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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가 한국을 구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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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가 한국을 구원할 수 있을까? [나는 반론한다] 박동천의 <정치의 이동> 서평에 답한다
지난 8월 17일 '프레시안 books' 103호에 실린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의 <정치의 이동>(상상너머 펴냄) 서평을 놓고 책의 저자인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가 반론을 보내 왔다. (☞관련 기사 : 철학이 정치를 구원할 수 있을까?)

1. 나의 책 <정치의 이동>에 대한 박동천의 서평('철학이 정치를 구원할 수 있을까?')을 잘 읽었다. 참으로 고맙다. 의례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나는 지금껏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식인들 중에서 박동천처럼 정치 현안과 주제들에 대해 치밀하고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명증한 언어로 탁월한 식견을 드러내는 이를 잘 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내 책을 위해 귀한 시간을 내서 비평을 해 준 것이다.

게다가 그는 단순히 흔한 '주례사 서평'이 아니라 심도 있고 날카로운 비판까지 해 주어서 더 더욱 고맙다. 이것도 빈말이 아니다. 비록 그 동안의 공부와 생각을 가다듬어 나름대로 최선의 결과를 책을 통해 표현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책에 담긴 내 생각의 올바름을 무조건 고집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 놓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내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더 나은 통찰을 얻기를 희망한다. 비판과 문제 제기를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다. 배움을 청하면서 그의 비평에 답해 보려 한다.

▲ <정치의 이동>(장은주 지음, 상상너머 펴냄). ⓒ상상너머
2.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논의부터 우선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자. 박동천은 국가와 시민 사회의 관계 그리고 롤스에 대한 나의 해석이 "정확하지 않거나 아니면 정확 여부를 따지기 전에 정합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솔직히 이 부분을 보며 조금 놀랐더랬다. 내가 주석으로 지나가면서 언급한 것을 확대해서 불필요하고 장황한 논의를 전개해서 그랬고 나로서는 그답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는 잘못된 독해에 기초해서 나의 롤스 해석을 비판해서 그랬다.

시민 사회 개념과 관련하여서는 사정이 이렇다. 나는 내 책에서 서구에서 정의 개념이 근대 이후가 되면 혼란스럽게도 애초의 정치적 차원과 관련해서보다는 사회 경제적 재화의 분배와 관련된 차원에서 더 많이 사용되는 배경을 설명하면서 '국가와 시민 사회의 분리'를 지목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짤막하게 주석으로 시민 사회 개념과 관련된 혼란도 함께 언급했다. 여기서 나는 박동천이 장황하게 따져들고 있는 것처럼 시민 사회에 대한 나의 특별한 이해를 밝힌 것이 아니라, 시민 사회 개념과 관련하여 가능한 혼란을 지적했을 뿐이다.

이 개념은 가령 칸트까지만 하더라도 국가나 정치 공동체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나(그러니 이 맥락에서는 '국가와 시민 사회의 분리'를 이야기하면 엄청난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후 헤겔 그리고 (아마도) 특히 마르크스의 압도적 영향 아래 "국가로부터 독립되고 또 그 근원성을 주장하는 자본주의적 경제 주체들의 네트워크 같은 것"으로 그 의미가 전도되었다. 나는 이런 비교적 단순한(물론 제대로 따지자면 매우 복잡한) 개념사적 사실을, 이미 나의 이전 책에서 논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참조하라고 하면서, 그저 간략하게만 지나가면서 언급했던 것이다.

초점은 정의 논의가 이루어지는 서구 근대 사회라는 배경의 특별한 성격을 지적하고자 하는 데 있었지 국가와 시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내 이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다. 내 책에서 이 문제는 전혀 본령에 속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박동천이 왜 이 부분을 부각시켜 정말이지 쓸데없이 장황한 논의를 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왜 그랬는지 짚이는 바가 없지는 않은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기로 하자.

나의 롤스 비판이 허술하다는 지적에는 경청할 부분이 있다. 나는 말하자면 본격적으로 롤스를 논하거나 비판하려 하지 않았고 특별한 맥락에서 필요한 부분만 다루었기 때문에 내 논의가 롤스 같은 거장을 다루는 것으로는 많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고 또 그래서 그의 무게에 걸맞게 좀 더 꼼꼼한 분석과 비판을 주문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내 논의 맥락과 초점을 충분히 세심하게 살피지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가 비판하는 것처럼 롤스를 메리토크라시라는 틀 안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그의 명백한 오독이다. 정반대로 나는 롤스의 정의론을 메리토크라시적 정의 이해를 극복해 보려는 정치철학적 시도라는 관점에서 다루었고 또 바로 그 지점에서 그것이 성공적일 것 같지 않다는 데 초점을 두고 비판했다.

