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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속박의 지정학에서 평화·번영의 지정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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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피해·속박의 지정학에서 평화·번영의 지정학으로" [이수훈 칼럼] 새로운 외교안보 전략을 위하여 <5>
동(북)아시아 지역에는 과거 식민주의와 냉전체제로부터의 여러 유산이 산적해 있다. 제국주의 시기 과거사로 인한 역사문제, 영토분쟁, 해양영유권 문제, 역사기술 문제 등이 잔존하면서 빈번하게 갈등과 대립을 빚어내고 있다. 한일간 독도 분쟁은 해묵은 사안이고, 이에 더해 근래에는 한중간 이어도 분쟁, 그리고 중일간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 분쟁이 노골화되고 있다.

탈냉전기임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지역에는 북미관계와 북일관계의 경우처럼 노골적 적대관계가 온존하고 있다. 민족주의적 정서가 강해 주권의 양보나 협력 정신이 미흡하다. 게다가 근년에는 중국의 급부상과 맞물려 미중 및 중일 관계가 순탄하지 않다. 중국은 자신의 자의식과 정체성을 재정립하기 위해 열심이고, 미국은 이 지역에 대한 자신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을 펼치고 있으며, 일본 역시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보통국가'의 길을 가고자 한다. 이같은 동(북)아 강대국 정치는 형식상 협력의 성격을 지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대립과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동(북)아 지역은 이런 배경적 요인으로 인해 세계 어느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군비경쟁이 첨예하게 전개되고 있기도 하다. 미국의 군비는 위력이 이미 엄청난 수준이고 중국마저 자신의 급상승하는 국제적 위상에 부합되게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 일본도 첨단기술과 막강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력 증강에 열심이다. 국내적으로는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려는 보수 정치인들의 움직임이 역력하다. 여기에 북한 핵문제가 첨가되어 있다. 안보적 불안정성이 매우 높은 지역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동시에 우리가 모색하고 있는 역내 다자안보협력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아울러 세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북)아에도 21세기형 비전통적 안보위협이 다종다기하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이 주도하는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인해 자원 확보 경쟁이 치열하다. 에너지 조달을 위해 원자력발전에 대한 공급의존도가 날로 높아가는 점도 중장기적으로 큰 이슈가 될 것이다. 초국경적 환경문제가 우려의 수준을 넘어서 역내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근년에는 글로벌 차원에서 발발하는 자연재해가 빈발하고 있다. 2011년 3월 발발한 후쿠시마 사태는 동(북)아의 새로운 도전을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다. 테러와 WMD 비확산 문제도 마찬가지로 역내의 위협이 되고 있다. 초국경 난민의 문제도 이제 중대한 외교 분쟁의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SARS나 조류독감, 말라리아 등등의 초국경 전염성 질병들도 공동의 대응을 요구하는 문제에 속한다.

이같은 역내 안보지형은 동(북)아 역내 다자안보협력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강력하게 제기한다. 과거에는 양자 동맹이 작동한 탓에 다자협력에 대한 의지나 실행역량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와 미국마저도 동맹에 더해 동(북)아 지역 안보협력 메커니즘의 구축에 대해 적극 공감하고 있다. 미국은 '9.19 공동성명'과 '2.13 이행합의'에 따라 설치된 '동(북)아평화체제' 실무그룹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보여왔다. 역내 주변국들 가운데 북한을 제외한다면 지역 다자안보협력에 대체로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역대 여러 정부에서 활발한 지역 안보협력 외교를 벌여왔다. 특히 참여정부는 동(북)아에서도 유럽과 같은 동(북)아판 '헬싱키 프로세스'의 추진을 강조했다.

현실주의자들은 동(북)아시아에는 어떤 분야건 공동체나 지역주의(regionalism) 논의 그 자체가 시기상조이며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안보분야에서 동(북)아시아에서 공동체나 안보협력이 담론 수준이라면 모를까 현실적으로 제도화시켜간다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도 유럽식의 다자안보협력을 위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주장하는 논자들도 많다. 실제 담론 영역에서 이같은 논의는 매우 활발한 형편이다. 역내 국가들도 이제는 다자간 안보협력에 대부분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음은 이미 언급했다. 이들은 제도화의 구체적 방법론에 대한 모색에 더 무게를 두어야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형편이다.

