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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네 혀가 위험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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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도로시, 네 혀가 위험하구나! [변방의 사색] 로버트 콜스의 <환대하는 삶>
오늘은 1년간 끌어온 이 연재의 마지막 순서다. 나는 이 연재 글 대부분을 우리 반 교실에서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썼다.

어차피 수능 성적표 한 장 받고 나면 깡그리 버릴 책들을 부여잡고 뭘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숨죽여 공부들을 하는지. 이 아이들을 앞에서 바라보며 나는 지금 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세상을 알려 준다는 생각으로 이 연재를 이끌어왔다. 그래서 나중에 세상 일이 궁금해서 검색하다가 '앗, 우리 담임이 이런 주제로 글도 썼군' 하면서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마지막이 될 오늘은 '환대의 집'이라는 구빈원을 설립하고, 가톨릭 노동 운동을 이끈 위대한 실천가 도로시 데이의 삶과 사상을 다룬 책 <환대하는 삶>(로버트 콜스 지음, 박현주 옮김, 낮은산 펴냄)에 대해 써 보고자 한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도로시 데이에 대해 공부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결국 이 시대가 다시 도로시 데이가 가톨릭 노동자 운동과 '환대의 집'을 시작했던 1930년대와 같은 경제의 전면적 붕괴와 배제된 사람들의 행렬, 식량 공황과 전쟁 등의 비참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공황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더 나아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에 우리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설 수밖에 없다는 분명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선 그 시대를 가장 철저하게 살았던 정신으로부터 무언가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런 맘으로 도로시 데이를 붙잡았던 것이다.

▲ <환대하는 삶>(로버트 콜스 지음, 박현주 옮김, 낮은산 펴냄). ⓒ낮은산

이 책은 젊은 시절 도로시 데이를 만나 일생토록 교류한 정신의학자이자 전기 작가인 로버트 콜스가 그와 나눈 오랜 대화를 바탕으로 써 내려간 평전이다.

이 책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대목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도로시 데이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디킨스 등 19세기 작가들을 사랑했지만, 동년배의 이탈리아 작가 이그나치오 실로네의 <빵과 포도주>를 특히 좋아했고, 거기에 나오는 한 일화를 일생토록 생각했다. 이그나치오 실로네 또한 도로시 데이처럼 사회주의자였으나 정치에 실망했고,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으로 살았다. 이 일화는 아마도 실로네의 자전적 체험이 녹아있는 듯하다.

파시스트 치하의 이탈리아에서 혁명 운동가로 살다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던 주인공 피에트로 스피나는 돈 파올로라는 사제로 위장해서 암약한다. 그 자신 사회주의자이지만, 정치적 설교에 넌덜머리를 내며, 무엇보다 진실한 인간을 대면하기를 바란다. 성직자 신분으로 심방을 다니던 어느 날 "맨발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키가 크고 마른" 한 젊은이를 만난다. 젊은이는 초라한 판잣집에서 살고 있다. 스피나는 젊은이와 함께 판잣집으로 가서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꿈을 격찬하며" 잠시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도로시 데이가 일생토록 되풀이해서 읽었다는 다음 구절을 보자.

그 젊은이는 약간의 옥수수빵을 자르고, 토마토 두 알과 양파 한 알을 얇게 썰어 사제에게 내놓았다. 부어 있고 상처 자국이 남은 젊은이의 두 손에는 거친 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가 빵을 자른 칼은 온갖 용도로 다 썼던 것처럼 보였다. 돈 파올로는 두 눈을 감고 빵을 삼키려고 애썼다.

"어떤 나라가 있어요." 사제가 말했다. "정말 좋은 나라예요. 거기서는 시골 농부가 도시 노동자와 행동을 함께 하지요." 그러는 사이, 여관 주인 마탈레나는 숙박인을 찾아 이 집 저 집 다니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사제를 발견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된 지 한 시간이나 되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돈 파올로가 말했다. "여관으로 돌아가세요. 나는 내 친구와 아직 할 얘기가 많거든요."

마탈레나가 물었다. "그런데 저 사람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농아여서 손짓과 몸짓밖에는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모르셨어요?"

그 젊은이는 자신의 낡은 집 문지방에서 사제 옆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돈 파올로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의 두 눈에 서서히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았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여관으로 돌아가세요. 난 배고프지 않으니까요." 사제가 마탈레나에게 말했다.

