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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바다에 침몰한 게 과연 천안함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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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해 바다에 침몰한 게 과연 천안함 뿐일까?" [한반도평화아카데미]<4강>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한반도평화포럼, 인제대학교, 프레시안이 공동 주최하는 제2기 한반도평화아카데미 네 번째 강의가 27일 서울 중구 저동 인제대학원대학교에서 진행됐다.

이날은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 당시 통일부 장관으로 10.4 남북정상선언의 주역이었던 이재정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서해 평화 실현과 10.4 선언 이행 전략'을 주제로 강연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재정 전 장관은 10.4 선언 채택 4주년을 앞두고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의 '뒷얘기'를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10.4 선언 마지막 8항에는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들을 협의하기로 했다"는 대목이 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내가 정례적으로 만나자고 하니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친척 같은 사이에 정해놓고 만나는 건 맞지 않다. 일이 있으면 수시로 만나야 한다'고 말해 그렇게 넣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재정 전 장관은 "김정일 위원장은 그 얘기를 하면서 '전보 치고 만난다'는 표현을 썼다"며 "옛날에 고향 갈 때 전보를 미리 쳐서 며칠에 내려간다고 했을 때가 생각나 향수를 느꼈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정상회담 마지막 날인 10월 4일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게 하루 더 머물다 갈 것을 제안한 일화에 대해서도 '친척론'을 폈다. 그는 "친척이 오면 속으로는 빨리 갔으면 해도 겉으로는 '하루 더 있다 가라'고 하는 게 우리 문화고 정서"라며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을 친척처럼 이해하고 믿을 만한 상대라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또 정상회담 당시 김 위원장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와 종전선언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해주에 경제특구와 조선 산업단지를 건설하는 것(10.4 선언 5항)과 관련해서는 김 위원장이 '개성공단도 아직 계획대로 안 되는데 뭘 더 여기 저기 땅을 파서 만드느냐'며 처음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10.4 선언이 정권 말기에 너무 늦게 채택됐다는 지적에 대해 이 전 장관은 "부시 정권의 대북 강경정책이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쳤고 노무현 정권 초기 대북송금 특검이 아무래도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가는데 지장이 되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장관은 "2007년 12월 10.4 선언 합의 사항과 제1차 총리회담의 합의 사항에 따라 철도의 현지 조사나 개성공단 2단계 개발을 위한 지질조사와 측량을 서두른 것은 이렇게 가면 다음 정권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이다.


'2013년 체제와 한반도 평화전략'이라는 큰 주제로 열리는 2기 아카데미는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2시간 동안 인제대학원대학교에서 총 8차례 진행된다. 다섯 번째 강의는 10.4 선언 기념식이 열리는 10월 4일을 건너 띄고 10월 11일 서주석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전 청와대 안보정책 수석)가 '남북간 긴장 완화와 군사관계 개선 전략'이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강의에 관한 자세한 안내는 한반도평화포럼 홈페이지()를 방문하거나 사무국으로 전화(02-707-0615)하면 된다. 한반도평화포럼은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지지하는 연구자, 종교·시민사회 관계자, 전직 공직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제1기 한반도평화아카데미는 지난해 10~11월 5회에 걸쳐 진행됐다. <편집자>

▲ 2007년 10월 25일 남북정상회담 보도사진전 당시 이재정 통일부 장관 ⓒ연합뉴스

2013년, 서해평화 실현과 10.4 선언 이행전략

1.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사건이 일어난지 두 달 만에 이명박 정부는 5.24 대북조치를 발표하고 대북 교역, 경협, 투자를 중단했으며 일체의 방북 제한, 군 당국의 대북심리전 재개, 대북지원 중지 및 민간단체의 대북접촉을 전면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정권 교체 불과 2년 만에 과거 10년간 발전시켜온 모든 남북관계는 완전히 얼어붙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버릇"을 고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단호한 조치는 아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북이 무릎을 꿇은 것도 아니고 북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북은 오히려 중국과의 무역량을 대폭 늘렸고 중동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했습니다.

나아가 북은 자체 기술로 경수로를 개발할 것을 밝히고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 시설을 공개해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습니다. 북한은 중국과의 탄탄한 "역사적 동반자 관계"를 바탕으로 2012년을 향한 "새로운 경제시대"를 준비해 가고 있습니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나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취한 한반도 강경정책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남북관계를 군사적 대결과 상호불신만을 증대시켰습니다.

