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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당> 방귀남은 미국에서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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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당> 방귀남은 미국에서 행복했을까? [프레시안 books] 토비아스 퓌비네트 등의 <인종 간 입양의 사회학>
지난 4월 말 영화 <어벤저스>가 개봉했다. 7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았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어벤저스> 시리즈 영화라면 모두 챙겨 보며, 이 '본편'을 기다렸던 나도 그 700만 중에 한 사람이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 잘 만든 영화였고, 무척 재미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우습지 않은 농담이 하나 있었다.

(가엾지만 일단은) 악당인 로키를 다른 이들이 비난하자, 종족이 다른 형 토르는 "잘못된 길에 들긴 했어도, 그는 아스가르드 인이고 내 동생이야"라고 말한다. 이에 블랙 위도우가 "그가 이틀 새 80명을 죽였어"라고 받아치자, 토르는 말한다. "걘 입양됐거든?"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보았는데, 세 번 모두 이 부분에서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불편한 농담이 나올 수 있는 자리에 바로 인종 간 입양인이 있다. "우리 가족이야, 사랑해, 하지만 음, 뭐, 입양됐으니까 좀 다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사랑으로 인종을 넘어선 새로운 가정을 만든다는 이상보다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며 터져 나오는 폭소가 훨씬 더 가까운 곳에.

▲ <인종 간 입양의 사회학> (토비아스 휘비네트 외 지음, 제인 정 트렌카 외 엮음, 뿌리의집 옮김, 뿌리의집 펴냄). ⓒ뿌리의집
<인종 간 입양의 사회학>(토비아스 휘비네트, 수나, 제니 라이트, 마크 해글런드 지음, 제인 정 트렌카·줄리아 치니에르 오패러·선영 신 엮음, 뿌리의 집 옮김, 뿌리의집 펴냄)은 "이식된 삶에 대한 당사자들의 목소리"라는 부제대로, 인종간 입양의 당사자들이 자신의 삶을 말하는 책이다. 입양될 당시에 당사자이면서도 인종 간 입양을 선택할 수 없었던 입양인들은 시, 짧은 수필, 사진, 학문 연구 등 다양한 형태로 이 경험에 대해 말한다.

제1부 '넌 도대체 어디서 왔니?'는 다름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설명해야 하는 인종간 입양인의 경험을 보여준다. 사랑은 피부색을 보지 않는다거나, 입양으로 완전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룬다는 환상은 "너는 왜 달라?" 하는 질문 앞에서 대답해야 하는 입양인의 곤란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인종 차별을 당하고 돌아온 입양아 앞에서 인종 차별이 잘못된 것임을 말하기에 앞서 너도 공격하지 그랬냐며 울음을 터뜨리는 엄마를 보았던 딸 제니 라이트는 "그녀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의견, 세상이 다른 곳이기를 소망하는 눈물 어린 소원으로 나를 무장시켰다"고 말한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졌고 인종간 입양인이라는 것도 정체성 중 하나인 마크 해글랜드는 사람들이 한국 입양 성인을 보았을 때 심한 억측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입양 부모는 존재조차 몰랐고 알았더라도 아마 이해할 수 없었을 인종 간 입양 경험의 기록이다.

제2부 '어떻게 여기에 왔니?'는 인종간 입양을 가능하게 만든 정치, 사회, 경제적 환경에 주목한다. 나는 2009년에 <화성 아이, 지구 입양기>(데이비드 제롤드 지음, 정소연 옮김, 황금가지 펴냄)라는 입양을 다룬 책을 번역했는데, 이 책에는 연장 아동을 입양한 이 책의 저자가 입양할 아이를 찾으면서 흑인이 대부분인 카탈로그를 보며 인종간 입양을 금지한 주 방침 때문에 "이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가족을 찾지 못할까?" 하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인종 간 입양의 사회학>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애초에 어째서 그토록 많은 '유색 인종' 아이들이 가족을 찾아야 하는 환경에 놓였을까? 어째서 가난하고, 유색 인종이고, 교육 수준이 낮고, 비혼인 친생모들은 아이를 더 쉽게 빼앗길까?

흑인 아동들의 친가족은 때로 '보다 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 백인 부부'를 방해하는 존재로 여겨지고, 입양인들의 모국은 더럽고 가난하고 미개한 곳으로 묘사된다. 도로시 로버츠는 이런 인종간 입양 담론이 위탁 보호 아동들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고아'로, 친부모를 '사실상 죽은 사람들'로 만들어버렸음을 지적한다.

로라 브릭스는 빈곤 가정, 특히 가난한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유해하다는 뿌리 깊은 믿음으로 인해, 아동을 가족과 분리시키는 비용이 많이 들고 효과적이지도 않은 위탁 보호나 인종간 입양 제도가 힘을 얻어간 과정을 설명한다. 엄청난 수요가 창출해낸 '아동 쇼핑' 시장을 분석하고, 입양 시장 안에서도 유럽계 미국인>아시아나 라틴계>아프리카계라는 인종적 계급을 말한 김 박 넬슨의 글은 노골적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의 삶은 인종간 입양으로 풍요로워졌다"고 말하는 부모들의 풍요로움은 아이가 겪는 차별과 인종주의를 보상할 수 없다. 인종간 입양의 인종 문제는 양부모가 아니라 아이들의 문제인데도, 수요자 중심인 입양 시장은 이를 외면한다.