필자와 같이 '글로벌 중견국가론'을 펼치는 입장에서는 동(북)아 안보협력을 구성적 견지에서 점근해나갈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국의 자의식과 정체성이 평화와 협력임을 새삼 강조하면서 관련국들로부터 우호적인 협조를 받아내는 노력도 강조되어야 한다. 시기상조라는 현실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한편, 섣부른 낙관론이나 순진한 의지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갖는 가운데 안보협력 담론을 공세적으로 펼치는 한편, 현실적으로 이행가능한 협력 메카니즘 방안을 모색하는 이중적 노력이 필요하다. 한반도가 자리한 지정학을 피해와 속박의 지정학이 아니라 평화와 공동번영의 지정학으로 바꾸어나가자는 공세적 문제의식을 견지하는 중견국가론으로서는 그같은 이중적 노력의 필요성이 당연한 귀결이며, 그 노력마저 매우 '진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협력과 공동체 담론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방향성이 하나의 갈래를 이루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동(북)아 안보협력 지형에서 이행가능성이 높은 부분을 정책적 대상으로 삼아 구체적 노력을 기울이는 방향이 다른 하나의 갈래가 될 것이다. 담론은 참여정부에서 이미 풍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발전적으로 되살리면 될 것이고, 구체적 정책 구상은 외교, 대화, 상호존중, 배려의 정신이 강조되는 방향성에다 고난도 군사 영역을 후순위로 삼는 가운데 하위정치 영역, 즉 비전통 안보위협들을 중심으로 기능적 협력의 방향으로 접근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동(북)아 지역이 세계체제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은 말할 나위없이 대단하다. 정치적으로 강대국들이 대개 망라되어 있는 지역이 또한 동(북)아 지역이다. 따라서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은 곧 세계 전체의 평화번영과 직결되어 있다. 불안정성과 유동성으로 가득 찬 동(북)아 지역에서 공동안보의 틀을 구축하는 과제는 곧 세계 전체의 평화번영에 기여하는 거대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 2010년 10월 한중일 3국 정상회담 ⓒ청와대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 구축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외교적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를 살펴보자. 첫째, 동(북)아시아 역내 정부(장관급) 차원의 공식적 안보대화 채널인 ARF(ASEAN Regional Forum, 즉 아세안지역안보포럼)을 소중하게 여기고 적극 활용하는 일이다. ARF는 제도화의 미비, 구속력의 한계, 효율성 미흡 등의 문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RF는 정례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장관급 대화라는 점에서 이미 제도화의 수준이 매우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틀 속에서 무한한 조합의 양자대화와 다자대화가 가능하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기회의 창임과 동시에 대화와 상호 이해의 장이라는 점에서 대화의 관행과 습관을 형성하는데 적잖은 기여를 한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로서는 북한의 외상이 매년 참석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가 있다. 실제 비핵화 프로세스가 교착국면에 빠져있을 때 돌파구를 찾는데 ARF가 여러 차례 북미대화나 남북대화의 창구로 활용된 바가 있다.

다음으로, 6자회담 틀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2005년 체결된 '9.19 공동성명' 4항에 따라 역내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동(북)아 다자안보협력메커니즘 구축을 위한 노력 필요성은 그 기반을 확보한 셈이다. 그리고 2007년 '2.13 이행합의'에 따라 '동(북)아 평화체제' W/G(실무그룹)이 설치되고 이미 세 차례에 걸친 회담을 열어 구체적 진전이 있었던 만큼 역내에서 군사적 신뢰 구축과 군사적 긴장완화, 예방 및 평화적 관리, 그리고 비전통적 안보 이슈들을 공동대응하기 위한 다자안보협력 및 협력의 제도화를 추진할 상당한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문제는 북핵문제 해결에 진전이 병행되어야 하는 데, 그런 점에서도 6자회담의 재개 및 비핵화 프로세스의 재발동이 더 한층 절실해진다. 남북관계의 개선과 북미간 대화에 의해 추동력을 받은 6자회담이 재개된다면 불능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6자 외무장관회의'가 출범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계기가 되어 출범한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주목할 가치가 있다. 2008년 12월 13일 후쿠오카에서 처음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은 2004년 참여정부가 '동(북)아시대 구상' 실현을 위해 제안했던 것으로서 당시에는 3국간 여러 문제들이 불거져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중일 3국은 일종의 운명공동체의 관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정상들이 한 자리에 같이 앉기를 꺼려할 정도로 마음의 앙금이 깊은 관계를 유지해왔던 것이다. 심지어 '아세안+3'체제를 EAS(East Asia Summit, 즉 동아시아정상회의)로 발전시키면 한중일 3국 정상들이 한 자리에 같이 앉을 수 있다는 절박감 아래 2005년 급발진시킨 첫 EAS 회담에서 정작 3국 정상회담을 여는 데 실패할 지경이었다. 그런 관계를 뛰어넘어 정상회담이 성사된 데는 글러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위기감이 공유되어 협력의 필요성이 부각된 측면도 있고, 미국이 가타부타할 처지가 못 되는 국면이 작용한 탓도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1차 정상회담 결과 3국간 협력의 강화가 동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의 안정과 번영에도 기여할 것이라는데 인식을 같이 하는 한편, 향후 3국간 협력의 기본 원칙과 방향을 제시하는 '한·중·일 3국 동반자 관계를 위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 회의는 금융위기 타개를 위한 3국간 금융통화협력 강화가 주된 테마였지만, 각론적으로 2008년 5월 중국 쓰촨성 대지진에서와 같은 지진, 태풍, 홍수 등 재난관리 분야에서의 체계적 협력 추진을 위한 '재난관리 협력에 관한 한·중·일 3국 공동발표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같은 의제는 동(북)아안보협력체 구축 논의에서 흔히 등장하는 것인데 중국의 주도로 3국 합의로 귀결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한중일 3국정상회의'는 2008년 이후 매년 각 국을 돌아가며 개최되면서 급속하게 발전했다. 2011년 회의가 일본 도쿄에서 열렸을 때 3국 정상들은 후쿠시마 참사 현장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회의가 정례화되고 그 규모와 다루는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회의를 뒷받침해줄 사무국이 서울에 설치되었다. 한국이 역내 가교국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 동(북)아의 핵심 3국이 정상회의체를 발족시키고 제도화시켜가고 있다는 사실은 동(북)아시아 안보영역을 포함해 역내 광범위한 이슈들에 대해 대화하고 공동대응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협력체를 구축해나가고 있다는 데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이 글은 차기 정부의 외교·안보 전략에 대한 이수훈 경남대 교수의 제언 7편 중 다섯 번째 글이다. 이 교수는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에 앞서 진보·개혁 진영의 대외 전략이 새롭게 마련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나라당의 새 정강정책에 대한 비판(1편)을 시작으로 남북관계(2편), 한미관계(3편), 한중관계(4편), 동북아 협력 문제(5편), 중견국가론(6편), 국제협력 외교(7편)를 논한다. 필자는 현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노무현 정부 당시 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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