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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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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반론한다] <정치의 이동> 장은주에게 답한다
지난 8월 17일 '프레시안 books' 103호에 실린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의 <정치의 이동>(상상너머 펴냄) 서평을 놓고 책의 저자인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와 박 교수가 논쟁을 진행 중이다. 지난 9월 7일 장은주 교수의 두 번째 답변에 박동천 교수가 다시 답변을 보내 왔다.

(☞관련 기사 : ①박동천 :
철학이 정치를 구원할 수 있을까? ②장은주 : '자유주의'가 한국을 구원할 수 있을까? ③박동천 : 이념이 대한민국을 구원할 수 있을까? ④장은주 : '시민적 진보'의 이념이 왜 필요한가?)

지난번까지 이 대화는 비교적 초점이 선명한 쟁점이 있었고, 또한 논의가 진행함에 따라 그 초점 자체가 첨예하게 벼려지는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장은주의 반응은 그렇게 (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애써서 발굴한) 벼려진 쟁점 가운데 몇 가지를 이 정도에서 묻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그는 이론 또는 이념이 어쨌든 정치의 진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되물으면서, 자신의 작업이 하나의 "실천적 이념"을 마련하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자리매김한다. 내가 오독한 것이 아니라면, "실천적 이념"이라는 것은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제대로 된 정치적 철학 담론이나 이론"이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피상적으로 볼 때, 나는 장은주가 말하는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에 동의할 수 있다. 단, 나라면 이 우위라는 항목에 조건을 붙여서 말했을 것이다. 즉,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정치적 현실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차이를 낳는 현안의 결정에서는 이론보다 실천이 우위라고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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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이동>(박동천 지음, 상상너머 펴냄) ⓒ상상너머
어쨌든, 장은주와 내가 정치라는 영역을 (가령 철학에 비교해서) 현실의 삶에 보다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으로 보고,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서 어떤 이론이 설사 필요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천적 의미를 충분히 함축해야 한다는 데까지 견해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두 가지만 거론해 본다. 하나는 장은주가 주창하고자 하는 민주적 공화주의가 그 스스로 설정하고 있는 "실천적 이념"의 기준을 통과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국 이념 여하는 다 접어두고 현안을 '잘'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 사항이라는 깨달음"이라는 문구로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1. 첫째 질문에 관해, 논의의 생산성과 소통을 위해 쟁점의 성격을 분명하게 하고 시작할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가령 민주적 공화주의가 "실천적 이념"의 기준을 완벽하게 통과하느냐 아니면 전혀 통과하지 못하느냐에 있지 않다.

장은주 자신도 자기가 제안하는 바에 내용이 부족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반면에 내 쪽에서 말할 것 같으면, 그의 책에 알맹이가 없다는 식의 비판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전에 명백하게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우리 사이의 차이는 실천적 함의가 있다/없다의 차원이 아니라, 얼마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좀 더 꼬집어 말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장은주 : 내가 말하는 민주적 공화주의의 이념에 앞으로 채워야 할 내용은 많지만, 어쨌든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치명적으로 결핍되었던 실천적 이념의 정립을 위해 하나의 시발점이라는 의의는 있다.

박동천 : 장은주가 충분히 실천적이지 못한 이념의 사례로 드는 민족 해방 계열이나 소위 "자유주의 세력"의 이념에 비해, 장은주 자신이 말하는 민주적 공화주의가 얼마나 더 실천적이라는 이야기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장은주는 민주적 공화주의라는 우산 아래, 자유, 평등, 연대의 원리, 복지 국가와 인권과 무지배의 이념, "국가는 (…) 단지 소극적 자유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 모두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주체로서 자기실현을 위한 다양한 모색과 실험을 펼쳐 나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241쪽) 만들어진 법과 제도 등을 제창한다.

이런 원리와 이념과 가치와 소망 등은 물론 일정한 실천적 함의를 가진다. 다만 나는 여기에 담겨 있는 실천적 함의가 민족 해방의 이념이나 "자유주의 세력"의 이념에 비해 더 충실하고 더 중후하다고 볼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의 궁금증은 다각적으로 몰려온다. 둘만 예시한다.

ⓐ 대한민국 헌법은 태어난 이후 줄곧 제1조에 민주공화국을 표방하고 있는데, 장은주가 말하는 민주적 공화주의는 이것과 다른가? "민주공화국"이라는 간판 아래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소행은 접어두자) 이명박과 이건희와 박근혜가 주류 권력을 쥐고 흔드는데, 이런 상황에 대해 장은주의 "민주적 공화주의"라는 이념이 어떤 실천적인 함의를 제공하는가?