2012년 총선이 머지않았습니다. 2012년 말에 있을 대선은 벌써부터 정당을 넘어 전 국민적인 관심을 넘어 태풍처럼 새로운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 한가운데 무엇이 있을까요. 21세기를 향한 복지국가나 정의사회를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우선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정책담론의 하나는 "서해평화"가 될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 5년의 가장 큰 실정이 바로 서해상에 평화를 지키지 못했고 이것이 국민들에게 "불안"한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 유엔 안보리에서 이명박 정부는 기대하던 결의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 남한 사회 내부는 첨예한 진실공방으로 갈라졌고 국제사회는 어떤 합의도 도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현재까지 여러 방법으로 북한 당국의 사과 또는 이에 준하는 조치를 끌어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서해 바다에 침몰한 것은 천안함 만이 아니라 한국의 외교와 대북관계 그리고 한반도 평화였습니다. 끝내는 대북 무력 대결로 치달아 가다가 서해상 군사훈련 과정의 갈등 끝에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정권 초기부터 남북관계 파탄이 불러 온 서해에서의 무력대결은 끝내 한반도 평화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남북관계의 파탄은 더욱 확대되어 북미관계도 전혀 새로운 출구를 찾지 못했으며 미중 정상회담에서의 합의 가운데 하나였던 6자회담 재개도 아직 혼미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미국, 중국, 러시아도 2012년에 통치권자를 새로 선출하는 해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대결적 상황은 남북은 물론 국제사회의 정치적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정치적인 변화의 시점에 최근 여러 차례의 북중 정상회담에 이어 북러 정상회담이 열리고 머지않아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활발한 외교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모든 나라들이 내년 선거 이전에 한반도에 대한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제사회가 대 한반도 정책에 어떤 구체적 변화를 만들어가려면 필연적으로 먼저 남북관계의 경색국면이 대화국면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선 한미 FTA가 현안으로 한미 간에 놓여 있고 북러, 한러 간에 가스송유관을 설비하는 문제가 구체적인 실무논의에 이르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볼 때 남북 간 "협력" 문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유연하게" 논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부 측에서 말하는 것처럼 년 내에 남북 간 고위급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높고 이것은 정상회담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5.24 조치에 대해 북으로부터 더 이상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 때, 이명박 정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다른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 당국 간의 회담도 지난 발리에서의 만남으로 시작되어 북경 회담으로 이어지고 있고 최근에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 대표들이 대거 북을 방문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북한으로서도 2012년의 변화를 만들어 그들이 계획하고 있는 "경제개혁"을 달성하려 한다면 남북과의 정상회담을 비롯한 당국 간의 회담을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명박 정부로서도 금년 내로 남북관계를 급진전시킴으로써 국내정치상황의 변화를 시도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내년 3월에는 서울에서 세계 핵안보정상회담이 열리는 것을 감안할 때 그 이전에 한반도의 새로운 변화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성격상 실패한 상태를 그대로 세계에 내놓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2.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서해평화를 정착하는 문제와 10.4 정상선언의 이행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현안이 될 수도 있고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첨예한 정책적 담론이 될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선거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2013년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한반도의 서해평화실현을 위한 결정적인 과제들은 과연 무엇인가.

이미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할 당시 서해평화 실현이라는 과제는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서해에 완전한 평화 구조를 만들지 못한다면 6.15 남북공동선언의 실현도, 2007 정상회담의 어떤 합의도 이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해의 "평화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군사회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합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서해상의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 방지를 위해 양측 경비함정에 국제상선공통망을 운용하고 무선통신 주파수를 통일시키며 쌍방 간 호출 부호는 남측 '한라산', 북측 '백두산'으로 결정했습니다. 국제상선공통망이 불가능하거나 기관고장, 조난, 항로이탈 등으로 양측 함정이 불가피하게 접근했을 경우에는 깃발이나 발광신호를 보조 통신수단으로 활용키로 했습니다. 이 합의에 따라 남북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서해상에서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을 막는 장치를 만들어 평화를 구축할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남북관계를 평화롭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노무현 정부는 2005년 8월 10일 남북해운합의서를 만들고 상호 해운협력을 도모함으로써 서해평화를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해운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2006년 7월 5일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10월 9일 제1차 핵실험 등으로 이 합의의 지속적인 이행이 어려운 상황도 발생했지만 경제적인 협력이란 관점에서 선박 왕래가 지속되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해에서 무력적인 갈등을 일이키는 중요한 구조적이며 구체적인 원인은 북방한계선(NLL)이었습니다. 정전협정을 맺을 당시 육상에서는 군사분계선을 설정하기로 합의했으나 해상에 군사분계선을 만드는데 실패했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동해는 물론 서해 해역과 대부분의 도서와 북쪽의 해안지역까지 장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과 휴전협정에서 해상에서의 완충지역을 합의하는데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해상경계선은 합의하지 못하고 다만 육지로부터 한강 하구를 따라 우도까지 이르는 강의 중심을 나누어 쌍방이 각각 관할하도록 선을 긋고 이를 통행하는 쌍방의 민용 선박에 대해는 항행에 개방하도록 했습니다.

