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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이 파악한 '중국 문명' 조감도, 그 골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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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이 파악한 '중국 문명' 조감도, 그 골격은? [프레시안 books] 마르셀 그라네의 <중국 사유>
마르셀 그라네의 <중국 사유>(유병태 옮김, 한길사 펴냄)가 최근에 번역되었다. 먼저 이 책을 본 소감 두 가지부터 말해보자.

하나는 병사가 땅위에서 총칼을 가지고 한 치의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적과 다투는 각개전투가 아니라 전투기를 이용해서 적지에다 정밀 타격을 하여 적의 예기를 꺾고서 전투에 나서는 공중전을 연상시킨다. 다른 하나는 외국 서적 중에 늦게 쓰인 책이 먼저 번역되고 일찍 쓰인 책이 늦게 번역되는 것을 보면서 뒤바뀐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바람을 품어본다.

마르셀 그라네(1884~1940)는 일반 사람에게 낯설지 몰라도 적어도 구미에서 동양학을 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학자들 중의 한 명이다.

그라네는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1985년/국역 1996년)의 벤자민 슈워츠(1916~1999년), <도의 논쟁자들>(1989년/국역 2001년)의 앤거스 그레이엄(1919~1991년), 자크 제르네(1921~)의 <몽골 침략 전의 중국인의 일상생활>(1959년/국역 1995년)보다 선배이지만 그의 주저가 늦게 번역되었다. 거꾸로 되었더라면 세 사람의 책을 읽기에 훨씬 수월했을 텐데 말이다. 이 책의 번역으로 인해 그라네와 활동 시기가 겹치는 앙리 마스페로(1883~1945년)의 <고대 중국>(1925년/국역 1995년) 등을 함께 읽을 수 있게 되어서 무척 다행스럽다.

중국의 다양한 사상의 차이를 알고 싶거나 사상가들이 최상의 진리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는 것을 기대한다면 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낫다. 또 서양 사람이 쓴 만큼 동서양 비교 철학을 기대한다면 역시 이 책을 들추지 않는 편이 좋다. 그렇지 않고 책을 본다면 "이게 아니잖아!"라는 말을 하기 십상이다.
▲ <중국 사유>(마르셀 그라네 지음, 유병태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이 책은 기획 의도가 문명사에 있는 만큼 두 가지 기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학술사나 사상사를 쓴다면 당연히 작은 차이도 의미를 부여해서 크게 말해야 한다. <중국 사유>는 그게 아닌 만큼 작은 차이에 현미경을 들이대지 않고 커다란 틀에 망원경을 대고서 같은 점을 훑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작은 차이를 무시한다고 투덜거려도 소용이 없다. 너무 불만을 갖지는 말자.

한국에서 전라도·경상도의 차이를 목청껏 외쳐도 외국 나가면 똑같은 한국 사람이고, 동아시아에서 역사와 영토 문제로 한·중·일 세 나라가 으르렁거려도 외국 나가면 별 차이가 없는 엇비슷한 아시아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가!

잠깐 이 책 출생의 뒷이야기를 알아보자. <중국 사유>는 총서 <인류의 발전>(전4권) 중 네 번째 책이다. 앞의 세 권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 문명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예외적으로 유럽의 외부로서 중국 문명을 다루고 있다. 문명을 다루면서 제목은 왜 '사유'로 했을까?

이 책에서 말하는 '사유'는 중국 사람들이 고유한 방식으로 정신 활동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전제하는 서양 사람과 구별되는 특징으로서 전통의 의미에 가깝다. 즉 사유는 개별 주체가 진리를 찾아가는 길도 세계를 새롭게 조직하는 인식도 아니라 집단적 자아, 즉 중국인이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밟아가야 하는 지도 또는 공통 지반이다.

그라네는 이 지도의 거점으로 1장에서 언어와 문자로 드러나는 사유의 표현을 다루고, 2장에서 시간과 공간, 음양, 수(數), 도(道) 등의 주개념에 대한 오해를 벗겨내고, 3장에서 대우주, 소우주의 세계 체계를 다루고, 마지막 4장에서 전국 시대에서 한제국의 초기에 이르는 다양한 학파를 스케치하고 있다.

