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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금 요청하는 노숙인 친구', 뭐라고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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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금 요청하는 노숙인 친구', 뭐라고 말할 것인가? [프레시안 books] 엄기호의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사람이 계속 죽어나간다. 솜털 보송한 중학생 아이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뇌수가 흩어진 채 죽는다. 아이는 유서에서 "진실을 말하고 나니, 이제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열네 살 아이가 '여한이 없다'며 허공에 몸을 던지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수능 망쳐서 죽고, 선임병에게 매 맞아서 죽고, 취업 못해 죽고, 우울증을 이기지 못해서 죽는다. 나라에 기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세금 꼬박꼬박 낼 테니 그 돈 받고 내 앞에서 그냥 좀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는데, 이놈의 나라는 때만 되면 학교 가라고, 군대 가라고, 세금 내라고, 시청료 내라고, 데모하지 말라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겁박한다.

학교 가서 12년간 죽도록 공부하고는 끝내 등짝에 탈락과 배제의 낙인을 받아 와도, 군대 가서 '직싸게' 고생하고 얻어맞고 때로 죽어나가도, 피 같은 세금 도적질당해도, 전기 요금과 한 뭉텅이로 갖다 붙여 강탈해 간 시청료로 '가카'의 '똥꼬'를 핥아주어도, 엄동의 날씨에 데모하다 물대포를 맞아 얼어붙어도, 우리는 꿈쩍 못하고 그냥 산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희망이 있을 거라고,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징징거리며, 산다. 그냥 산다.

지식인이라는 부류가 있다. 이 가련한 백성들 무간지옥을 헤매다가 인터넷에 재미난 라디오 프로가 있다기에 그거라도 들으며 좀 웃고 낄낄대겠다는데, 거기에다 대고 황빠 노빠 심빠 온갖 빠자 돌림의 딱지를 붙여가며 비난하는 지식인이 있다. '씨바, 이제 나꼼수도 진중권 눈치 보면서 들어야 되냐?'

지식인들 늘 하는 소리, 그래봤자 '신자유주의 세계화' 여덟 글자, '이명박 나쁜 놈' 여섯 글자, '복지국가' 네 글자로 끝나는 가난하고 거창한 레토릭들. 그러면서도 근엄한 얼굴로 동아시아가 어떻고, 87년 체제가 어떻고, 매일 큼지막한 이야기 주워섬기는 지식인들이 있다. 사람은 계속 죽어나가고, 절규는 언어가 되지 못해 가슴을 후벼 파는데, 이 삶이라는 게 어느 날에는 너무 공허해서 술에 취하고 그러면서 우울함에 젖어 가는데, 세상은 이미 망해버린 것도 같은데, 지식인들은 그렇게들 살고, 언론도 권력도 그렇게들 한 시절을 구가하고, 세상은 또 그렇게 돌아간다.

엄기호라는 지식인이 있다. 그는 이 불한당 같은 시절, 내가 기대는 몇 안 되는 지식인 중의 하나다. 지난 2년여 동안 나는 그의 열성팬이었다. 그의 글을 인터넷에서 만나면 꼭 출력해서 밑줄 치며 읽었다. 그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에서 시작된 숱한 질문으로부터 토론과 대화를 통해 길어 올린 나름의 답들을 엮어 새 책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웅진지식하우스 펴냄)를 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을 소개한다.

다른 언어, 다른 실천

글로만 알아오던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월간 <우리교육>의 구조조정에 맞선 싸움의 자리였다. 진보를 표방하는, 언필칭 전교조 운동의 가장 소중한 성과라는 20년 역사의 독립 언론을 졸지에 납품을 위해 연명하는 '기관지'로 주저앉혀버리는 폭거 앞에서 그도 나도 깊이 상심하고 분노했던 것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엄기호가 보여주는 과감한 행동에 놀라기도 했다. 그는 순수한 사람이고, 순수한 만큼 노여움을 잘 타는 인간이기에 그러했겠지만, 그것은 또한 이 싸움이 갖는 의미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도 나도, 함께 한 여러 동료들도, 조금씩 제대로 된 교육 매체가 살아남아야할 이유를 확신하게 되었고, 그 믿음들이 모이고 모여 교육 공동체 '벗'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는 이른바 '성골'이 될 수도 있었던, 촉망받는 문화학자의 길을 걷던 어느 날부터 불쑥 '싸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대안 학교에서 청소년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언어를 기록했고, 배낭을 싸 짊어지고 제3세계 여러 나라를 또 몇 년 동안 돌아다녔다.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자리, 먹고 살기 위해 불사신처럼 노동하고 참혹하게 견뎌야 하는 세상에서 그 자신 한 사람의 활동가로 치열하게 토론하고 싸우며 한 시절을 보냈다.

그가 국제 연대 활동에서 돌아와 한국 사회를 향하여 쓴 글들은 그 깊이와 안목에서 지금껏 내가 읽어오던 글과 '끕'이 달랐다. 그가 구사하는 많은 개념들은 물론 서구 학자들의 작업에 빚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 자신이 직접 경청하고 기록한 생생한 언어로 오늘날 교육 불가능과 우리 사회의 정신사적 위기가 발현되는 지점에 접맥시켜 날카롭게 묘파해내고 있었다.