낡은 집 문지방에 앉은 두 남자는 이제 외로이 둘만 남게 되었다. 말하는 능력을 부여받은 한 사람도 이제 침묵을 지켰다. 이따금 그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날이 어두워져 저녁이 되었다가, 밤이 찾아들었다. 돈 파올로는 한두 차례 기침을 했다. 귀머거리이면서 벙어리인 남자가 일어나더니, 짚으로 된 자신의 침상에 덮여 있던 담요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손님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때 돈 파올로는 이 남자가 아침 일찍 일어나 일하러 나가야 한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는 일어나 악수를 하고 잘 자라는 인사를 했다.

도로시 데이는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울음을 멈출 길이 없었다고 했다. 그것은 이 대목에서 젊은 시절, 그가 한때 사랑을 느낀 한 병약한 남성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 파올로는 바로 자신이었고, 그 젊은이는 또한 날마다 '환대의 집'을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 예수가 "나에게 하듯 대접하라"고 부탁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초라한 자기 집으로 데려가 가진 것을 다 내놓고 환대해 주던, 결국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제를 바라보며 부끄러움인지, 혹은 고마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눈물이 차오르는 사람, 그 영혼 그리고 그와 나눈 침묵과 우정의 기운, 그러고는 내일 다시 일하러 나가야 하는 고단한 삶.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끝내 잊히지 않는, 도로시 데이만큼은 아니겠지만, 내 삶에도 결코 잊히지 않을 대목, "돈 파올로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의 두 눈에 서서히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았다." 이 대목을 나 또한 잊지 않으려 한다.

출생과 성장

도로시 데이는 1897년 미국 브룩클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보수적인 언론인이었고, 그의 두 오빠 역시 아버지의 길을 이어 갔다. 명민하고 깊은 감정을 가진 그는 대학생 시절부터 자기 방식으로 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이 있었다. 언제나 그는 "저 사람이 어떻게 하루를 살아내는지"를 궁금해 했고 늘 누군가를 관찰했다. 그래서 그는 언론인이었고, 작가였으며 또한 이상주의자였다. 이상주의는 그에게는 힘없고 약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이었으며, 그들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려는 본능적인 사랑이었다.

일찌감치 대학을 그만 둔 그는 1920년대 미국을 휩쓸던 급진적인 사회 운동에 함께 했고, 두 차례 투옥되었고, 뛰어난 글 솜씨로 일찍부터 좌파 계열 언론사에서 기자 노릇을 했다. 그리고 몇 명의 남성들과 연이어 사랑을 했고, 낙태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의혹의 순간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금지된 술이 있는 칵테일 파티와 저녁 식사를 즐기거나, 대화에 빠져들고, 해변을 누군가와 걸을 때, 연기 가득한 방을 가득 메운 채 춤을 추기도 하고, 원기를 탕진한 뒤에는 나른하면서도 잠 못 이루게 하는 생각이 찾아들"던 시절, 이 쾌락이 문득 바보스럽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긴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20대 후반, 자전적 소설로 명성도 얻었고, 해변가에 집을 얻어 거의 처음으로 도회에서 빠져나와 시골 생활을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생물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인 포스터 배터햄과의 결혼 생활도 행복했다. 그 또한 탁월한 양심가이자, 굳건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었지만, 결정적으로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그는 남편을 깊이 사랑했고, 딸을 출산하게 되었다. 그의 내면에서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평화였다. 참으로 기이하게도, 내적으로 분열된 평화였다. 나는 행복했지만, 바로 그 넘치는 행복감 때문에 나는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행복을 삶에서 얻어내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점점 더 많은 기도를 하게 되었다.