해상의 연안도서에 대해는 "비록 일방이 점령하고 있더라도 1950년 6월 24일에 상대방이 통제하고 있던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의 도서군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 하에 남겨두는 것을 제외한 기타 모든 도서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군지원사령관의 군사통제 하에 둔다" 라고 규정했습니다. 동해상에서는 연안에 도서가 없었기 때문에 육상의 군사분계선을 그대로 해상까지 연장하기로 합의한 반면 서해상에서는 도서의 관할권 이외에 해상에 대한 어떤 관할권에 관해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전협정은 서해에서 도서와 도서를 잇는 어떤 형태의 경계선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NLL은 남북 간의 합의 없이 휴전협정이 발효한 이후 불과 한 달여가 지난 1953년8월30일 일방적으로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정전체제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라는 명분을 내세워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이 명분이 왜 필요했는지는 확실히 밝힐 수 없지만 당시의 유엔군이 한국 정부와 한국군의 통제를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해상에 관한 관할권을 쌍방 어느 측에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해상 위에 언급한 큰 도서 이외의 작은 도서에 대해는 북한군과 중국군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서해에서의 군사적인 충돌을 막기 위해 이러한 조치가 유엔군으로서는 필요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 간에 NLL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73년 12월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한이 "서해5도통항질서"와 함께 "서해해상경계"를 제시하면서 서해5도를 출입하는 남측선박은 북 당국의 사전승인을 받도록 요구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이후 구체적으로 북한이 해상경계선을 주장한 것은 1999년 9월 2일 북한군 총참모부의 특별보도를 통해 "인민군 서해해상군사통제수역"을 발표함으로써 소위 북측의 계선이 선포된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NLL에 대응하는 북의 경계선을 공포한 것으로서 꽃게잡이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 이후에 북이 취한 강경한 조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북한이 해상경계선을 선포한 것은 군사적인 목적 보다는 정전협정에 의해 쌍방이 공동으로 주장할 수 있는 해상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서해상에서의 군사적 충돌이후 2000년 3월 북한 군 당국은 미군함정과 남측의 민간선박이 "북한의 영해"를 출입할 때는 북한이 지정한 두 개의 수로만을 이용하라는 새로운 "서해5도통항질서"를 공포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우리 측이 주장하는 NLL과 북측이 공포한 "해상경계선"이 충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해상에서의 군사적인 충돌을 막기 위한 해상경계선에 관한 남북의 공식적인 최초의 논의는 1992년 9월 17일에 발효한 남북기본합의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의 논의과정에서 NLL문제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결국 합의서에는 제3장 제10조에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라고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해상불가침구역은 해상불가침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역시 해상불가침구역의 설정은 논의의 과제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남북 간에 서로 다른 문구의 해석상 차이도 있습니다만 남북기본합의서 자체가 합의한 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이 합의서도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서해에 관해 현재까지 가장 합법적인 통제력을 가진 문서는 1953년 정전협정입니다.