이게 사는 건가?

▲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엄기호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그가 이 책 전체를 통하여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그는 '이게 사는 건가?'라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이 시대의 삶을 집약한다. 그리고 그는 답한다. '이건, 사는 게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던 삶은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훑고 난 지금,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삶의 공동화(空洞化). 우리 인생이 허당이 되어간다는 것, 그래서 그는 구조니 시스템이니 하는 하나마나한 소리밖에 중얼거릴 수밖에 없는 거시 담론이 아니라, 삶에 밀착된 언어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언어'이며, '다른 삶'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엄기호에게 배운 몇 가지 개념들을 풀어가 보자.

먼저, 고백과 증언. 우리는 언제나 고백을 강요당한다. 극기 훈련장에서는 촛불을 켜놓고 '어머님 은혜'를 부르며 뉘우침의 고백을 강요당한다. 대학에 보낼 자기 소개서에는 내가 당신들의 대학을 얼마나 흠모해왔는지, 내가 당신 대학에 가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를 고백해야 한다. <좋은 생각>을 읽으며 희망의 교리를 배우지만, '좋은 생각'은 날마다 배반당하고, 지질한 나는 긍정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부정해야 한다. 아이들이 지금 어떤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단 5분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어른들이 그어놓은 금 안에서만 아이들은 고백할 수 있다. 아이인 척, 착한 척. 고백의 강요와 제한, 이것을 엄기호는 근대의 지식 권력이 구축되는 가장 기본적인 통치 전략으로 본다. 요컨대, 우리는 사회를 향하여 우리가 지금껏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 고백해야 하고, 앞으로 얼마나 열심히, 잘 살 것인지를 다짐해야 한다.

엄기호는 이 체제의 연병장 한가운데 자리한 고백의 조례대를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그는 전혀 새로운 언어 전략을 이야기한다. '이제 그딴 식으로 나에게 고백을 강요하지 마시오, 이제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든 이 사회라는 괴물을 폭로하겠소.' 대체 우리는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이런 모멸을 겪어야 하는지,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우리는 우울과 자기 연민에 젖어 있어야 하는지, 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라고, 이제 이런 따위 거짓 고백은 걷어치우고 이 '사회'라는 괴물의 실체를 폭로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만남과 세계의 전유

고백에서 증언으로, 그 다음은 무엇인가. 만남이다. 엄기호는 이 책에서 기말고사에 출제한 자신의 시험 문제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도 함께 풀어보자.

"졸지에 다 말아 먹고 노숙인이 된 친구가 있다. 잠수 타면서 옛 친구들에게 전화나 문자로 입금을 요청하고 있다. 몹시 귀찮다. 그 친구에게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쓰시오."

엄기호의 답은 이러하다. 지금 그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통장에 찍혀 나오는 숫자-돈-가 아니라 바로 만남이다. 세계는 만남을 통해 만들어지고 보호된다. 만남이 없으면 세계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전화로 돈 보내달라고 독촉하지 말고, 이 친구야, 나랑 만나자, 만나서 내 잔소리를 다 들어라"라고. 그 고통을 감수하는 한에서만 너는 노숙인이라는 방외인이 아니라 '내 친구'라는 세계 내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돈은 잔소리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내가 친구에게 준 돈'이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아니라 '친구가 준 돈'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만나야 한다. 요컨대, 그에게 세계를 돌려주자는 것, 세계 안에서 수고하는 삶을 돌려주자는 것,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뭔가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대공황기로부터 시작하여 수십 년간 미국의 가톨릭 노동 운동을 이끈 위대한 실천가이자 영성가인 도로시 데이가 일생토록 반복했던 행동을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와 동료들은 뉴딜 정책을 신성시하던 당대 미국 진보 진영과의 불화를 감당하면서, '자기 만족적 행위'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환대의 집'을 통해 알콜 중독자, 노숙인, 실업자들에게 커피와 수프를 대접하고, 그들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 반복된 행동은 '그들에게 세계를 돌려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필요한 것은 만남이라는 것, 만남과 환대를 통하여 알콜 중독자, 노숙자, 실업자인 당신과 나는 똑같은 손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때서야 우리는 같은 운명임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 여기서부터 우리는 이 파국적 세계와 단절하고 '새 하늘 새 땅'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

무슨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대안이 뭐냐'고 들이대는 사람이 있다. 나도 몇 번 경험해본 적이 있다. 식은 땀 흘리며 가로세로 떠드는 연사 앞에서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뺨을 한 대 얻어맞은 듯 당혹스럽다. 엄기호는 단호하게 대거리한다. "그렇게 묻는 당신은 지금 나와 함께 뭔가 해보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이냐?"고.

지금껏 우리는 '하면 된다'는 공식을 강요당했다. 그것이 희망의 공식이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되지도 않을 거면, 하지도 않겠다'는 것이다. 엄기호는 대안이 뭐냐고 들이대는 이들의 속내를 폭로한다. '당신, 실은 대안 없다는 이유로 꼼짝도 안 하려는 거지?'라고.