딸을 가톨릭 성당에서 영세를 받게 하면서 그는 무신론자인 남편과 결정적으로 어긋나게 되었다. 그는 만약, 남편이 견해를 바꾸고 자신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해나갔더라면, 자신은 완전히 다르게 살았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출산과 이혼 이후로부터 그는 1930년대 현실의 중심으로 되돌아왔다. 갓난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사회주의 언론에 르포를 기고하면서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는 세계 경제 대공황 시절이었다. 온 거리에 악취가 진동했고, 길을 걷다보면 노숙인들이 발에 걸려서 넘어지는 지경이었다. 구걸 하는 사람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이들의 슬픈 얼굴을 보며 도로시 데이는 "울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당시 수도 워싱턴에서 진행되던 '기아 행진'을 취재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서원을 올린다. 1932년 12월 8일이었다. 그는 가톨릭대학의 마리아대성당으로 가서 "동료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내 안에 있는 모든 재능을 사용할 기회"를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올렸고, 뉴욕으로 돌아오니 영혼의 스승 피터 모린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피터 모린은 프랑스 출신의 평신도 수도자였다. '라살의 세례 요한 형제회'라는, 서훈이나 명예가 거부되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남성 그룹에서 수도자 생활을 했고, 의무 복무를 거부하면서 캐나다로 건너 왔고, 다시 미국으로 들어와 지독한 가난 속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홀로 공부하고 사상을 설파해 왔던 것이다. 그는 산업 문명, 자본주의, 국가주의를 포함한 온갖 형태의 전체주의를 뿌리로부터 거부하는 급진주의자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피터 모린은 "마치 입은 채 자고 일어난 듯한 옷차림"의 허름한 중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단번에 알아보았고, 의기투합했다. 피터 모린은 이제 "행동할 때"라고 했고, "선한 일을 하는 이에게 돈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면서 오직 타자기 한 대와 식탁 하나, 넉넉한 종이와 써야 할 이야기만 가지고서 <가톨릭일꾼>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한 부에 2센트, 거리에서 팔았다.

<가톨릭일꾼>은 미국 전역으로 번져나갔고, 대공황기 미국 사회 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환대의 집'을 열어 부랑자, 노숙인, 술주정뱅이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였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아픈 이들을 병원으로 옮겨 주고 간호해 주었다. 그리고 자급자족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 각처에 공동체 농장을 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가톨릭교회 지도부의 방침을 거부하고, 프랑코 독재와 부유층을 옹호하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테러를 서슴지 않던, 무신론자와 무정부주의자들로 뭉친 인민전선을 옹호했다. 그 시절, <가톨릭일꾼> 독자는 15만에서 1만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들은 굽히지 않았다.

겸손

도로시 데이는 '자선 행위'라는 단어를 "진저리난다"고 단호하게 무찌른다. 다만 그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강한 자각 때문에, 그 존엄이 무너지는 현실에 대한 슬픔과 분노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긍지 있게 행동해야 해, 네가 그들을 두려워한다거나 그들에게 무언가 구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기미는 조금도 내비치면 안 돼."

일생토록 그의 가슴에 남은 이 가르침을 주었던 사람은 그가 두 번째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감방 동료였던 매리 앤이다. 그녀는 거리의 여인이었다. 그에게는 일생토록 남은 큰 스승이었고, "누구보다 주님에게 가까이 다가간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로시 데이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대한 심판관이라고 여겼다.

"우리 중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기다리고 있나요?"

지은이 로버트 콜스가 의학 공부에 흥미를 잃은 의대생이던 시절, 도로시 데이를 만나기 위해 충동적으로 환대의 집에 방문했을 때 도로시 데이는 한 술주정뱅이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젊은 손님이 와 있음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 여인의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들어주던 그가, 대화의 여유가 생겼을 때 로버트 콜스를 바라보며 한 말이다. 그는 이 한 마디 말 속에서 도로시 데이가 어떤 사람이며, 그가 일생토록 헌신한 '가톨릭 일꾼 운동'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다고 술회한다.

"이건 위험한 활동이에요."

누가 보기에도 손님을 환대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번잡한 '환대의 집' 일을 잘 해내는 수녀가 있었다. 그 이가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오가다 마주친 도로시 데이에게 지나치듯 귀엣말로 던진 이야기다. 그러면서 "굉장한 유혹이에요, 남을 돕고 싶어 하는 거 말이에요"라고 덧붙인다. 어쩌면 자신에게 길이 남을 교훈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천사가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이비리그에 속한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이 친구들과 함께 그를 찾아왔다. 학생은 버나드 쇼의 소설에 나오는 열정적인 구세군 활동가 '바바라 소령'과 도로시 데이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를 물었다. 순간, 그는 기분이 상했던 것 같다. 질문의 내용에도, 학생의 태도에도. 정작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대하는 일에는 서투른 명문대학생이 던진 "지적인 질문" 앞에서 뭔가 한마디 쏘아붙여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혼자 부엌으로 돌아온 그가 중얼거린다. "도로시, 네 혀가 위험하구나. 말조심해야지"라고. 그날 밤 기도 시간에 그는 그 학생과 자신을 위해 기도했다고 고백한다.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 노동자 운동이 가톨릭교회 안에서 중요한 세력이 되어갈 때, 교황이 탄복하고, 도로시 데이가 곧 성인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슬퍼진다고 말한다.