2007년 정상회담에 앞서 노무현 대통령은 필연적으로 NLL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하지 않으면 서해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제안이었습니다. 그것은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NLL이나 북이 내세우는 "해상경계선"이나 이를 두고 어떤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현 단계에서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우선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고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상호 이익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구상"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양측이 충돌하고 있는 군사적 대립을 넘어 경제적인 이익을 함께 나누는 평화적 경제 협력의 방안을 모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이러한 국제선례는 홍해 인접 국가들이 갈등하고 대립하고 있는 해상권을 평화적으로 해결한 "해상평화공원"의 방안 등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서해에 평화구조를 만든다는 것은 다만 서해 평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해상분쟁지역에 새로운 해법을 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3.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의 기본 구상은 2004년 남북 장성급군사회담에서 논의한 "서해 공동어로구역설정"을 비롯해 "북한민간선박의 해주항 직항로 이용"과 더 나아가 남북 경제교류와 협력에 필요한 군사적 보장에 이르는 내용들이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먼저 어민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공동어로구역 설정, 어족보호를 위한 바다목장의 설치, 해주항의 자유 항행로의 보장과 한강하구의 공동이용, 그리고 군이 관할하는 지역을 민간관할구역으로 전환하는 등의 구상으로 발전했습니다. 기본 정신은 "분쟁의 바다"를 "평화의 바다"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성안이 되었을 때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기본적으로 서해에 군사적 충돌을 막는 완충지역으로서의 평화수역을 만드는 일과 경제적으로 쌍방의 어민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공동어로구역의 설정과 바다목장 설치, 그리고 민간선박을 위한 해주항의 항행로를 개설해 해주공단, 개성공단 등이 인천공항 및 인천항과 연결되는 물류의 흐름까지 개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한강하구의 쌍방의 이용은 골재채취 등은 물론 홍수의 예방 등 자연재난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중심에는 서해안 시대를 열기 위해 거대한 지역경제구역 즉 해주-개성-서울-인천을 연결하는 경제발전의 큰 틀의 구상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와 평화를 함께 연결해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제안은 2007년 10월 4일 발표한 정상선언의 가장 중요한 합의 사항으로 채택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공동어로구역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해상완충지역을 어떻게 경계를 만들며 그 경비는 어떤 방법으로 담당하느냐라는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북 정상이 이 과제를 합의하면서 NLL 문제 해결의 가능한 길을 열어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2013년을 앞두고 다루기 힘든 일이지만 "서해평화실현을 위한 해상경계선" 설정을 위한 남북 간에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NLL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도 희박한데다가 정전협정의 규정과도 충돌하는 점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북이 주장하는 해상경계선은 합리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 도 없습니다. NLL의 실효적인 명분으로 정전 이후 NLL이 실체적인 군사·안보적인 역할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북이 이에 대항하는 해상경계선을 주장한 만큼 NLL의 실질적인 존재를 북한도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북관계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해상에서의 군사적인 충돌을 막으려면 근본적인 과제인 NLL 문제를 공론화해 남북이 해결하고 적절한 군사적 완충지역을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4.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계획은 10.4 선언의 중심입니다. 선언서에 정리된 이 계획의 목적은 "해주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설정, 경제특구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은 10.4 선언의 제4항과 관련해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4항에서는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계획은 종전과 함께 평화체제를 논의할 때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10.4 선언을 이행하기 위해 제1차 남북 총리회담이 2007년 11월 14일~16일에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이 회의에서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와 관련해 합의서 제2조에 "서해지역의 평화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이를 설치한다고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합의서에는 구체적으로 "평화수역과 공동어로구역의 대상상지역과 범위를 호혜의 정신"에 따라 협의해 확정키로 하고 2008년 상반기 안에 공동어로 사업에 착수하기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장관급을 위원장으로 하는 추진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이에 따라 2007년 12월 28~29일 개성에서 첫 위원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해주경제특구 건설, 해주항의 개발과 활용, 서해공동어로 실시와 수산자원의 보호 및 활용, 한강 하구의 단계적 개발을 위해 각 사업 추진을 위한 4개의 분과위원회를 설치·운영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2007년 11월 27~29일에 평양에서 개최되었던 제2차 남북 국방장관회담입니다. 이 회담에서 쌍방은 서해 평화와 해상경계선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합의를 만들었습니다. 즉 "쌍방은 지금까지 관할해 온 불가침경계선과 구역을 철저히 준수"하기로 하는 한편 이러한 과제들을 협의해결하기 위해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합의였습니다.

다만 위의 합의 내용 중 "지금까지 관할해 온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이 과연 어느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회담은 서해해상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을 설정하는 것이 절실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 문제를 "남북장성급군사회담"에서 빠른 시일 안에 협의해결하기고 합의했습니다. 또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대한 군사적 보장 대책을 세워나가기로 합의하는 한편 서해 공동어로, 한강 하구 공동 이용 등 교류협력 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 대책을 별도로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최우선적"으로 협의해결하기로 했습니다.

2007년말 까지 10.4 선언 이행에 관한 협의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단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정치적 담론을 넘어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구체적인 활동이 필요합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의 이행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으로서 6자회담이 재개되는 경우 이 제안을 6자회담 틀에서 논의하도록 제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해평화 문제는 인접한 중국과 직접 연관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6자의 틀에서 3자의 회담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5.