여기서 나는 롤스 정의론 그 자체에 대한 세세한 평가보다는 정의의 문제에 접근하는 '분배 패러다임' 그 자체의 극복 필요를 보여 주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롤스에게서 그 패러다임의 문제가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지의 문제에만 집중했다. 그의 제안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문제 삼은 것도 그것으로 롤스가 충분히 비판될 수 있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역시 바로 그 맥락에서 롤스적 접근법의 실천적 함의 같은 것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로서는 이 정도면 내 논의 맥락에서는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박동천은 이런 나의 논의 맥락을 무시하고 또 내가 롤스의 정의론을 메리토크라시적 정의 이념의 틀 안에 끼워 맞추려 한다고 오해를 한 채 역시 장황한 비판을 전개했다. 내 짐작이 옳다면, 이도 조금은 의도적인 포석이다.

3.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던 박동천의 이런 지적들은 나의 논의에 대한 그의 어떤 근원적인 불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핵심은, 조금 날이 선 것으로 읽자면, '실제로는 자유주의자인 장은주가 그 점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면서 사실은 별로 알맹이도 없는 민주적 공화주의라는 것을 내세우며 가당치 않게도 철학으로 정치를 구원하려 들었다'는 정도가 아닌가 싶다. 국가와 시민 사회의 관계 문제에 대한 지적도 그렇고 나의 롤스 해석에 대한 비판도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바로 이 불만에서 발원했지 싶다. 물론 여기서 자유주의는 우리 사회의 흔한 정치적 담론에서처럼 냉소의 대상이 아니라 (추측컨대) 가장 바람직한 정치 이념으로 설정된 것이다.

실제로 나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이른바 진보 진영 일각에서, 터무니없는 무지와 편견으로 자유주의를 터부시하고 냉소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자유주의적 가치들의 진보적 의미를 나름대로 꽤나 공을 들여서 옹호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그 가치들의 의미가 우리 사회의 맥락에서 제대로 포착되려면 내가 책에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은, 무엇보다도 내가 '민주적 공화주의'라고 부른 특별한 시각을 필요로 하며, 이 시각에서는 자유주의를 일정한 방식으로 '지양'하여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합리적 핵심은 수용하되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민주적-공화주의적 '재구성'의 시도라 해두자. 박동천은 이런 게 불필요하며 그다지 의미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박동천도 지적했지만 실제로 나는 누구보다도 개인의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는 인권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신념에 찬 헌정주의자이고, 민주적 공론장의 건강성에서 민주주의의 생명력을 평가할 중요한 잣대를 본다. 또 이 책에서는 제대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국가에서 독립된 자율적 시민 사회의 역할도 (보기에 따라서는 과도하게) 역설하는 편이다. 한 마디로 나는, 문화적 성향도 그런 편이지만, 충분히 '리버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내세우지는 않는다.

박동천의 불만은, 내가 민주적 공화주의라는 걸 내세우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그다지 새로운 정치적 인식 틀이나 지향점 같은 것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왜 스스로의 자유주의 지향을 얼버무리느냐는 거다. 그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점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짐작하는 듯하다. 그래서 가령 흔히 그러는 것처럼 '신자유주의' 같은 개념의 무분별한 사용을 통해 우리 사회 자유주의 세력의 실패를 불필요하게 과장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올바른 정치적 현실 인식이나 평가를 흐린다고 꼬집는 것 같다. 그는 내가 책에서 나름대로는 꽤나 발본적으로 전개한 핵심 논증과 메시지를 충분히 잡아내지 못했거나,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그 가치를 그다지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모양이다.

