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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고갈' 카운트다운! 30년이면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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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고갈' 카운트다운! 30년이면 바닥! [변방의 사색]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의 <장기 비상시대>
30년 뒤에는 석유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조건들 중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지구상에 매장된 석유는 2조 배럴로 추정된다. 지난 100년 동안 그 중 절반을 2000년~2010년 무렵에 이미 다 써버렸다는 것이 믿을 만한 과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세계에서 소비되는 석유는 연간 270억 배럴 가량 되는데, 이 추세를 유지한다면 37년 뒤에 석유는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중국과 인도의 급격한 산업화를 생각하면 그 시점은 더 당겨질 가능성이 높다. 남은 석유의 60퍼센트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 국가들과 극렬하게 대립하는 이슬람권 국가에 매장되어 있다. 미국은 남은 석유의 고작 3퍼센트만 보유하고 있고, 이미 1970년대에 석유 생산의 정점을 지났는데도 여전히 세계 석유의 25퍼센트를 소비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을 전혀 엉뚱하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절반이나 남았고, 40년이나 남아있지 않느냐면서. 다른 문제가 있다. 이미 써 버린 절반의 석유는 '제일 얻기 쉬웠던 절반, 가장 질이 좋고 가장 경제적이고 값싸게 정유할 수 있었던 절반'이다. 나머지는 북극이나 깊은 바다 밑에 숨어 있고 불순물이 많아 정유하기도 어려워 얼마나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년 미국의 석유회사 BP가 멕시코만에서 일으킨 사상 최악의 해상 오염 사고는 시추선이 바닷속 1500미터 해저에서 시추를 시작하여 4000미터를 더 뚫고 내려가 5400미터 지점에 있는 석유를 퍼 올리다가 생긴 사고이다. 인간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보니 사고 수습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위험천만한 깊이까지 파내려 가야 했단 말인가. 세계 최대의 유전이라는 사우디의 가와르 유전에는 2004년 시추한 석유에 바닷물이 90퍼센트나 섞여 있었다 한다. 석유를 이미 많이 뽑아내다 보니 유전 안에 빈 공간이 생겼고, 압력을 유지하기 위해 바닷물을 투입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이들을 보면 석유 종말 사태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충분히 느끼게 된다. 37년 뒤가 아니라 훨씬 더 이른 시점에 석유 시대는 종말을 고할 수 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하기 싫은 것이 있다. 석유가 없으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일상생활은 단 1초도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이 석유다. 도회의 거리는 모두 석유로 만들어져 있고, 석유로 움직인다.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은 음식물들 중에 석유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될 것인가.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제외한 모든 음식물은 석유가 길러주었고, 석유로 우리 식탁까지 이동해 왔다. 밥 먹고 입가심으로 까먹는 밀감은 제주도에서, 바나나와 파인애플은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필리핀에서 왔다. 비료도 농약도 모두 석유가 만들어주었다. 200년 전 세계 인구는 10억이었는데, 불과 200년 사이 70억을 넘어섰다. 60억은 석유가 있었기 때문에 먹여 살릴 수 있었던 인구다. 그런데 이 석유가 앞으로 한 세대밖에 지탱할 수 없다니.

칼 구스타프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지 못한다." 석유 고갈과 관련된 사실들은 너무 많은 진실이면서, 또한 너무나 자명한 진실이다. 지난 100년 동안 인류는 수 억 년에 걸쳐 조류(藻類)가 모아두었던 태양 에너지를 흥청망청 써버렸다는 사실, 지금 우리는 사실상 아무런 준비도 대비책도 없다는 사실, 그 세계에서 벌어질 일들을 꼼꼼하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있는 책이 있다.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의 <장기 비상시대>(이한중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라는 책이다. 이미 몇 군데 매체에서 서평으로 다루었지만, 이 중요한 책이 그다지 널리 읽히는 것 같지 않다. 이 책은 전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마땅한데도 말이다. <장기 비상시대>야말로 <제3의 물결>이니 <부의 미래> 따위 지식 보따리장수가 벌여놓은 약장사 판 같은 미래 예측서와는 질적으로 다르지만, 너무나 현실적이고 중요한 사실들을 담고 있기에 더 외면 받는 것 같다.