책이 촘촘하고 방대하여 내용을 일일이 소개할 길이 없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문명사의 관점에서 본 '중국 사유'의 독특성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잊기 전에 먼저 이 책의 미덕부터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책이 쓰일 당시 세계 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자존심이 많이 깎였지만 유럽은 근대 문명을 열어서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회의하지 않았다. 그 연장선에서 유럽인은 비유럽 지역의 사람살이와 문명을 모두 유럽의 기준으로 재단하면서, 함량 미달만큼이나 신비적이니 신화적이니 비논리적이니 하는 차가운 평가를 내렸다(44, 97쪽). 더 나아가 원시적 사고니 주술적 사고니 하는 말들을 여과 없이 내뱉었다.

오늘날은 이를 두고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그렇게 낯설지 않고 또 문화 상대주의의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다. 그라네는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창하는 흐름 속에서도 중국 내부의 시각으로 중국을 들여다보자고 주장한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비유럽의 문명을 유럽으로 환원하지 않아야 한다. 아울러 왜 이것이 없느냐라는 무의미한 비교 연구를 해서도 안 된다. 또 중국의 사유를 서양 철학의 용어로 번역해서 읽는 관성도 반성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사람은 자신이 한 말'들'의 일관성을 지키려고 하고 뭔가 약속하면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중국 사람만이 아니라 좁게는 동아시아 넓게는 세계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철학에서 유독 언행일치, 즉 말과 행동이 일치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그리하여 말과 행동이 다를 경우 공적 임무를 맡기에 부적당하거나 사람답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 인식의 밑바탕에는 단순히 "말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좋다"를 넘어서서 "말은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고가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말은 행동과 구별해서 독립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행동으로 드러나야만 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행동으로 드러날 수 없는 말, 행동과 무관한 말은 순수한 지적 사고이지만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라네는 중국의 이러한 언어관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언어는 무엇보다도 행동을 끌어내는 데 목적이 있다." "중국 단어는 관념을 가리키기 위한 기호와는 무관하며, 추상성과 일반성이 최대한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하는 개념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53쪽)

이로써 중국인은 이론적 사고와 순수 지식보다는 실천적 사고와 효용성에 중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철학을 많이 알거나 적게 알거나 '음양'이 중국을 넘어서 동아시인들의 공통 언어이자 사유 체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라네는 이를 "중국 철학은 음양 개념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단정했다(127쪽). 그는 나아가 "주석자나 서구의 연구자들은 중국의 상징들, 예컨대 음양을 서구 철학자들의 확정된 언어에서 빌려온 용어들로 섣불리 규정지으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127쪽). 그러한 실례로 음양을 '힘' 또는 '실체'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들 수 있다.

그라네는 기존의 음양 이해가 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역경> '계사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에 주목했다.

"한 때(쪽)는 음, 한 때(쪽)는 양, 이것이 곧 도이다." (一陰一陽之謂道)

훗날 성리학자들은 이 구절에 많은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평심으로 쳐다보면 실체나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변이, 주기적 변화, 상호 융통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실례는 "우선은 빛, 다음은 어둠! 또는 이쪽은 빛, 저쪽은 어둠!"의 일명일회(一明一晦)만이 아니라 청탁 등 수많은 예시를 찾을 수 있다.

'계사전'을 통해서 그는 중국의 "세계에는 상호교대와 상보적인 두 양상의 공조에 따른 총체적인 순환 질서(도(道), 변(變), 통(通))에 부응하지 않는 어떠한 현상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138쪽). 이 결론은 통상적인 사상사에서 도달하는 마지막 귀결이다. 하지만 그라네는 장기 지속과 생활사를 강조하는 아날학파의 세례를 받은 만큼 이 결론을 현상의 종합에 그치지 않고 다시 성축제의 생활양식과 연결시킨다.