저는 죽을 때까지 내 온 힘을 다해 도움을 주고자 이곳에 있습니다. 여기 이 환대의 집, 우리 공동체에 도움이 되려고요. 어떤 사람에게 갈채를 보내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정체를 폭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더 잘 알려지는데 시간을 쓰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내 기분을 나아지려는 목적으로, 소박한 꿈을 추구하기 위해 이곳에서 길 잃은 영혼을 먹이는 일에 탐닉하고 있다면, 나는 가장 나쁜 죄악인 교만이라는 죄를 다시 한 번 짓는 셈"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예수의 삶에서 멀어져간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영원불멸의 확실한 좌표는 바로 "그 분"이었고, 인간의 몸을 입고 가장 비참한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 인간으로 가장 처절하게 죽어간 예수의 삶이었다. "네가 하는 운동이 더 인정 받고 있어"라는 질문에 도로시 데이의 답은 이렇다. "하느님이 그러시디?"

그러나 그도 사람이었다. 의혹과 회의를 가진 인간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며, 때로는 그 생활이 너무나 힘들고 암담해서 딸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다고 했다. 그럴 때면, 방금 전까지 엉망이었던 알코올 중독자, 노숙인의 얼굴에서 문득 친근한 표정을 보게 되고, 그 표정이 자신을 어떻게든 행동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일들을 나열하는 것도 싫증난다고 했다. 그가 솔직하게 고백한다. 대부분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는 훌륭하지 않다고, 자기도 자주 화를 내고, 저 알코올 중독자, 노숙인, 부랑자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 라고 느끼는 걸로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고, 말이다.

다만 그에게는 쉽고 단순한 믿음이 있었다. 이 집을 찾아오는 가장 낮은 사람들을 환대하고 보살피는 것이 "자신의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이라는 믿음 말이다. 도로시 데이는 말한다. "우리를 여기로 이끈 이는 교회나 국가가 아니며, 이 일을 하라고 스펠먼 추기경이 뉴욕 시장이 요구하지 않았으며, 이 모든 것은 그저 이루어진 일"이라고.

이 환대의 집을 낳은 것은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우리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의 교의를 따르려 애쓰는 하루하루의 삶이며, 그냥 달라는 자에겐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다고 말이다.

교회와의 싸움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이를 선교 활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신앙인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무신론자의 흠 없는 삶을 내치고, 자신을 경배하는 신앙인을 더 사랑할 만큼 하느님이 경배에 굶주린 존재가 아니라고 그는 믿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삶 그 자체로써, 주고받은 사랑과 우정을 통해서 충분히 신을 찬미하고 있으며, 또 그들 나름의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살면 살수록 종교에 관심 없고 성경도 안 본 이들에게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더 많이 본다"면서, 힘없고 약한 자들과 더불어 싸우는 무신론자 공산주의자들을 찬탄하기도 했다.

그는 교회란 다만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그 십자가 자체"라고 철저하게 믿었고, 그래서 현존 가톨릭교회의 행태에 깊이 절망했으며, 때로 그들과 날카롭게 대립했던 것이다. 그의 말이다.

힘 있는 사람들 편에 서고, 약자는 망각하는 교회를 볼 때면, 예수님께서 모욕당하고 있고, 사형에 처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고위 성직자와 관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의 모든 백성, 특히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아이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 돌봐주고 싶어하실 사람들의 것입니다. 창피합니다. 종교를 사회적 장신구로 활용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보면 구역질이 납니다. 교회는 기도를 필요로 하는 무시무시한 죄인입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 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톨릭 노동자' 활동가들의 적극적인 반전 운동과 노동자 파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는 당연하게도 가톨릭교회 지도부의 분노를 샀다. 그는 뉴욕 교구 추모 묘지에서 시신 매장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을 해고한 일에 대해 "얼마 되지도 않는 가난한 일꾼들에게 추기경이 너무 압도적인 힘을 행사했다"며 스펠먼 추기경을 직접 비판했다.