제3부 '식민주의적 상상, 지구적 이주'는 인종 간 입양의 식민주의적 체계로 초점을 옮긴다. 북미 원주민들에 대한 문화 말살, 긴급 구조라는 이름의 아동 강제 이주, 한국의 아동 입양의 역사가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이러한 제3부의 내용은 제4부 '고통을 통한 성장'으로 이어진다. 제3부가 거시적인 식민주의적 체계의 작동을 말한다면, 제4부는 그 결과로 인종적,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의 경계에 살게 된 인종간 입양인 개인과 그 주변인들이 겪은 개인적인 상처와 트라우마를 말한다.

3부와 4부의 내용은 거시 구조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제3부에 있는 산드라 스피어스의 "어째서 난 (서른여섯 살임에도) 사회적으로 엄마가 아닌 딸에 가까운가?"라는 독백과 제4부에 있는 존 레이블의 입양인은 나이를 먹어도 계속 아동으로만 여겨진다는 지적은 맞닿아 있다.

토비아스 휘비네트는 제3부에서 인구 과잉과 고비용 아동 보호의 대안으로 정부가 해외 입양을 적극 활용하면서, 한국이 효율적인 입양 산업이 발달한 나라가 된 과정을 보여준다. 정부의 허가와 정책 협조로 성장한 기독교계 입양 기관들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인종 색맹적인 가르침을 진작시켰고, 한국 아동을 입양한 양부모들이 한국 아동이 아니라 내 딸을 받아들일 뿐이라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입양 아동을 수출한 나라가 되었다. 한국계 입양인 중 하나인 베스 경 로의 제4부 글에서 우리는 그 결과를 본다. 한국이 국제입양을 시작한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백인 입양 부모들은 여전히 그들의 가정을 다문화나 다인종 가정이 아니라 '한국계 입양아가 있는 백인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동화를 강요받은 인종 간 입양인들은 부인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며 미국인도 미국인이 아니지도 않은 채 나이 들어간다. 이 모든 경험은 입양인들 뿐 아니라 인종 간 입양을 준비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입양 가족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제5부 '집으로 가는 여정?'은 모국을 찾은 입양인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모국/고향을 찾은 인종간 입양인들의 당혹감을 말하고, 이러한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정이 감동 스토리로 쉽게 소비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비판한다.

제6부 '외치노니, 우리의 목소리'는 현재와 미래를 향한 글이다. 입양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는 기존 국제 입양 연구가 인종 문제를 과소평가하게 했음을 지적한다. 페를리타 해리스는 인종간 입양인들이 관계 맺음이나 가족 안의 친밀 관계 형성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인종 간 입양인들을 지원하는 ATRAP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입양은 일생을 관통하는 경험이지만, 꼭 외로운 고민일 필요는 없다. 인종 간 입양인들은 이제 출생국이나 고향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초국가적인 다문화 공동체를 형성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이고 있다.

입양은 상실에서 출발하는 과정이다. 이 책이 마지막까지 거듭 강조하는 부분도 그것이다. 물론 입양이 전적인 상실은 아니다. 그러나 입양은 상실에서 출발한다. 인종 간 입양은 인종적 계층이 존재하는 이 세상의 구조적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인종 간 입양인들은 "가족과 민족이 혼합된 제비뽑기 복권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고, 고통과 소외감, 그리고 이런 감정을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부채감과 죄책감에 부담스러워한다.

나는 많은 아이들에게 잘 사는 유럽 나라에 새로운 가정을 찾아 준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회복지사들을 만났다. 이 먼 나라까지 열 몇 시간을 날아와 다른 인종의 갓난아기를 받아 안으며 눈물짓는 입양 부모를 보기도 했다. 국제 입양으로 아동 복지에 헌신한 기록을 담은 두툼한 칼라 사진집도 갖고 있다. 후원금을 내고 산 책이다. 나는 인종 간 입양이라는 '산업'에 진입한 개인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찬란하게 빛나는 선의가 만들어낸 그늘이 있고, 어떤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못한다.

인종 간 입양으로 당사자와 주변인들이 경험해야 했던 절망은 뼈아프고, 호주와 미국 원주민의 사례와 같은 폭력적인 인종 간 입양의 역사는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그 '움푹 팬 자국'을 없앨 수는 없다고 해도, 상처에 대해 말할 기회마저 상실케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가족과 풍요를 선사한 아름다운 선택이 강요한 사회적 침묵을 인정하고, "아, 그럼 기억을 못하겠네,"나 "네 엄마는 너를 위한 최선을 원했을 거야"같은 상투적인 말이 타인의 과거를 삭제해 버렸음을 알고, "뛰어난 적응력"같은 용어의 오만함을 반성해야 한다.

물론 괜찮았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저 많은 '성공적인 인종 간 입양담'이 모두 허상은 아니리라.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일이 괜찮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한계를 마주하고 실패를 인정하는 일은 괴롭다. 아무리 자학해도 답이 보이지 않는 고통은 서럽다. 누군가는 폭력으로부터 타인을 구원한다는 심정으로 했을 일이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고 만 과정은 안타깝다.

그렇지만 괜찮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은, 괜찮다. 최소한, 괜찮지 않음을 외면하는 것보다는 괜찮지 않다고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언제나 더 괜찮은 일이다.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고 그만큼 큰 소리로 답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20만 입양인의 "사라진 과거"인 이 땅에 사는 당신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이 600여 쪽에 달하는(혹은 그간의 긴 침묵을 생각하면 600여 쪽에 불과한) 괜찮지 않았다는 외침을 읽는 괜찮은 경험을, 당신도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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