어떤 것이 망상이며 어떤 것이 현실주의인가. 정보화 사회가 인간을 육체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인간을 예술과 지적 활동으로 고양시켜 주리라는 <제3의 물결>이 현실적인가, 아니면 40년 뒤 인간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며, 노새로 밭을 갈고, 천연 재료로 손수 집을 짓고 자전거를 타거나 걷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진단이 더 현실적인가. 그러나 <장기 비상시대>에 대한 이러한 침묵에는 나 같은 필부가 방방 뜨지 않아도 이미 다들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다만, 생각하는 것이 싫고 두려운 것이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은 정전도 안 되고, 그럭저럭 자동차도 굴릴 수 있고, 마트에 가면 값싼 물건들은 여전히 넘쳐 나니, 이런 나날들이 계속될 거라고 믿고서, 그냥 뭉개버리는 것이리라.

유물론과 석유환원론

▲ <장기 비상시대>(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지음, 이한중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갈라파고스

아니, 뭉개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이런 현실적인 진단에 대해서는 종말론의 딱지를 붙이고, 순환적 농업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낭만주의니, 신비주의니 하는 소리들을 한다. 내가 보기에 쿤슬러의 이 책에는 일점일획의 낭만주의도 없고, 신비주의의 그림자조차 없다. 오히려 쿤슬러는 근대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철저히 유물론적인 태도를 굳게 지키고 있다. 물질적 경제생활이 상부구조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 이 토대 중의 토대가 바로 석유라는 마법의 자원이라는 사실을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석유 환원론'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이러한 철저한 유물론을 반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야말로 문학적 낭만주의와 종교적 신비주의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를테면, 그가 1980년대에 시작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그는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이 전략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알래스카와 영국의 북해에서 새로운 유전이 발견됨으로써 값싼 에너지가 확보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즉, 국내 제조업을 제3세계로 옮기고, 저임금 노동력을 해외에서 유입하고, 제조업에서 풀려난 노동력을 서비스 중심의 비정규 노동으로 재편하고, 비교우위론을 바탕으로 제3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전술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물자와 인력의 이동을 가능케 하는 값싼 석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값싼 석유는 지리상의 비교우위를 무효화했다. 그래서 중국산 셔츠와 중남미산 커피가 수 천 킬로미터를 이동해 와서는 월마트에서 국내산보다 훨씬 싼 값으로 팔릴 수 있었던 것이다.

금융 경제의 발호 또한 마찬가지다. IT혁명으로 추동된 정밀한 금융공학의 힘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금융 경제의 바탕에는 그동안 석유가 이끌어온 '무한한 성장의 신화'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실물 경제에서 이탈하여 추상적인 숫자의 거래가 되어버린, '돈 놓고 돈 먹기'식의 카지노자본주의는 어찌됐건 이 체제가 끝끝내 망하지 않고 뻗어나가리라는, 어떻게든 수익이 발생하고 이어지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은 값싼 석유가 그동안 전 세계적으로 구축해 놓은 집단적 환각의 체제였다.

석유는 기계를 만들었고, 기계가 근대 산업 문명을 일으켰다. 산업 문명은 세계를 기계식으로 재편했고, 결국 파시즘을 낳았고, 끔찍한 살육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연쇄의 출발에 석유가 있는 것이다. 독일의 석탄과 영국의 석유가 맞붙은 1차 세계대전의 승자는 석유 쪽으로 먼저 말을 갈아탄 영국이었고, 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의 덩치를 키운 것도 석유였고, 거기서 독일과 일본은 석유 공급이 끊김으로써 결정적으로 패했다.

석유는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유목생활을 하던, 가부장적이지만 꽤 시적이고 품위 있는 영성을 갖춘 종교인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안락과 풍요를 던져주었다. 여기서 배제된 다른 한편은 가난과 모멸을 겪으며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지옥도를 만들어냈다. 이 책에 소개된 사우디의 현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세계 최대의 산유국으로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 하에 있는 이 나라를 지배하는 세력은 3만 명에 이르는 알 사우드 가문인데, 왕자만 수 천 명이란다. 이들은 매달 2000만 원에서 3억 원에 이르는 수당을 받고, 왕자 중에 압둘 아지즈라는 이는 5조원을 들여 이슬람 성지들을 축소하여 배우들이 공연하는 개인 테마 파크를 만들었단다. 돈이 워낙 많으니 다른 물질생활에 대한 관심이나 투자는 약한 대신 이슬람 신학교가 엄청 많다고 한다. 거기서 근본주의적인 신학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이 타락한 왕조에 대한 불만을 서구 기독교 세력에게 돌리려는 목적이란다. 공직자의 70퍼센트, 민간 일자리의 90퍼센트는 외국인들이 맡고 나머지 국민들에게는 석유가 떨어질 날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연명하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서글픈 농담을 한단다. '내 아버지는 낙타를 탔고, 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내 아들은 제트기를 탈 것이고, 내 아들의 아들은 낙타를 탈 것이다'라고.

