지금 간호사와 결혼한 분들은 그나마 경제적으로 조금 낫습니다. 그러나 70년대에 가신 분들은 고국에서 결혼을 하고 갔고 부인을 초청해서 갔고, 또 자녀분을 초청했기 때문에. 그래서 간호사하고 가지 않고 고국에서 초청해서 간 77년도 중반에 간 광부들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박인규 : 그렇게 따지면 성회장님도 상당히 어려운 편에 속하시는 거네요

성규환 : 왜 어려웠나 하면 혼자 벌어서 가족을 이끌어가야 되니까. 그리고 부인을 초청했기 때문에 우선 5년 동안은 노동허가가 나오지 않으니까 일 못하고. 또 그때 갔으니까 일하는 연도수가 작아서

박인규 : 성회장님은 77년도에 독일에 광부로 가셨는데 그럼 모든 가족이 다시 독일에 뭉치기까지는 얼마나 걸리셨습니까?

성규환 : 저는 12년 만에 뭉쳤습니다

박인규 : 그럼 고생 많이 한 거네요. 그런 파독 광부들을 위해서 예를 들면 고향 정착을 위해서라든가 독일에서의 생활 지원을 위해서 우리 정부에서 해주는 게 있습니까?

성규환 : 하나도, 한푼도 없습니다.

박인규 : 이번에 고향을 방문한 정도

성규환 : 이번에 방문한 것도 정부가 지원한 게 아닙니다. 저희들이 적립금, 저희들 돈을 부어서 그것이 30년 동안 이자가 붙어서 그 돈을 갖고 생색만 내고 고국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참 정부에 대해서 아쉽고 섭섭한 게 많으실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재독 광부들을 대표해서 이런 정도 지원은 해줘야 되지 않겠나 하는 게 있으시다면 어떤 게 있습니까?

성규환 : 정부로부터 그 어려운 시절에 파독 광부로 가서 경제발전에 일조했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정년이 되고 나이 70이 되고 이래서 고국에 방문했을 때 질병이 난다든가 이럴 때 정부에서 지원을 좀 해주셔야 되고

박인규 : 질병치료 정도에 대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또 하나는 재독 광부들이 그동안 60년대 이후로 독일에 가셔서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걸 기념하는 기념관이나 기념탑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계획은 진전되고 있습니까?

성규환 : 그 돈을 우리 적립금을 갖고 해달라고 했습니다. 15년 전부터 했는데 정부에서 기념비를 해주겠다고 해서 우리들 적립금에 있는 돈에서 5억3천만원을 책정해줬습니다. 이 돈을 가지고 기념비를 만들어라 했는데 지금 추진 중입니다. 5억3천만원 가지고 기념비를 만들 수는 있는데 어느 정도 규모냐 하는 게 문젭니다.

박인규 : 일단 작지만 예산은 책정이 됐고

성규환 : 그건 저희들의 광산적립금, 저희들 돈 가지고 하는 겁니다. 이것마저도 지금 와서 책정됐습니다.

박인규 : 말씀 듣고 보니 그동안 고생하신 것에 비해서 고국의 정부나 사회에서 관심과 지원이 적은 데 대한 섭섭함 같은 게 많으신 것 같습니다

▲ ⓒ프레시안

성규환 :
저희들이 살려고 갔는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는 항상 떡고물을 발라주는 식으로 좋은 말씀만 하시고 이렇기 때문에 섭섭합니다. 왜냐, 저희들이 물론 고국 경제발전에,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갔지만 기여한 건 사실입니다. 달러를 고국에 다 보냈으니까, 그랬는데 내 가족들이 먹고 살았다 하더라도. 대통령께서 그 돈을 가지고 경제발전에 초석이 됐다고 이런 말씀들을 역대 대통령 다 하셨는데 우리들이 지금 왜 기념비, 기념비를 하느냐 하면 우리 남은 여생은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손들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 이렇게까지 된 것도 그 조그마한 초석이라도 일조를 한 파독 광부들이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고생을 해서 했다는 기념비라도 하나 만들겠다고 하는데 그것마저도 정부에서 나몰라라 한다면 진짜 섭섭하죠. 또 섭섭한 게 있다면 저희들이 듣기로 교과서를 지금 새로 많이 변경한다는데 그 교과서에 파독광부나 간호사의 역사도 해서 우리 후손들이 좀 알았으면

박인규 : 지금 현재 교과서에는 파독 광부나 간호사 이야기가 안 들어가 있나요?

성규환 : 안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정부 차원에서 만들어서, 우리 대한민국이 못 살았을 때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이래서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는 정도는 알아야 되는데 그것도 좀 해줬으면 합니다.

박인규 : 사람들이 어려웠을 때를 잊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파독 광부나 간호사 분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조국 경제발전에 기여한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마지막으로 못다 하신 말씀있으시면 정리말씀 부탁드립니다.

성규환 : 왜 우리 한국 교과서에 이런 걸 실어 달라 하냐면, 지금 우리 2세들에게 아버지들 살 때 이렇게 어려웠다 하고 밥도 굶고 그랬다 이랬을 때 뭔 얘기를 하느냐 하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잖아. 이런 걸 들었을 때 우리 대한민국이 그야말로 강대국이 됐을 때 조상들이 어떻게 살아서 강국이 됐느냐 이런 것도 학생들이 알아야 되고. 지금 한 가지 얘기하고 싶다면, 지금 한국이 경제성장국이 되고 외국에서 인력을 도입해서 외국인들이 와서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 우리들도 똑같은 조건으로 외국에 가서 일했는데 우리 한국에 인력이 남아도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제가 더 빨리 성장하려면 우리 인력으로 각성하고 해야 경제가 더 성장하지 않겠나 하는 바람을 갖고 있고. 지금 젊은 청년들이 일선에 나서서 해야 우리 경제발전에도 기여하고 자발적으로 젊은층에서 일을 해주셔야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박인규 : 어려울 때를 잊지 않아야 발전이 있다고 하는데 저희가 지금 세계 11대 경제대국이라고 해서 도취한 측면도 있고, 파독광부 나가셨을 때처럼 어려웠던 기억을 잊지 않는 것, 그래야 다시 발전이 있을 수 있다. 좋은 말씀으로 새겨듣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성규환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파독 광부들의 모임인 '재독 한인 글뤽아우프중앙회' 성규환 회장을 초대해.. 모처럼 고국을 찾은 소감과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쳐야했던 파독광부들의 삶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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