고대 중국의 남성과 여성은 성별과 직능의 차이로 인해 경합 관계의 단체처럼 양립했다. 각 집단은 서로 뒤섞이지 않는 시공간을 나누어서 일을 분담했다. 예컨대 여성은 겨울에 베를 짜면서 노동을 하는 반면에 남성은 농사가 재개되기까지 휴식을 취했다. "봄이면 사람들은 마을의 출입문을 열고, 농부들은 여름 농사를 위해 들판으로 떠났다." 이때 "양은 문이 열린 모습을 불러오고 생식과 생산을 그리고 발산하는 힘을 환기시킨다." "겨울이면 마을의 출입문은 닫힌다. 겨울은 닫힌 문을 상징으로 하는 음의 계절이다." (150쪽)

이를 통해서 그라네는 음양을 자연철학의 힘이나 철학의 실체로 보는 해석을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음양은 "사회 조직의 두 구성체 간에 분할된 역할 또는 속성 그 자체이다." (155쪽) 더 나아가 중국 사유는 음양을 초월하거나 추상화하지 않고 실체화하지도 않는다.

전적으로 효능성을 추구하는 중국인의 사유는 조응과 대립의 논리 속에 형성된 상징 세계를 떠나지 않으므로 행동과 인식은 상징 세계를 작동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상징 세계를 작동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서로 당기거나 밀어내는 일련의 한 쌍의 상징을 알아야 한다"(155쪽)는 것이고 그 한 쌍이 바로 음과 양인 것이다.

이 이외에도 중국 사유에서 수는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양(量)의 개념으로 고려되지 않았다(160쪽). 그 결과 수는 상징적 가치로 쓰이었지만 균질적 단위로 나누는 사고로 진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국 사유>의 결론에 해당되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질서, 총체, 효능성 이 세 가지 개념은 서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이루며 중국인의 사유를 관장한다. 중국인은 자연을 나누어 구분 짓는 데 유념하지 않았다. 각 실재는 모두 본래 총체적이며, 우주 속의 모든 것은 곧 우주와 같다." (342쪽)

이 책은 폭넓은 분야를 다루는 방대한 성과를 한국어로 옮긴 노작이다. 번역어를 보면 통상적인 학계의 관행을 벗어나는 경우나 오류가 많아서 편안한 책읽기를 방해하는 곳이 눈에 띈다. 프랑스 말을 한국어로 옮기기는 했지만 사실과 다르거나 너무 주관적이어서 불편했다.

책의 앞부분을 뒤적여서 몇 가지를 찾아보았다. 잘못의 사례를 든다면 <장자>의 '설검편'이 '자객편'(25쪽), 제후의 죽음을 나타내는 훙(薨)이―발음이 고인데―훙(薧)(58쪽), 문헌의 신뢰성과 확실성이 진정성(authenticity)(69쪽), <회남자>의 편명은 훈(訓)인데 장(74쪽), <초사>에 수록된 시가로 예혼(禮魂)이 없는데도 제시하고(79쪽), 은대의 창시가 성탕(成湯)이 승탕(勝湯)(100쪽) 등이 있다. 어색한 사례를 든다면 집수(26쪽), 집성(集性)적(37쪽), 묘사조동사(55쪽), 환술가(幻術家)(70쪽), 악학가(樂學家)(128) 등이 있다.

최근 중국은 세계 경제에 일본을 제치고 G2 국가가 되었다. 오늘날의 중국은 이 책에 다룬 한제국 초기를 넘어서 청제국의 황제 체제가 끝나고 다시 사회주의 혁명을 거쳐서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다.

아날학파의 장기 지속에 따른다면 혁명을 통해 구체제의 종식과 신중국의 건설이 일어났더라도 변하지 않는 심층이 있다. 이 심층이 있는지 없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이 책의 출간을 기회로 그라네의 <중국 고대의 축제와 가요>를 비롯해서 동양학에 대한 프랑스어권의 성과를 일별했으면 좋겠다. 뭔가 빠진 듯하지만 내버려두었던 인식의 그물망을 얼마간 메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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