있잖아요…… 우리한텐…… 기술이…

물론 석유고갈에 대한 이러한 경고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이 시대의 한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응은, 결국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쿤슬러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구글 본사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겪은 일을 들려준다. 구글의 본사는 동화에 나오는 '꿈의 동산' 같은 곳이었던 모양이다. 쉰 걸음 정도 간격을 두고 다과를 잔뜩 쌓아두고는 아무 때나 집어서 먹을 수 있게 되어 있고, 당구대나 테이블 축구, 비디오게임기와 마사지 소파가 종류대로 어디든 널려 있었다 한다. 직원들 절반은 스케이트보드에 푹 빠진 사람들처럼 자유분방한 복장이고. 이런 곳에서 쿤슬러가 '장기 비상시대'를 떠드니 이들이 견디지 못한 것은 자명한 이치다. 강연이 끝나니 몹시 흥분한 청중 몇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더듬거리며 울부짖었던 모양이다. "있잖아요…… 우리한텐…… 있잖아요 …… 기술이 있거든요!"라고.

세계 최첨단의 기술 엘리트들이 보인 반응이라 좀 극적이긴 하지만, 아마도 이런 반응은 누구든 비슷하리라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술'이 우리로 하여금 노새와 함께 밭을 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다. 오늘날 '기술'에 대한 믿음은 인류가 지닌 세속신앙의 실체다. 그러나 쿤슬러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기술이 우리를 구원해주리라는 믿음이, 석유 시대가 끝나면 대체 에너지가 '익일 특급' 우편물처럼 제시간에 재깍 맞춰 배달될 것이라는 낙관이, 실은 아무런 근거 없는, '화물 숭배'와 같은 것임을 밝힌다.

18세기 유럽인들이 범선에다 온갖 놀라운 화물(망원경, 대표, 주머니칼 따위)을 싣고 와서 섬 지역 원주민들을 놀라게 했다. 유럽인들은 떠났는데, 원주민들은 구할 수 있는 모든 식물재료를 이용해서 그들이 보았던 것과 똑같은 범선을 만들어 놓고는 다시 유럽인들의 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남양군도에서도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본 비행기를 유인하기 위해 B-28 폭격기 모형을 산꼭대기에 세워두고, 활주로를 닦아 놓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쿤슬러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 원주민들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미 사라지고 다시 오지 않을 '화물'의 형상을 만들어놓고 재림을 기다리는 모습이, 석유가 사라지면 쓸모없는 존재가 될 기술공학이 새로운 에너지원을 데리고 재림하리라는 믿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석유 시대의 기술적 승리를 이미 우리는 충분히 지켜보았던 것이다. 증기 기관은 탄광에서 석탄을 캐내는 과정에서 발명되었다. 그것이 기계 산업을 추동했고, 대공장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었다. 이 공장에 조명을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석유가 사용되었고, 그러면서 석유에 내장된 놀라운 힘과 무궁무진한 변환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이렇게 성립된 석유화학이 20세기의 석유문명으로 이어졌다. 이 석유의 엔트로피를 끝까지 끌어올리면 끝내 그 정점에서 인류는 창조력을 발휘하여 다시 새로운 대체물을 발견할 것이라는 것이 쿤슬러가 '화물 숭배'라고 표현한 오늘날 기술낙관론의 실체다.

쿤슬러는 에너지와 기술을 혼동하지 말자고 한다. 석유 시대는 지질상의 변화가 베풀어준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석유는 쓰면 없어지고, 재생할 수 없다. 기술공학이란 이 석유를 이용하는 하드웨어일 뿐, 연료 자체가 아니다.

쿤슬러는 지금 이야기되는 재생가능 에너지는 지속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밝혀준다. 수소에 희망을 거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은 몽상이다. 수소로 만들어내는 에너지보다 수소를 분리해내는데 드는 에너지가 더 많다. 저장도, 보관도, 이동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수소를 분리해내는 데 들어가는 거대한 에너지는 핵 발전이 없으면 감당할 수 없다. 결국 수소 경제는 핵 산업의 위장술에 불과하다.