<가톨릭일꾼>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이 매체를 불편하게 여긴 교회 지도부가 제호에서 '가톨릭'을 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교회는 내 집이다, 우리는 일생토록 집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지만, 우리까지 집 잃은 사람이 되기 싫다"며 이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러면서 그는 "추기경은 영적 지도자이지 통치자가 아니다, 신앙과 관련된 일이 아닌 것에 내가 추기경의 지도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맞섰다. 나아가, "우리는 스펠먼 추기경 당신의 성당으로 가겠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데려가실 때까지 있겠다"며 첨예하게 대립했고, 끝내 <가톨릭일꾼>을 지켜냈다. 저자 로버트 콜스는 도로시 데이의 이러한 탁월한 정치적 감수성과 용기를 간디에 비유하기도 한다.

세상, 혁명, 변혁, 비합리 비실용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 공유했던 사회 경제 사상은 "노동자의 생산 수단 소유, 조립 라인 폐지, 수공업 회복, 토지 소유, 농업과 지방의 강조"로 집약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압도적인 산업 기술 문명과 국가주의적 자본 체제 하에서 평범한 개인이 "매일 하는 일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다는 것, 개인의 재량, 가족의 재량, 개인의 존엄이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오직 작은 지역, 서로 얼굴을 맞댄 만남, 자체적으로 조직해 나가는 작은 공동체만이 대안이라고 믿었다.

당연히 그들은 수없는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성요셉의 집에서 수프를 받아드는 사람들을 보라, 늘 그곳에, '아직도' 있지 않으냐, 국가는 옳지 않다, 자선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면서 수천 수백만의 사람들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에서는 아주 멀찌감치 물러나며, 그래서 이 나라 현실의 99퍼센트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지 않느냐"라고 말이다.

당시 대공황 시기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뉴딜 정책의 영향으로 연방 정부를 거의 신성시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은 이 상황을 "국가에 의한 노예 상태"로 규정했다. 그들은 국가의 놀라운 응집력과 자원을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힘과 속도, 합리성"을 숭배하는 현대적 질병으로 보았다.

요컨대 그들과 그들에 대한 비판자들은 철학적 기반이 달랐다. 그들은 근대 세계를 지배하는 실용주의와 현실성, 더 강해지려는 욕구를 허용한 인간의 물질적 본능과는 뿌리에서부터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모든 일들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바라보았다. 요컨대, "삶의 태도, 도덕적 삶, 인간으로서의 총체적 윤리적 목표"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도로시 데이의 말을 옮겨 보자.

우리는 다만 주님의 증인이 되고, 우리의 활동을 통해 주님을 찬미하고자 하며, 그분을 따르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전쟁과 살인에 반대하고, 우리가 보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난 속에서 일하는 우리의 활동이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일하는 박애주의자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신들을 "효율적 박애주의자"로 칭하는 이들에게 그는 낙담했다. 가난을 몰아내기 위해 장관이 되고 싶다는 이에게 그는 "만약 장관이 되어 미국에서 가난을 완전히 몰아내더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가난은 엄청날 것이다"고 말했다. 미국의 빈곤과 관련한 통계를 나열하며 그들에게 동정을 표하는 정치인을 두고 도로시 데이는 그가 "개별적인 가난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도로시 데이를 두고 저자 로버트 콜스는 이렇게 정리한다. "모두가 당연시하는 제도들로부터 초연한 사람, 그러나 그 어디에도 초연할 수 있는 구역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당신들이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세상이 바뀌겠느냐고 묻는다면, 도로시 데이는 "그런 것은 내 손을 떠난 문제"라고 답할 것이다. 다만, 로마 제국이 초기 기독교도들과 같이 "한줌도 안 되는 반대자들에 의해, 제국을 손에 넣는 일에는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사람들"에 의해 "끝내 몰락"했듯이, 그들 또한 "끝까지 버티고 믿음으로 한데 뭉쳐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 전부"라고 말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전 세계의 무산대중들에게 단결을 호소하면서 "착취의 쇠사슬을 끊자"고 했다. 단결과 혁명을 통해서, 스스로를 해방시키자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전혀 반대로 표현한다. "우리는 존재의 사슬이며, 개인은 우리의 작은 조각을 지탱하기 위해, 이 사슬이 끊어지지 않도록, 서로 팔을 끼고 그 분의 이웃이 되고자 한다"고 말이다.