ⓑ 복지 국가의 이념은 한국의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적 자유주의자들이 빨갱이라는 낙인을 무릅쓰고 주창했던 의제였다. 이걸 열린우리당 이후 민주당 계열에서 당론으로 채택하여 "경제 민주화"라는 이름의 유행어로 등극하자, 왼쪽에서는 민주당식 복지는 족탈불급이라고 비판하고, 오른쪽에서는 박근혜와 김종인이 표어만 베껴다가 물타기에 나섰다. 민주적 공화주의가 지향하는 복지 국가는 이 가운데 어떤 쪽에 더 가까운가?

나는 지금 이런 용어들의 실천적 함의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적 공화주의" 또는 "복지 국가"라는 우산 아래서 어떤 특정한 쟁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의 여러 갈래 가운데 하나의 갈래에 "민주적 공화주의" 또는 "복지 국가"의 알맹이를 실천적으로 접합시키는 순간, "민주적 공화주의" 또는 "복지 국가"라는 문구를 편파적으로 해석한다는 (대단히 합리적이고 대단히 타당한) 비판을 면할 길이 없어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 범주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형화되는 모든 정치 이론이나 가치와 원칙이 이와 같은 근원적인 난제를 본질적으로 품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인권이라는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부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인권을 더 급한 문제로 보고 다른 일부는 북한 주민의 인권을 더 급하다고 보면서 서로 싸운다고 할 때, 우선순위를 권위적으로 정하려는 과제에 "인권"이라는 개념이 준거가 될 수는 없지 않는가?

동업자 사이에 이윤을 분배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 사람은 자기가 기획을 잘했기 때문에 60퍼센트를 가져가는 게 정의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가 발로 열심히 뛰었기 때문에 50퍼센트는 가져가는 게 정의라고 주장할 때, "정의롭게 해결하면 된다"는 충고는 실천적 무게가 전혀 없다. 어떤 빛의 한 조각 그림자를 분홍색으로 표현할지 주홍색으로 표현할지 고민하고 있는 화가에게 "불그스레한 색"을 권고하는 셈과 같기 때문이다.

둘째, 장은주는 내가 적은 말에서 "이념 여하를 접어두고"라는 문구를 맥락 바깥으로 끌어내서 과잉 해석했다. 아마 '프레시안 books'의 편집자가 붙인 도발적인 제목 때문에 오도된 면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이념 여하를 접어두고"라고 한 말은 특정한 맥락에 의존하는 뜻이었다. 즉, 어떤 현안에 관해 정치 공동체가 결정을 내리는 바로 그 맥락에서는 결국 (즉, 이것저것 따지고 들어가면 궁극적으로) 이념 여하보다는 목전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이 진짜 쟁점이라는 뜻이다.

복지 국가를 둘러싼 논쟁을 가상해서 살펴보자. 편의상 심상정의 복지와 김용익의 복지와 박근혜의 복지가 서로 경쟁한다고 도식화해 보자. 각 입장은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나름대로 다양한 이론과 통계와 경험적 자료들을 발굴해서 제시할 것이다. 이러한 논쟁에서 각자는 물론 자신의 대안이 현안을 가장 잘 해결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처럼 경합하는 세력들이 서로 "잘"이라는 상표의 사용권을 독점하려고 다툴 때, 결정을 실제로 인도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나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념은 단지 일정한 매개를 거쳐서만 결정을 인도할 수 있고, 즉각적인 그리고 일차적인 주도력은 실력에 의해 행사된다고 본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실력은 시대적/공간적 환경 안에서 정치 게임의 관습적 규칙이 무엇이냐에 따라, 발가벗은 무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여론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일 수도 있으며 다수 동맹을 결성해서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내가 주장하는 바는 이와 같은 실력 사이의 경쟁에서 승패의 갈림길은 일차적으로 "문제를 잘 해결한다"는 상표 또는 상징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상징은 명실상부할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방향의 갈래는 지면관계상 추구해 들어가지 않는다.)

이 경쟁에서 더 훌륭한 이론을 소유한 측이 승리하는 경우도 물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들이 승리한 까닭은 단순히 더 훌륭한 이론을 소유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실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훌륭한 이론과 강한 실력 사이에는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훌륭한 이론이 모종의 매개를 거쳐 실력으로 이어진 경우, 훌륭한 이론을 갖췄고 동시에 이와 상관없는 다른 경로로 실력도 갖춘 경우, 훌륭한 이론은 있지만 실력은 못 갖춘 경우, 훌륭한 이론이 없는데 경쟁에서 이길 실력만 가진 경우. 이렇게 생각하면, 경쟁에서 승리한 측은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우월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승리할 실력을 갖췄기 때문에 승리하게 된다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명약관화하게 드러난다.

나는 이치와 현실이라는 두 양상이 이렇게 이론적으로 구분된다고 보며, 여기서 이치가 현실을 직접, 모종의 매개 없이, 인도한다고 보는 것은 오류임을 누구나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고 시작해야 지적 추상이 삶의 구체성과 유리되지 않은 채 진전할 실마리가 열린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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