물론 풍력, 태양광, 수력 에너지는 훌륭한 대체 에너지이지만, 이 또한 화석 에너지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풍력 터빈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광물 자원을 수송해 와야 하며, 태양광 발전을 위한 연료 전지는 모두 석유화학 제품이다. 석유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40년 뒤에는 이러한 기술 또한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대단위 수력 발전은 댐 안에 계속 퇴적물이 쌓이기 때문에 몇 십 년 이상 지속될 수 없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칠면조 내장, 타이어 따위 쓰레기들에서 석유를 추출해내는 TDP라는 기술도 이야기되지만, 미국에서 매일 나오는 모든 쓰레기를 석유로 전환해도 1일 석유 소비량의 5퍼센트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만약 석유 소비량을 95퍼센트까지 극단적으로 줄이면 쓰레기로 그 5퍼센트 석유를 자급할 수 있지 않겠냐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석유가 만들어 주는 이 쓰레기 또한 95퍼센트 수준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기술은 열역학법칙이라는 자연의 섭리에 전적으로 종속된다. 이 기술들 상당수는 석유 없이는 무용지물이며, 열역학법칙을 거스르며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지구는 닫힌 계이며, 에너지는 다만 낮은 엔트로피에서 높은 엔트로피로 옮겨갈 뿐이다.

우리의 선택, 거꾸로 갈 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은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우리의 현명한 선택이 결집되었다면 전환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속단할 수 없는 문제이다. 어쨌든 인류는 모든 선택의 순간에서 최악의 선택만을 이어왔다는 것, 우리의 삶을 지속할 가능성을 서서히 잃어가는 방식으로 이끌려온 것만은 분명하다.

거꾸로 가야할 때에는 거꾸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소농'과 '농촌 공동체'를 화두로 일생토록 저술과 실천 활동을 해온 천규석 선생의 책 제목처럼 '돌아갈 때는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농의 삶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농사를 짓고, 전통적 삶의 기술을 복원하고, 지역 공동체를 되살리는 자립적 순환 사회로의 전환 외에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사실상 없다.

100년 전이던 1911년 시절의 사람들은 불과 3년 뒤 250만의 군인이 전사하는 끔찍한 전쟁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 30년 뒤 아우슈비츠에서 수백만의 인간을 가스실에서 처형하는 전대미문의 대 살육이 자행될 지도 몰랐을 것이다. 2011년, 앞으로 30년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석유 시대의 자본을 대표하고, 구시대적 삶의 관성이 집약된 국가는 결국 100년 전처럼 남겨진 한정된 자원을 두고서 전쟁으로 내달릴 것이다. 여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정치적 노력은 결국 오늘날 성장 중심의 경제, 화석 에너지에 바탕을 둔 중앙 집권적 산업 경제를 근본에서부터 거스르는 세력, 근본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세력이어야 한다.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너무나 미약한 이 가능성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이를테면 지금 녹색당을 준비하는 세력에게만 희망을 걸 수 있는 과제인 것이다.

결핍이 가져다 줄 희망

그러나 석유시대의 종말은 이런 암울한 가능성만을 예비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체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8년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아이들과 함께 책 읽고 토론하고 글도 쓰는 동아리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 해에 남부지방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 '매미'를 기억할 것이다. '매미'가 지나가고 난 뒤 수업 들머리에 '생활 나눔'이라고 해서 지난 주간의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런데 '매미'가 지나가는 그 시간에 서로들 아주 비슷한 체험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풍이 밀양 땅에 도착한 무렵부터 곧장 전기가 끊어졌는데, 미리 준비해 둔 촛불로 지낸 그 하룻밤이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무척 평화롭고 좋은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바깥에는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어떤 아이는 평소 무뚝뚝했던 아버지로부터 가족들을 향한 따뜻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다른 어떤 아이는 사이가 좋지 않은 식구들과 맺힌 것을 풀었고, 또 어떤 아이는 촛불을 켜놓고 홀로 일기를 쓰면서 태풍이 지나가는 밤을 지새우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전깃불도 컴퓨터도 음악도 책도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되니, 결국 식구들이 촛불 아래로 모여들었고, 그 자리는 알 수 없는 따뜻함과 경건함이 내내 흘렀다는 것이다.

우리의 밤을 밝혀주던 이 휘황한 불들은 곧 꺼질 것이다. 그러나 결핍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모일 수 있을 것이며, 얼굴을 마주볼 수 있을 것이며 스스로와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태풍이 몰아치는 바로 그 현장에 집도 절도 없이 내동댕이쳐진 것이 아니라, 어떤 울타리 안에 있었을 때 그런 시간이 가능했듯이, 점점 다가오는 태풍과 정전의 예감 앞에서 그래도 촛불을 켜서 같이 둘러앉을 수 있는 이들을 하나 둘 엮어 세우는, 태풍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울타리를 세우는 일이 우리들 실천의 목표가 되어야 하리라.

석유에 중독된 삶, 소비와 안락 속에서 내쳐진 인간의 품위, 만연했던 우울증과 비만, 일탈과 폭력. 석유 이후의 세계에서 전쟁과 추락의 격랑이 기다릴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 이 거대한 전환의 시대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디, 이 모든 일들이 너무 늦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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