피터 모린과 도로시 데이의 죽음

피터 모린은 도로시 데이의 영적 동반자였고, 스승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린을 두고 "나를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분리시켜서 '일하는 사람과 함께' 삶을 보내도록 해 주었다"며 고마워했다.

실제로 피터 모린은 일생토록 자기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를 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다. "약간의 분명치 않은 점, 타인에게 부담을 주는 허둥지둥하는 행동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겸손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노동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두 손으로 생계를 꾸렸고, 농작물을 심고 수확했다. 그는 거리와 시골길을 다니며 들으려고 하는 자 모두에게 이야기하였다.

피터 모린은 "사람들이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꿈꾸었다. 그는 오늘날의 악, "국가, 전쟁, 고리대금"에 대해 소리쳤고, 땅으로 돌아가서 하늘과 땅, 가정과 아이들, 자연의 소중한 것을 되찾아야 한다고 설법했으며, 가난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그는 기계에 대항하여 소리쳤고, 기계는 사람에게서 빵 만큼 중요한 것, 일자리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자신의 온 몸을 쓸 수 있는 능력을 빼앗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기술 학교와 농업 학교를 전국 각지에 계속 세우라고 수도회에 요구했다.

그는 그러나 외로웠다. 수많은 모욕과 오해를 받아야 했다. 저녁 초대를 받아 간 곳에서 배관공으로 오해받아 지하실에 앉아 있던 적이 있었고, '콜럼버스 기사회'에서는 쫓겨났으며, 자신들이 기대했던 연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어느 부자 동네 목사로부터 지불된 여비를 반환해줄 것을 요구당하기도 했다. 목사의 말이 이랬다. "웬 선술집의 멍청이를 보냈냐"고. 그러나 피터 모린은 프란시스코 성인을 인용하며, "그렇다면 이건 완전한 기쁨이지"라며 이런 모욕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도로시 데이는 자서전 <긴 외로움>의 마지막을 피터 모린의 죽음을 묘사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피터 모린은 말년에 뇌졸중에 찾아왔고, 심장성 천식으로 시달렸으며, 젊은 시절 극심한 노동의 후유증으로 탈장이 되고 말았다. 뇌졸중으로 그는 생각하는 힘을 잃었고, 그때부터 그는 침묵하였고, 결국 어린아이 같은 존재가 되었다. 사흘 동안 집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5년 동안 앓았던 그는 공동체 식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갔고, 그들의 따뜻한 전송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도로시 데이는 그러고도 몇 십 년을 더 살았다. 남은 생애는 물론 도로시 데이 혼자였다. 그러나 그가 어찌 혼자였겠는가. 그는 온갖 노동자들의 파업을 도왔고,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1950년대에는 핵전쟁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실시되는 방공 훈련에 대한 불복종운동을 전개하여 끝내 폐지시키고 말았다. 1960년대에는 흑인 민권 운동을 지지하며 온 남부 지역에 버스를 타고 다녔다. KKK단의 위협을 받았고, 총격을 받기도 했다.

일흔 셋에 농장 노동자들의 연합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그가 살았던 곳은 언제나 '환대의 집' 구석방이었다. 집필과 강연, 노동자의 싸움을 돕고서 남은 시간은 모두 '환대의 집'에서 수프를 끓이고 커피를 타 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썼다. 그는 어디서나 가볍게 여행했고, 매일 기도했고, 가톨릭의 전례를 어기지 않으려했던 철저한 신앙인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의 발언을 담은 기록이다.

주님이 내게 주신 이 삶, 이제 끝날 거예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생각해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거기 앉아서 우리 주님을 생각했어요. 그 오래전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셨던 걸 말입니다. 그리고 혼잣말을 했어요. 내 삶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그 분을 마음속에 모셔온 것은 내게 온 위대한 행운이었다고. 그녀의 목소리가 잠기고, 두 눈에 물기가 어렸다. 여든 둘의 일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여든 셋이 되던 해, 평소 기도했던 대로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여섯 권의 책과 1500여 편에 이르는 기사와 수필, 비평을 남겼다. 그가 죽은 뒤, 프랑스 노트르담 대학이 훈장을 수여하면서 남긴 헌사는 "일생동안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해 주고,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지난 1년간, '괴로운 사람들을 더 괴롭게' 했던 <변방의 사색> 연재를 마칩니다. 길기만 한, 보잘 것 없는 글 쪼가리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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