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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와 '꼴통'이 만든 대한민국, 그 속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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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와 '꼴통'이 만든 대한민국, 그 속살은? [2010 올해의 책] <좌우파 사전>
프레시안 books' 송년호(21호)는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 서평위원이 의견을 모아서 선정한 두 권의 '올해의 책'(<삼성을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외에도 8명의 서평위원이 나름대로 선정한 '나의 올해의 책'을 별도로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근대 학문이 서양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학술 용어도 대부분 서양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학술 용어는 대부분 동아시아 삼국 중 근대화가 앞장섰던 일본 '난가쿠(蘭學)'의 성과이다. 이 과정에서 자국의 고유어보다 한자어가 환영을 받았다. 아마도 한자는 새롭게 헤쳐모이기가 쉽고 한 두 단어로 의미를 전달하기 있기 때문을 주목을 받았으리라.

오늘날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서양의 학술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까를 두고 두 가지 풍경이 있다. 하나는 용어의 기원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실제로 쓰이는 용례를 주목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전자의 목소리가 후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개념 하나를 두고서도 무식하다니 뭘 제대로 모른다는 소리가 쉽게 나온다.

예컨대 신(god)을 말하면 동아시아에는 유일신 개념이 없으므로 신 앞에 자연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거나 신적 존재와 같은 식으로 쓰여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실체(reality)를 말하면 동아시아에는 자기 원인을 가진 자족적 존재가 없으므로 실체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아예 본체(本體)라는 말을 만들어서 쓰기도 한다. 아니면 '시뮬라크르'처럼 역어 없이 원어를 발언대로 쓰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개념이 발원지에서 쓰이는 대로 똑같이 쓰여야 한다"는 규범적인 목소리가 유독 강하다. 이런 관행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념을 자유롭게 쓰기보다 뭔가 눈치 보게 만들고 주눅 들게 만든다. 그래선지 지난 날 '막 돼 먹었다'는 말을 제치고 요즘 '개념이 없다'는 말이 최상의 욕설(비난)이 되었다.

한국에서 학문과 일상을 넘나들면서 개념의 오남용으로 단골 시빗거리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 선뜻 대답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빨갱이'와 '좌파'·'우파'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1980년대 분석철학이 나름대로 맹위를 떨칠 때 왜 '빨갱이'를 언어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느냐고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정작 따지고 들어가면 뭔가 특별한 기원도 없고 신묘한 의미도 없는 것이 학문만이 아니라 사회·정치 분야에서 얼마나 싸늘한 칼바람을 일으켰던가?

우리는 붉은 악마 덕분에 '레드'에 좀 느긋해졌지만 아직도 빨갱이라는 말에 정색을 하게 만든다. 지난해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 : 여순 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선인 펴냄)이 나왔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환호작약했다. 그렇게 말로만 떠들던 빨갱이가 어떻게 생겨나서 사람을 때려잡게 되었는지 촘촘한 글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가 정확하게 쓰였는지 규범적으로 따지기보다 실제로 어떻게 활용되고 거래되었는지 내막을 알 수 있었다.

▲ <좌우파 사전 :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두 개의 시선>(구갑우 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이번에 나온 구갑우 등이 쓴 <좌우파 사전>도 <'빨갱이'의 탄생>에서 느꼈던 기쁨을 또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이 말을 들은 지 10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이들을 '낙인'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수구 꼴통, 급진, 중도, 보수, 통합 등 숱한 유사 짝퉁 용어를 만들어 한편으로 불도장의 세례를 피하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 상대를 불도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정작 좌파와 우파의 프리즘으로 한국의 현실을 촘촘하게 들여다보는 데에 게을렀다.

하지만 너도나도 붉은 악마의 티셔츠를 입었듯이 <좌우파 사전>도 무거운 좌파와 우파를 사용하면서 국민주권과 대의제를 포함해서 22가지 의제를 설정해서 아주 경쾌하게 한국 현실을 세로로 끊어보고 가로로 끊어본다. 좌우를 종횡으로 엮다보니 한국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들추어보게 하고 나아가 미래를 상상해보게 만든다.

인문·사회과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이나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의 성과에 대해 놀라기도 하고 반기기도 한다. 정작 빨갱이와 좌파·우파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만들어낸 전통'과 '상상해낸 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약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국에서 서양의 학술 용어(개념)의 옷을 매끈하게 잘 차려입은 '모던 보이'나 '포스트모든 걸'이 나올지언정 홉스봄과 앤더슨이 나오기가 어렵다.

두 사람이 한국에서 나오기를 바란다면 서양에 기원을 둔 여러 가지 학술 용어를 규범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두 눈을 부릅뜰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실제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주목하고 그런 성과에 눈과 귀를 열어야겠다. <좌우파 사전>은 600쪽이 넘는 꽤 두툼하지만 눈을 비벼가면서 읽을 만하다. 이로써 한국의 현실을 이론으로 재구성하고 다시 이론으로 현실의 인식과 변화를 인도하여 '만들어진 한국 근대'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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