실제로 책에서 나는 상당한 부분을 할애해서 자유주의의 복잡한 면모를 나름의 방식으로 지적하면서 자유주의를 무턱대고 고전적인 경제적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 같은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긴 했다. 그리고 사회적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가 사회민주주의와 상당히 친화적일 수 있으며 꽤나 매력적인 정치 이념임도 보이긴 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특히 진보 진영 일각의 자유주의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나름대로 통렬하게 공박하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자유주의자들을 내가 수행한 '자유주의 구하기'의 온전한 수혜자들로 편하게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건 누군가처럼 그들이 무슨 부르주아적 본성 때문에 거짓으로만 진보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정말 진보적 의미가 큰 자유주의적 가치들을 충분히 제대로 추구하지 못했다고 믿기 때문에 그랬다.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느니 하는 (사실은 지나가면서 언급한 정도의) 이야기도 바로 그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단순히 그들의 지적, 정치적 나태 같은 것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유주의 이념이 서구에서 가져 온 그대로는 나름의 고유한 조건과 맥락과 역사를 가진 우리 사회의 삶의 현실에 제대로 착근되기 힘든 어떤 본원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정반대의 혐의라면 조금은 수긍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우리 사회 자유주의 세력의 정치적 실패를 불필요하게 과장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내 책의 비판 타깃은 일차적으로 내가 '보수적 진보'라고 규정한 좁은 의미의 진보 세력이긴 했지만, 내 생각에 그와 같은 보수적 진보의 발흥에는 진보를 자처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무능과 불투명한 정치적 정체성도 커다란 한 몫을 했다. 지금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만행을 낳는 데 큰 몫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이를 오로지 정치철학적 차원과 연결시켜 바라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내가 볼 때 적어도 상당하게는 관련이 있다. 박동천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단순히 특정한 정치적 국면에서 특정한 정치인들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만은 볼 수 없다는 이야기다. 바로 이런 것이 내가 자유주의를 지양시켜 보겠다는 포부를 펼쳤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지난 시기 민주 정부들이 무비판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수용했기에 실패했다는 식의 평가는, 박동천의 우려대로, 조금은 무분별한 측면이 있다. 당시의 구체적 경제 상황이나, 특히 그 정부들이 마주했던 거의 불가항력처럼 보였던 (그래서 세계의 다른 진보 정부들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도전 같은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자유주의적 민주 정부들이 국가와 시장의 관계에 대해서나 경제 민주화, 곧 경제 주체들 간의 민주적 정의 관계의 확립 문제와 관련해서나 최소한 매우 모호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종류의 모호함이 단순한 정치적 패착이 아니라 우리 사회 자유주의 세력 일반이 지닌 정치적 이념 그 자체의 불투명성과 깊이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바로 그런 불투명함이 신자유주의의 무비판적 수용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고 해서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 자유주의 이념의 본래적인 철학적 차원으로 내려가서 그 한계의 뿌리를 찾아보려 했고 서구의 공화주의 전통 등에 비판적으로 접속하여 자유에 대한 더 나은 접근법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이기도 했으며, 그런 바탕 위에서 자유주의의 한계를 뛰어 넘으면서도 무엇보다도 우리 근현대사의 정치적 경험에 제대로 부합하는 철학적 틀을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이 발전시켜보고자 했다. 여기서 나는 우리 사회 진보적-자유주의적 전통의 합리적 핵심과 함께 좁은 의미의 진보 세력이 자유주의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며 추구해 왔던 정치적 지향들의 바람직한 요소들도, 물론 내 생각에 그 양자 모두를 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서로가 긍정적 상호 작용을 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담아내 보려고 했다. 물론 아직 내 시도가 충분히 여물지 못했을 수는 있지만, 내 생각에 이런 시도는 우리 사회의 올바른 진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어쨌든 이런 시도에는 이미 논리적으로 우리 사회의 진보적 자유주의 전통의 성취와 그 지향의 긍정적 요소들이 다 담겨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쩌면 박동천이 내가 정초해 보고자 하는 민주적 공화주의가 자유주의와 별 다른 게 없다고 여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한 쪽 면만 본 것 같다. 비록 나의 민주적 공화주의는 샌델처럼 시민적 덕성의 함양에 초점을 맞춘 이른바 '형성적 정치(formative politics)'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서구 '시민적 공화주의'와 같은 방식으로는 자유주의와 선명하게 대비되지 않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민주적 공화주의가 강조하는 민주주의적 정의에 토대하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추구, 민주적 연대성의 강조, 민주적 주체로서의 시민의 역능화에 대한 관심, 민주주의에서 시민 정치의 핵심적 역할에 대한 강조, 가령 이런 것들은 단순히 철학적 정당화의 차원을 넘어서 자유주의와는 많은 점에서 다른 정치 지향을 드러낸다고 믿는다.