2013년에 10.4 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전략적인 판단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선 10.4 선언의 합의 사항을 6.15 선언의 틀에서 분석하고 이행의 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2000년 정상회담은 1945년 해방 직후 분단식민통치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분단 극복의 민족적인 역사적 결실이었습니다. 당시 분단된 남북의 정상의 자격이었지만 그보다도 훨씬 민족을 대표해 그리고 민족을 위해 민족으로 만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선언의 제1조에서 두 정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역사적인 합의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해방 전후 미소가 한반도를 점령해 민족과 국토가 갈라진 이후, 그리고 전쟁으로 비극적인 참화를 당한 이후 처음으로 이룩한 위대한 민족정신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런데 6.15 선언의 가장 중요한 합의점은 남북의 통일 방안에 공통성을 인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북이 처음으로 통일을 향한 새로운 이정표를 함께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일거에 60년 분단의 역사를 해소해 갈 수 있는 열쇠를 만든 것입니다. 과거사를 뛰어넘는 결정적인 "민족적인 합의"였습니다. 민족사를 새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겨레의 길"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2일 김대중 대통령이 열어 놓은 "겨레의 길"을 따라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가는 새로운 역사적 길을 만들었습니다.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남북 간에 닫혀 있던 하늘과 바다와 육지가 모두 열린 것입니다.

10.4 선언의 공식 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었습니다. 이 선언은 6.15 선언에 이어서 그야말로 "민족광장"을 만들어가는 선언이었습니다. 모든 합의 사항에 전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민족이었습니다.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전제로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며, 평화와 평화체제를 보장하고 교류협력을 확대하며 남북 당국 간의 대화를 체계화하며 정례화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합의문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해 가는 주체가 곧 남북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과거 8.15 해방을 전후해 시작된 "분단식민주의"와 전쟁으로 인한 한반도의 왜곡된 역사를 우리 민족의 힘으로 바로 잡는 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6.15 선언 제1조의 합의사항을 실천해 갈 수 있는 구체적인 과제를 명시한 것입니다. 이 과제는 북핵 문제의 해결과도 직결되어 있으므로 양 정상은 "6자회담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것을 그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10.4 선언의 이행은 6.15 선언의 틀 속에서 추진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10.4 선언의 합의 사항 가운데 선택과 집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10.4 선언의 4항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 차원만이 아니라 민간차원에서의 외교적 활동을 강화해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2013년 부산에서 예정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를 기해 세계교회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추진하는 것도 세계의 여론을 만드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이행을 위해 여러 분야의 법률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기 위한 연구와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제를 노무현 재단이나 한국미래발전연구원 등은 물론 각 정당의 정책연구원이나 민간 NGO의 연구기관들이 함께 참여하고 더 나아가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인접 국가들의 연구기관과의 협동연구도 필요할 것입니다.

6.

2013년이 새로운 한반도의 평화 역사를 만들어가는 전환점이 되려면 통일과 평화의 담론을 어떻게 대중화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첫째로 국가의 대북정책이 특정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좌우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남북관계를 규정하고 관리하는 법률도 상당히 제정되었고 운영했습니다. 따라서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남북관계를 관리하고 운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대중화의 첫길입니다. 특히 남북관계발전법에 의해 정부는 남북관계발전 5개년기본계획을 수립 발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국민이 "예측 가능한 남북관계"를 함께 공개적으로 만들어 가는 하나의 기준입니다. 이것을 지켜가야 합니다.

둘째로 통일·평화운동에 있어서 국민의 참여의 길을 더욱 확대해야 합니다. 통일과 평화의 단계는 "국민이 동의"하는 범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국민을 계몽하려들기 보다 정부가 국민의 소리를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통일과 평화운동은 홍보로 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 업무는 거버넌스 체제로 더욱 확대해 통일부의 업무 자체를 대폭 개방적으로 열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통일에 관련한 정책의 수립, 집행, 평가 등은 남북이 주체가 되어 추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들은 국제사회와의 균형 잡힌 외교 활동을 통해 국제사회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2013년에 6.15 선언과 10.4 선언을 이어가는 제3의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정상선언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제는 한 단계 더 발전해 남북이 공동으로 만들어가는 더 광범위한 평화 계획들이 담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2013년은 2012년의 선거를 통해 6.15 선언과 10.4 선언을 되살려내면 다시 한 번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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