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현실주의 역사서로 이해된다. 정의와 도덕이라는 가치보다는 군사력이라는 힘이 당시의 국제관계, 도시국가 사이의 관계를 지배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8권에 이르는 방대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중에서도 '멜로스의 대화'같은 부분에서 힘을 발휘한다.
당시의 군사강국이던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신흥강국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리안 동맹으로 양분되어 있던 그리스에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위치를 유지하려던 작은 섬 멜로스는 마침내 아테네의 위협을 받는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여 멜로스 섬을 포위한 채 아테네는 멜로스 주민에게 아테네의 동맹국으로 살아남던가, 아니면 아테네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항해보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보잘 것 없는 군사력을 지닌 멜로스에 비해 압도적 군사력을 지닌 아테네가 사실 멜로스의 굴복을 강요한 것이다.
멜로스 섬 대표는 이러한 강요에 저항한다. 자유, 독립, 평등, 우호, 심지어는 신의 가호까지 들먹이며, 우리는 힘은 없지만 이러한 중요한 가치들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아테네 대표는 이러한 멜로스의 항변에 코웃음을 친다. 이러한 가치들은 이를 뒷받침할 힘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지, 힘이 없는 멜로스같은 섬은 이러한 가치를 향유할 능력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것이 유일한 국제관계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유명한 현실주의 연설이 나온다. "힘이 있는 자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나, 힘이 없는 자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
멜로스 주민은 아테네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을 선택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한 것이었다. 군사력의 차이 그대로 멜로스는 참패하고 만다.
현실주의적 역사이다. 약육강식의 세계, 힘이 정의인 국제관계의 축소판이다. 하여 이데올로기로서의 현실주의는 '멜로스의 대화'에 열광한다.
그러나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 8권중 6권으로 넘어가면 아테네의 타락과 몰락의 역사가 시작된다. 차례로 군소 도시국가들을 점령하고 그리스의 강국으로 등극한 아테네는 자신의 힘에 도취된다. 군사력을 과신하여 무리하게 시실리 원정을 나섰다가 파견된 군대가 궤멸하는 참패를 겪는다. 국내적으로는 역동적이던 직접 민주주의가 경직되기 시작하고 결국 소수에 의한 전제정치의 모습으로 타락하기 시작한다.
성공의 역설이다. 힘의 패러독스이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완결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 후사를 안다. 역동적인 민주주의, 활발한 경제활동, 강력한 군사력을 향유하며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던 아테네가 자신의 힘에 취하는 순간, 그 모든 것에서 퇴락을 시작했다는 것을. 그 퇴락의 끝은 멸망이었다는 것을. 힘의 끝은 패배라는 것을.
투키디데스가 말하고자 하는 두 번째의 현실주의는 여기에 단초가 있다. 힘과 군사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있는 현실 그대로 보자는 현실주의가 그것이다. 힘과 군사력에 대한 신봉으로 전화한 '이데올로기적 현실주의'에 대한 경고, 그것이 투키디데스의 '현실적 현실주의'이다.
▲ 미 해군 7함대 소속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9만7000톤급)가 21일 오전 해군작전사령부 부산기지에 입항하고 있다. 이 함공모함은 오는 25일까지 부산에 머문 뒤 동해 한미 연합훈련에 참가할 예정이다. ⓒ뉴시스 |
천안함 사건을 두고 '이데올로기적 현실주의'가 횡행했다. 단호한 대응 조치가 취해졌고, "국민이 3일만 참아주면…"이라는 담론이 횡행했다. 이의 연장선에서 대북 심리전을 재개하겠다던 한국 군대의 조치가 발표되고, 더한 제재조치가 논의되었다. 이번 기회에 힘으로 밀어붙이면 아예 굴복을 받아 낼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현실주의'가 전면에 나선 것이 아니었던가.
북도 '이데올로기적 현실주의'로 대응했다. "조준사격"을 운위하고, "서울 불바다"를 협박했다. 믿을 것은 힘과 군사력 밖에 없다며 긴장의 수위를 높인 것이다. 남이 군사력을 휘두르면 더 큰 힘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힘으로 결정되는 현실에서 힘으로 내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북 공히 '이데올로기적 현실주의'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현실적 현실주의'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투키디데스의 경고는 오늘 한반도에 던지는 화두이다. 힘과 군사력만 믿고 밀어 붙일 것인가. '이데올로기적 현실주의'의 끝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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