복지 국가에 대한 지향도, 민주적 공화주의는 그것을 그 정치적 정체성의 핵심에 둘 뿐만 아니라 시민의 역능화와 시민의 물질적 독립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함으로써, 메리토크라시적 분배 정의의 이념에 기초하는 사회민주주의적이거나 사회적-자유주의적인 인식 틀과는 다른 정치적 초점을 가진다.

또 여기서는 민주적 공론장을 무엇보다도 시민의 자기-지배가 이루어지는 일차적인 장소이자 민주적 연대성의 발현 장소로 이해하고 그것에 아주 핵심적인 민주적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관계 기반 모델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유주의와 다른 길을 간다. 나는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 세력이 내가 제안하는 민주적 공화주의를 수용한다면, 적어도 지금까지의 정치와는 상당히 다른 정치를 보일 것이라 믿는다(좁은 의미의 진보 세력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기서는 논의하지 말기로 하자).

4. 그런데 박동천의 이런 불만은 더 근본적으로는 '정치철학'의 본분 또는 그 사명에 대해 그와 내가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지 싶다. 박동천은 내 책이 별다른 정치적 메시지가 없다고 힐난한다. 모르겠다. 나는 지금껏 내가 자유주의와 관련하여 한 이야기들만으로도 그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있으리라 믿지만, 박동천은 아마 쉬이 수용하지 않지 싶다. 또 나는, 단순한 분배 정의를 넘어서는 다양한 차원의 불의를 지적하면서 진보 정치가 그 모든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하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강력한 복지 국가 지향을 촉구하는 등, 보기에 따라서는 과도한 정치적 메시지를 제시해서 스스로는 그 지나침을 걱정하기도 했다. 이 역시 그에게는 안 보일지 모르겠다.

나는 "정당화가 동나는 지점은 철학의 역할 역시 끝이 나고, 삶이 맨살을 드러내는 지점"이라는 그의 지적을 유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고 철학으로 정치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다. 그가 평가한 나의 '대단한 의욕'이 혹시 '과욕'으로 비칠 수는 있지만, 그리고 내 부족한 공부와 보잘 것 없는 능력을 생각하면 실제로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벌써 오래 전에 처절하게 잃어버린 철학의 학문적 왕좌를 정치 같이 어지러운 영역에서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조차 꾸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자유주의가 지양될 필요가 있다고 하고 민주적 공화주의라는 대안적 이념을 제시하고 정당화했을 때, 나는 그가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철학적 지점을 겨냥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정리해 보자면, 나의 정치철학은 이 책에서는 일단 우리 범 진보 진영의 정치적 지식인들 일반이 지닌 일상적 정치철학을 겨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정치적 행위와 판단을 이끄는, 그러나 반드시 명시적으로 의식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심층적 정치적 인식 틀이라 해두자. 내가 볼 때 적어도 이 지점에서는 철학과 정치는 하나다.

그리고 이 철학은 단순히 그들의 이러저런 정치적 행위와 판단을 이끌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여러 수준의 법이나 제도 및 정치적 관행 등에도 일정한 방식으로 반영 내지는 표출된다. 샌델 식으로 표현하면, 이런 것은 어떤 '공공 철학(public philosophy)'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나는 바로 이런 차원의 정치적 철학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비판적으로 명료화하고, 내가 보기에 좀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며 그것을 내면화하고 습관화하자고 호소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철학이 정치를 구원할 수는 없다. 박동천의 지적처럼, 그러한 구원은 삶과 실천의 몫이고, 거기서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제한적이다. 그리고 삶은, 정치는, 철학보다 훨씬 풍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 철학의 섣부른 개입은 그것들을 방해할 수도 있다. 때문에 철학은 여기서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비트겐슈타인)

더구나 시민적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민주 정치의 궁극은 결국 '시민의 일'이라고 믿는 민주적 공화주의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침묵은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원칙이기도 하다. 내가 좀 더 구체적인 정치적 메시지 제시를 삼갔다고 또는 못했다고 보인다면, 그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다룬 차원의 철학적 정당화는, 그것이 정치를 대체하거나 구원할 수 있어서는 아니지만, 우리의 정치와 실천에서 꼭 필요한 어떤 '페이스 메이커'로서는 더 없이 중요하다. 어떤 식으로든 올바름과 정의로움에 대한 추구 없는 정치는 쉬이 맹목적이고 폭력적인 야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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