애처로운 일이다. 도대체 희망이 뭐기에 희망 때문에 살고, 희망이 없어서 죽는다. 엄기호는 이 사람 잡는 '희망'이 실은 바꿔치기 된 '기대'임을 폭로한다. 그리고 우리가 강요당해온 이 '기대의 공식'을 박살내려 한다. 물론 엄기호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이 기대의 공식은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이미 박살이 났다. 인간은 실은 굉장한 영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자신만은 예외일 거라며 그것이 희망이라 믿으며 어이없는 자기 암시에 젖어 산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언론들이, 권력이 한목소리로 부추긴다.

그 때문일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상처받았으되 상처를 상처로 드러내지 못하는 자들은 유령으로 떠돈다. 600만 원 짜리 징벌적 등록금을 얻어맞으며 자살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는 카이스트 학생이든, 죽도록 공부하고 스펙을 쌓아도 끝내 '지잡대'라는 모멸적인 이름을 벗어버릴 수 없는 지방대생이든, 이들은 같은 상처로 뒤척이지만 상처를 드러내지 못하는 유령이다. 유령이 유령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 세계의 비극의 한 모습이다.

우울증의 시대, 한 마리 두더지가 된 엄기호

그러므로 이 세계는 우울증이 지배하고 있다. 가히 우울증의 시대다. 우울증은 끝내 사람을 죽게 만든다. 엄기호는 우울이 아닌 '비극'의 힘을 말한다. 우울은 정신의 허약함만을 드러내며, 끝내 자기 자신에게로 집착하는 것이지만, 비극은 고통 받은 타인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게 하고, 자기 고통을 초월하게 하는 카타르시스가 된다.

슬픔도 힘이 된다는 것, 그것은 이를테면 희망버스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한진 중공업에서 정리 해고된 100명 남짓한 노동자가 복직이 된들, 이 끔찍한 정리 해고와 비정규직의 현실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100명과 김진숙 한 사람을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낯모르는 이들이 떼 지어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몸은 녹초가 되어버리는데도 정신엔 '은혜 받고 온 예수쟁이'처럼 새로운 기운이 꿈틀거린다. 타인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자기의 고통을 초월하게 하는 이 놀라운 카타르시스.

그러므로 우리에게 '힘'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남의 도움이 필요치 않는 강력한 힘, 이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나약한 인간이다. 죽는 것이 두렵고, 일상이 파괴당하는 것이 두렵다. 필요한 것은 체념하지 않고 맞서겠다는 '용기'다.

엄기호가 이 책을 이끌어나가는 졸가리로 선택한 개념어들의 대립쌍이 있다. 고백에서 증언으로, 우울에서 비극으로, 동지에서 동료로, 힘이 아니라 용기로, 기대의 공식을 박살내고 새 하늘 새 땅의 희망으로, 마주선 이 두 개념들의 거리는 짧고, 차이는 미세하다. 그러나 우리가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백지 한 장 같은 작은 차이에서 비롯한다고 엄기호는 말한다. 천하의 김진숙도 크레인 위에 기웃거리는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헤매다 희망버스를 통해 극적으로 살아났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문턱을 넘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정신적 '용기'의 영역이다. 용기는 혼자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화두는 단연 '동료'이며, '만남'이며 '협동'이 아니겠는가.

엄기호는 우리에게 두더지가 되자고 한다. 지금은 캄캄할지라도, 일단 자기의 자리에서 부지런히 굴을 파자는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씩 둘씩 서로 만나고, 그들이 또 작은 굴을 뚫고 작은 길을 열고, 그러다 뭔가 보이는 것도 같아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었더니 약속이나 한 듯 수많은 두더지들이 떼로 고개를 내밀어 세상은 두더지들의 천국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익히 잘 알던 것이라고? 맞다. 진리는 원래 단순한 것이다. 다만, 엄기호는 그 징후와 실상들에 촉수를 뻗어 감지하고 분석함으로써 명료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무릎을 치게 된다. 그리고 정말 그런 생각이 든다. '맞아, 내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었어'라고.

그 다음은 엄기호의 몫이 아니다.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 물론 그는 이미 스스로 한 마리 두더지가 되어 여기저기 굴을 파고 있다. 교육 공동체 '벗'에도, 인권 연구소 '창'에도 이미 굴을 뚫어놓았다. 그리고 강의에서 만나는 젊은 학생들이, 그의 탁월한 재담에 울고 웃으며 대화에 참여하는 모두가 그의 동료들이다. 그는 경청하고 맞장구쳐주면서 그들의 막힌 굴을 뚫어주고 있다. 넓고 큰 귀와 예민한 촉수, 열린 마음과 따뜻한 인간미, 거기에 과감한 행동력까지 갖춘 지식인 엄기호, 나는 그가 자랑스럽다. 내가 그의 한 동료인 것이 기쁘다. 그는 지금 좌절하고 분노하고 냉소하는 사람들, 이 시대의 가장 가슴 아픈 현실을 응시하는 단 하나의 지식인이다. 엄기호, 그의 무운과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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