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저녁 7시 서울 중구 저동에 있는 인제대학원대학교 인당홀에서 열린 1강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역사'를 주제로 첫 테이프를 끊었다. 강의에 앞서서는 행사 주최 측인 인제대의 백낙환 이사장, 한반도평화포럼의 정세현 상임이사, 프레시안의 박인규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개강식이 열렸다. 수강생은 당초 모집 목표였던 50명을 정확히 채웠다.
프레시안은 11월 8일까지 매주 월요일 열리는 한반도평화아카데미 강의의 주요 내용을 지상 중계할 예정이다. 오는 18일 두 번째 강의는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이 '10.4 남북정상선언과 한반도 종전선언'을 주제로 강연할 예정이다.
25일 3강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9.19 공동성명과 한반도 평화체제'를 주제로 강의하고, 11월 1일 4강은 문정인 연세대 교수가 '이명박 정부와 한반도 평화체제의 쟁점'을 이야기한다. 끝으로 11월 8일에는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한반도평화포럼 대표)이 '남북 화해·협력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주제로 강의할 예정이다.
한반도평화아카데미에 관한 문의는 한반도평화포럼( 02-707-0615)으로 하면 된다. <편집자>
▲ 한반도평화아카데미 1강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맡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역사>
평화체제와 평화협정의 상관관계에 대한 개념을 우선 규정해야 한다. 평화체제는 평화협정 체결 후에 그걸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질서라고 규정할 수 있다. 평화체제가 협정보다 높은 개념이다.
1960~70년대 북한의 평화협정 관련 제안·주장
6.25 전쟁 후 북한은 남측에 병력 10만 명 이하로의 감군을 제의했다. 1961년 6.15 후 북한은 미군 철수를 전제조건으로 남북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은 이를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위장 평화공세'로 규정하고 일축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 베트남 문제의 해결 방식을 지켜본 북한은 74년 3월 미·북 평화협정 체결을 미국에 직접 제의했다. 그러나 한·미 양국은 '선(先) 남·북 평화협정 후(後) 미·북 평화협정'을 해야 한다고 대응하며 북한의 제안을 다시 거절했다. 이후 한·미는 중국의 정전협정 당사자 자격을 들어 명분상 '2+2'(남·북+미·중)론으로 대응했다.
이후에도 북한은 1980년대 말까지 미국과 북한이 실질적인 당사자라는 논리에 입각해 미·북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대표적으로 북한은 1988년 11월 '한반도 포괄적 평화 보장 방안'을 내놓으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미·북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1960년대 이후부터 80년대 말까지 북한의 평화협정 제안은 기본적으로 미군 철수를 위한 것으로서 '하나의 조선'(One Korea)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 이후 평화협정에 대한 북한의 입장
90년 9월부터 92년 2월까지 열렸던 남북 총리급회담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인어 채택됐다. 이때 북한은 '하나의 조선'론에 입각해 극력 반대하던 유엔 동시가입을 결국 수용했다.
북한의 이같은 입장 변화는 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와 이듬해 10월 동·서독의 통일, 89년 11월 미·소 정상의 몰타 선언과 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배경이 작용했다.
나아가 북한은 92년 김용순 노동당 비서를 미국으로 보내 아놀드 켄터 미 국무차관에게 중대한 제의를 했다. 김용순은 "우리가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과 수교를 하자. 통일 후에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는 걸 용인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제안을 거절했다.
주한미군에 대한 이같은 입장은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그해 10월 김정일 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대화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났다. 김정일 위원장은 올브라이트 장관에게 92년 1월 김용순 비서가 언급한 내용을 직접 재확인했다.
이처럼 90년대 초 북한은 미국과의 수교를 요구하면서 미군 철수라는 조건을 제거했다. 그러나 이후 북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미군 철수와 평화협정 문제는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북한이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에 동의하고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주한미군을 용인하는 조건하에 미국과 수교하겠다는 요구는 '하나의 조선'을 포기하고 '두개의 조선'(Two Korea)를 수용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교의 법적인 요건인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 주최측인 인제대학교 백낙환 이사장이 개강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미국 정부의 입장
2003년 시작된 6자회담이 난항을 겪자 (아들) 부시 정부도 북핵 문제 해결의 조건으로 북한이 요구하는 미·북 수교와 평화체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이 채결되기 전 미국은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할 필요성이 있다고 한국에 제기했다.
그러나 미국의 제안은 한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진전을 보지 못했다. 다만 9.19 공동성명 4항에 '장차 별도의 포럼을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이후 한반도 평화체제에 적극성을 보인 것은 오히려 부시 행정부였다. 부시 대통령은 2006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당신(노무현 대통령)과 내가 김정일과 만나 한국전쟁 종료를 공식 선언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어 부시 대통령은 2007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그 다음 달 열리는 2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그같은 제안을 김정일에게 전달해 달라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말했다.
9.19 공동성명 4항과 10.4 남북 정상선언 4항은 남·북·미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북한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논의에서 한국의 당사자 자격을 수용했다는 것은 큰 진전이지만, 평화협정의 주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평화협정·평화체제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입장
오바마 정부는 평화체제 구축에 대해 전임 부시 정부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2009년 7월 11일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대가로 미·북 수교,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 체결, 대북 경제지원을 교환할 뜻이 있음을 시사했다. 또한 그해 12월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 후 미국은 6자회담이 재개되면 평화체제 논의에 대한 우선순위를 조정하겠다는 의사도 드러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비핵·개방·3000' 정책과 북핵 '그랜드 바겐'을 고수하면서 '선(先) 북한 비핵화 후(後) 평화체제 논의'를 주장했다. 이는 한국이 6자회담 재개의 최대 걸림돌을 놓은 셈이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후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문제를 6자회담 개최와 연계시키기도 했다.
북핵 문제는 발생 원인과 전개 과정을 볼 때 미·북 수교와 일·북 수교를 통한 정치적 보장,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평화체제 수립을 통한 군사적 보장 등 북한 체제가 보장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평화협정과 평화체제 논의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결국 북핵 문제 해결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장기 과제인 북핵 문제에 대해 '일괄타결'을 고집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기존의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6자회담 등 북핵 해결의 구조가 깨지는 경우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 능력을 강화시켜 주고 한국은 본의 아니게 북한의 핵 위협 아래로 들어가는 결과를 자초할 것이다.
만일 이명박 정부의 고집이 미·북 평화협정 대신 남·북 평화협정의 토대 위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려는 중장기 전략의 일환이라면, 남북관계 긴밀화를 통해 북한을 설득하고 남북이 미국을 설득하는 것이 오히려 확실하고 효과적일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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