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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남편은 방사성 덩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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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당신 남편은 방사성 덩어리야!" [2011 올해의 책]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
'프레시안 books' 송년호(71호)는 '2011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가 따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대신, 1년간 필자 독자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이 각자의 '올해의 책'을 선정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들을 2011년과 함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에 깃발을 꽂아 앞뒤를 구획하는 것은 분기점을 삼기 위해서일 것이다. 2011년과 2012년의 분기점에서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며 사람들은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까.

가까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이 있고, 서울 시장 오세훈의 어이없는 몽니로부터 촉발되어 박원순의 당선과 안철수 돌풍까지 이어진 일련의 정치 지형의 변화가 있을 테고,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와 <나는 꼼수다> 열풍으로 대표되는 미디어의 변화가 있겠지만, 내게 2011년은 단연 후쿠시마 사고다.

'후쿠시마'는 내게 앞서 언급한 모든 것을 다 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주었다. 후쿠시마는 내게 지금껏 걱정해오던 것들, 이 세계가 뭔가 근원적인 데서부터 뒤틀려버렸으며 이 체제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 한구석에 늘 품고 있었던 공포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었다.

3·11 도호쿠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원전에서 수소 폭발이 일어나고, 며칠 뒤 원자로 냉각 수조에 물이 바닥났을 거라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의 발표를 지켜보던 순간이 생각난다. 그것은 절멸의 공포였다. '그 때'가 이렇게 도둑처럼 임하는구나, 하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공포였다.

그때부터 나 또한 막연하게 알고 있던 핵 문제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가장 큰 울림으로 남은 것이 바로 이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김은혜 옮김, 새잎 펴냄)이다.

▲ <체르노빌의 목소리>(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새잎 펴냄). ⓒ새잎

이 책은 너무나 중요한 자료임에 분명하지만, 핵 발전의 위험을 알리는데 효과적인 계몽의 도구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이들을 인터뷰한 장면이 특히 그러했고, 너무나 마음이 아파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책장을 덮어야 했다. 지면에 글을 써야 한다는 약속이 아니었다면 나 또한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예술이 지구의 종말을 그려냈지만, 우리의 삶보다는 기이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이 책의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말한다.

이 책에 담긴 언어는 인간이 도달해 본 적이 없는, 그리고 미지에 만나게 될 어떤 극단적인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잊지 마세요.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도가 높은 방사성 물질이에요. 죽고 싶어요? 정신 차리세요.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화재 진압에 동원된 소방관은 형언할 수 없는 모습으로 서서히 죽어갔다. 하루에도 20~30번씩 대소변을 받아 냈고, 손발의 피부가 벗겨졌으며, 온몸이 물집으로 뒤덮였다. 머리를 움직이면 베개에 머리카락이 한줌씩 떨어졌다. 그 곁에서 아내는 서서히 죽어가는 남편을 간호한다.

의료진들은 아내에게 남편 곁에서 떠날 것을 간곡히 부탁하면서 급기야 "당신 남편은 이제 사람이 아니라 방사성 덩어리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책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체르노빌 사고로 빚어진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들을 한 마디로 집약해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방사성 덩어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것은 사랑에 몰입했을 때 인류가 맞닥뜨린 가장 기괴한 상황이 아닐까.

이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딸을 낳았다. 그러나 몇 시간 뒤 딸은 죽었다. 그런데, 아내는 살아남았다. 아내는 이렇게 절규한다.

내가 딸을 죽였다. 내가……. (말을 끊으면서 한다) 딸이, 나를 살렸다. 내 딸이 방사선을 모두 끌어서 나를 살렸다. 그렇게 작은 아이가……. (숨이 찬다) 딸이 나를 지켜줬다. 나는 그 둘을 다 사랑했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죽이는 게 가능한가? 이런 사랑으로! 누가 알려줄까? 무덤에 가면 무릎을 꿇는다. (오랫동안 침묵한다)

죽어가는 남편의 몸에서 나온 방사능은 아내 뱃속의 태아에게 옮겨갔다. 아기가 아내 '대신' 죽었다. 이것은 핵의 본질을 날카롭게 묘파해낸다. 핵이란 당대를 위해서 미래를 죽이는 것, 당대의 편익을 위해 발생하는 책임, 고통을 다음 세대에 떠넘기는 것, 곧 '미래 세대에 대한 살인'이라는 것이다.

발전소 건물 옥상에 널려 있는 원자로 잔해들을 치우는데 화성 탐사 로봇이 동원되었다. 그 로봇도, 독일제 크레인도 지붕위에서 조금 작동하다가 '죽었다'. 결국 고무 옷을 입고 고무장갑을 낀 군인들이 미칠 듯이 넘실거리는 방사능 속에서 일했다. 위기에 처한 사회주의 조국을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뛰어든 용감한 군인은 집으로 돌아온 뒤 몸이 부어오르고 드럼통처럼 커졌다가 숯처럼 까매지더니 어린 아이처럼 야윈 채 죽어간다.

오염 구역 내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표정도 감정도 없는 로봇이 되어 간다. 창문이라도 깨면 선생님들이 기뻐할 지경이다. 숲은 아름답고, 열매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도 따러가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남은 것은 텔레비전과 책뿐이다. 여자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 '못난 아기를 낳아도 그 앨 예뻐할 거라'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아이들은 '엄마, 나 못 참겠어요. 그냥 죽여주세요' 하고 울부짖는다.

인간이 이 행성에서 절멸한 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는가. 이 책은 미래 세계에 대한 비유와 암시로 가득 차 있다. 오염 지역, 인간들이 모두 떠난 곳에는 사람 없는 물건, 사람 없는 풍경, 목적지 없는 길, 목적지 없는 전선들만이 정물처럼 남아 있다. 숲은 깊고 아름답지만, 거기엔 방사능이 넘실거린다. 강에는 정상보다 다섯 배, 일곱 배가 더 큰 메기가 게으르게 헤엄친다.

이 책은 시집으로 읽혀야 마땅하다. 체르노빌을 겪은 이들은 모두 시인이 되었고, 철학자가 되었다. 400쪽이 넘는 이 책은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미래의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답으로 가득 찬, 기나 긴 시집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체르노빌 세계사'라는 제목으로 글을 한 편 썼다. 체르노빌에서 돌아와 신장, 간, 심장이 1.5배씩 부풀어 오르며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간 한 해체 작업자의 아내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꿈꿨어요. 1917년이나, 1941년에 안 태어난 것이 너무 아쉬웠어요.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나는 역사와 역사적인 시대에 살고 싶지 않아요. 그 시대에 내 작은 생명은 보호막을 잃어버려요. 위대한 사건은 작은 생명을 보지도 못하고 짓밟아버려요. 멈추지도 않아요. 우리 후에는 역사만 남을 거예요. 체르노빌만 남을 거예요. 그런데, 내 삶은 내 사랑은 어떻게 되나요?

그러므로 '체르노빌 세계사'라는 표현 또한 옳지 않다. 개체의 고통이 묻혀버린 역사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체르노빌은 개인도 역사도 파묻어버린 자리에 솟아오른 거대한 봉분인지도 모른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인간들이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후쿠시마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과 8개월 전 우리에게 수신된 '후쿠시마의 목소리' 또한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이 시간,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확인해 보니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 펴냄)의 판매지수는 1,208,094이고, 이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 판매지수는 2,565이다. 600배의 차이가 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후쿠시마를 이렇게 빠른 속도로 망각하려는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이겠는가.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들, 안철수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조금도 변경시키지 못할 우리의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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